동아일보사 김병관 명예회장의 부인 안경희 여사(63, 사진)가 지난 7월14일 서울 동작구 흑석동 H아파트에서 추락해 별세했다.
동아일보 경영전략실에 따르면 평소 지병이 없던 안여사는 올해 2월부터 언론사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되고, 사회 일각에서 동아일보사와 사주를 부도덕한 행위자로 매도하는 비방 공세가 본격화하면서 신경쇠약 증세를 보여왔다. 특히 지난 6월 말 국세청의 고발조치 이후 자녀들에 대한 동아일보사 주식의 명의신탁과 관련해 가족은 물론 인척·지인 등 주변 사람까지 강도 높은 소환조사를 받자 심적 충격을 받아 증세가 급격히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안여사의 뜻하지 않은 타계에 대해 평생을 가정과 가문에 헌신해 온 전통적인 한국여성이 거친 시대상황의 세파에 휩쓸려 ‘희생’한 것이 아니냐며 안타까워하는 분위기다. 고인이 관장으로 일한 일민 미술관의 한 직원(34, 여)은 “관장님은 40대 후반으로 보일 만큼 곱고 단아한 분이었다. 몇 달 전 뵌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었다”며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일부에서는 ‘안여사가 오래 전부터 신경쇠약증에 걸린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1939년 경남 밀양의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안여사는 대구 경북여고와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뒤 24세 때 당시 경성방직에 근무한 김병관 명예회장과 결혼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 가문의 맏며느리였지만 안여사는 평생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다. 다른 재력가 부인들과 달리, 외제품 구입은커녕 유행이 지난 옷도 고쳐 입었으며 핸드백도 친지들이 쓰던 것을 받아 사용한 적도 있는 전형적인 한국적 ‘현모양처’였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고인은 지난 1996년 12월 동아일보사 광화문 구사옥을 개·보수해 개관한 일민(시아버지인 고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의 아호) 미술관의 관장직을 제외하곤 대외활동도 거의 삼갔다. 그러나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만은 남달랐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안여사는 지난 93년 4월 동아일보가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할 당시를 비롯, 혼자 종종 사찰을 찾아 3000배를 올리곤 했다. 98년 중국 베이징 방문시에는 관광지보다 베이징의 고찰부터 찾을 만큼 신앙심이 두터운 것으로 지인들은 기억한다.
김명예회장과의 사이에 딸 희령씨(38, 일민미술관 기획실장)와 두 아들 재호(37, 동아일보 전무), 재열씨(33, 미국 벤처기업 근무)를 둔 안여사는 지난해 차남 결혼 이후엔 평소 조예가 깊은 고미술 분야에 더욱 천착하며 활기찬 모습을 보여왔다. 20여 년에 걸친 고미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은 직접 작품에 대해 품평할 만큼 수준이 높다는 게 일민 미술관 관계자들의 얘기. 지난해 12월 동아미디어센터 3, 4층에 개관한 국내 첫 신문박물관인 ‘프레시움’(Presseum)에도 큰 관심을 보여 박물관의 체계적 운영을 위한 노하우 축적을 강조하기도 했다.
안여사의 사망과 관련, 동아일보 법인과 사주에 대한 국세청 고발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은 자못 여론의 향배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정치권과 언론계 일각에서는 안여사 사망 이후 ‘세무조사 정국’의 수위 변화와 파장을 서둘러 점치는 등 부산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 모든 속세의 진애(塵埃)를 뒤로 하고 고인은 7월17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선영으로 떠났다. 명예를 소중히 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한 한 한국여성의 마지막 길이었다.
동아일보 경영전략실에 따르면 평소 지병이 없던 안여사는 올해 2월부터 언론사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가 시작되고, 사회 일각에서 동아일보사와 사주를 부도덕한 행위자로 매도하는 비방 공세가 본격화하면서 신경쇠약 증세를 보여왔다. 특히 지난 6월 말 국세청의 고발조치 이후 자녀들에 대한 동아일보사 주식의 명의신탁과 관련해 가족은 물론 인척·지인 등 주변 사람까지 강도 높은 소환조사를 받자 심적 충격을 받아 증세가 급격히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때문에 주변에서는 안여사의 뜻하지 않은 타계에 대해 평생을 가정과 가문에 헌신해 온 전통적인 한국여성이 거친 시대상황의 세파에 휩쓸려 ‘희생’한 것이 아니냐며 안타까워하는 분위기다. 고인이 관장으로 일한 일민 미술관의 한 직원(34, 여)은 “관장님은 40대 후반으로 보일 만큼 곱고 단아한 분이었다. 몇 달 전 뵌 적이 있는데 그때만 해도 건강한 모습이었다”며 “사망 소식이 전해진 후 일부에서는 ‘안여사가 오래 전부터 신경쇠약증에 걸린 것으로 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1939년 경남 밀양의 엄격한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안여사는 대구 경북여고와 효성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뒤 24세 때 당시 경성방직에 근무한 김병관 명예회장과 결혼했다. 인촌 김성수 선생 가문의 맏며느리였지만 안여사는 평생 사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지극히 검소한 생활로 유명했다. 다른 재력가 부인들과 달리, 외제품 구입은커녕 유행이 지난 옷도 고쳐 입었으며 핸드백도 친지들이 쓰던 것을 받아 사용한 적도 있는 전형적인 한국적 ‘현모양처’였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고인은 지난 1996년 12월 동아일보사 광화문 구사옥을 개·보수해 개관한 일민(시아버지인 고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의 아호) 미술관의 관장직을 제외하곤 대외활동도 거의 삼갔다. 그러나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만은 남달랐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안여사는 지난 93년 4월 동아일보가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할 당시를 비롯, 혼자 종종 사찰을 찾아 3000배를 올리곤 했다. 98년 중국 베이징 방문시에는 관광지보다 베이징의 고찰부터 찾을 만큼 신앙심이 두터운 것으로 지인들은 기억한다.
김명예회장과의 사이에 딸 희령씨(38, 일민미술관 기획실장)와 두 아들 재호(37, 동아일보 전무), 재열씨(33, 미국 벤처기업 근무)를 둔 안여사는 지난해 차남 결혼 이후엔 평소 조예가 깊은 고미술 분야에 더욱 천착하며 활기찬 모습을 보여왔다. 20여 년에 걸친 고미술에 대한 식견과 안목은 직접 작품에 대해 품평할 만큼 수준이 높다는 게 일민 미술관 관계자들의 얘기. 지난해 12월 동아미디어센터 3, 4층에 개관한 국내 첫 신문박물관인 ‘프레시움’(Presseum)에도 큰 관심을 보여 박물관의 체계적 운영을 위한 노하우 축적을 강조하기도 했다.
안여사의 사망과 관련, 동아일보 법인과 사주에 대한 국세청 고발사건을 수사중인 검찰은 자못 여론의 향배에 신경을 쓰는 모습이다. 정치권과 언론계 일각에서는 안여사 사망 이후 ‘세무조사 정국’의 수위 변화와 파장을 서둘러 점치는 등 부산한 분위기다. 그러나 이 모든 속세의 진애(塵埃)를 뒤로 하고 고인은 7월17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선영으로 떠났다. 명예를 소중히 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의 본분을 다한 한 한국여성의 마지막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