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미 대통령이 백일 잔치 신고식을 조금 일찍 치렀다. 공화당 정권이 탄생한 지 100일째가 되는 날은 오는 4월30일. 하필 그 4월의 첫쨋날인 일요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날아간 미 해군 정찰기가 그만 남중국해 하늘에서 중국 전투기와 충돌, 하이난다오에 비상 착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으로서는 고약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중국도 중국이지만 세계의 이목은 백악관 집무실에 앉은 지 70일밖에 안 된 부시 대통령에게로 쏠렸다. 사건 발생 11일 만인 4월11일(미국 시각) 일단 중국에 억류되었던 승무원 24명이 풀려나면서 일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부시 대통령은 고작 몇 마디밖에 하지 않았고, 딕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은 아예 입도 뻥끗 하지 않았다.
취임 전부터 외교에는 재주가 없을 것이라고 부시 대통령을 깎아내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시를 칭찬한다. 첫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은 셈이다. 민주당도 부시를 거든다. “그만하면 일류급”(조셉 바이든 상원 의원), “부시 외교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보브 그레이엄 상원 의원).
뉴스거리 적은 부시는 ‘4면 대통령’
부시 대통령이 합격점 이상을 얻은 데에는 까닭이 있다. 정찰기 불시착이라는 군사사건을, 그것도 상대가 중국인 민감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군부 등 강경파에게는 함구령을 내리고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조셉 프뤼어 주중 대사 등 민간인에게 일임한 때문.
더구나 부시는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승무원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느냐?” “운동은 할 수 있는 상황이냐?” “장교 막사 같은 데에서 지내느냐?” 옆을 지키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이나 현장에서 승무원들을 만난 닐 실락 장군(준장)에게 고작 이런 것들만 물어봤을 뿐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주미-주중 대사 등 어떤 중국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파월 장관과는 딱 두 차례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정찰기 사건에서 부시가 무대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막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부시의 업무 스타일은 진작부터 화제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전혀 딴판이다. 부시 정권에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이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다. 모든 게 민주당 클린턴 정권과 견주어진다. 국내 정치는 물론 미국의 외교정책에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시는 우선 잘 나타나지도 않고, 아무 데나 나서지도 않으며, 여기저기 나대지도 않는다. 1993년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후 50일 동안 텔레비전 방송이 대통령에게 할애한 시간은 모두 15시간 2분이었다. 이에 비해 부시는 7시간 42분으로 절반도 되지 않는다. 퍼스트 레이디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통령 일하는 걸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부시가 따분하게 보일 수도 있다. 여기저기 나서서 자기 주장을 펴고, 말 잘하는 스타형 클린턴을 8년이나 지켜봐 온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어쨌든 부시는 레이건이나 케네디, 루스벨트처럼 즉석 연설형도 아니고, 모든 문제를 다 아는 척하며 군중 앞에 서기를 좋아하는 대중형도 아니다. 연설대 앞에 서기는 하지만 좌중을 압도하지도 않는다.
부시의 언론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은 부시를 이렇게 두둔한다. “누구처럼 모든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결국 일의 경중이 없어진다.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온 것을 국민들이 봤을 때, 아, 뭔가 중요한 일이 있구나, 이렇게 느끼도록 해야 한다. 클린턴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아무 말이나 했다. 부시는 다르다.”
뉴스를 적게 만들어 내는 대통령, 스캔들이든 정치든 그런 것들에서 이제는 좀 쉬고 싶어하는 국민들에게는 부시가 제격이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가 클린턴의 취임 50일간 내놓은 대통령에 대한 평가 가운데 긍정적인 표현이 42%였던 것에 비해, 부시는 47%로 클린턴을 앞섰다.
텍사스 주지사 시절부터 부시는 무간섭주의를 신봉하는 회사 사장과 같다고 했다. 모든 일을 참모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최종 결재만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오죽하면 한 언론인은 부시를 ‘4면 대통령’이라고까지 했을까. 신문 1면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그저 4면 정도에나 나온다는 말이다.
민주당과의 감세안 싸움에서도 부시는 이런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감세안은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고, 취임하자마자 밀어붙였다. 그러나 정작 의회에서 공화-민주 양당이 머리싸움을 시작했을 때는 나서질 않았다. 자기 상품의 이른바 판촉활동에 발 벗고 나섰을 법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공화당의 한 정치 자문역은 부시의 이런 스타일을 이렇게 평한다. “수동적인 동시에 공세적인 사람이다. 뉴스 하나하나에 민감하긴 하지만 일일이 전략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런 형은 통솔력을 잃을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전선에 있지 않으니 안전하다.”
부시의 언어는 짧고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해군 정찰기 사건 때도 그랬고,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을 못 믿겠다. 지금은 얘기할 수 없다’는 단 두 마디였다.
백악관에 들어가자마자 부시는 그를 찾아온 각국 지도자들을 만났다. 가장 최근의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나, 브라질의 카르도조 대통령, 이스라엘 샤론 총리, 콜롬비아의 파스트라나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천편일률로 ‘우리 친구 XX를 뵙게 되어 영광이며 반갑다’는 수사뿐이었다. 도무지 튀는 구석이라고는 없다. 한편에서는 그러니 ‘진중한 대통령’이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대통령’이라고 무시해 버린다.
공화당 사람들은 대통령을 그렇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막아 나선다. “전임자 수준의 흥미를 유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일을 만들어 내면 언론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이로울 게 없다”는 것이다.
부시가 중국을 상대로 정찰기 사건을 풀어가면서 맛보기로 보여준 미국 외교정책의 한 단면은 집권 직후의 드높던 강경파의 기세와는 거리가 있다. 뚝심은 있었지만 팔뚝을 걷어붙이거나 근육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승무원과 기체가 중국 섬에 억류되어 있는 상황인 만큼 힘을 쓸 해법이 아니긴 했으나, 중국에 꼬투리를 걸 만한 호재는 2008년 올림픽 유치, 타이완 무기 판매, 중국의 WTO 가입, 중국인 학자 억류 건 등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다.
해석의 차이는 있으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의 참을성 있는 외교로 정찰기 사건이 원만하게 풀리자 미국 내 강경파들은 부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매파의 둥우리를 떠났다고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전략적 경쟁자로 치부했던 중국을 이젠 다시 전략적 동반자로 대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클린턴도 처음부터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여겼던 것은 아니다. 미 국익이 얽힐수록 중국은 전략적 경쟁자이든 동반자이든 미국의 파트너가 될 수밖에 없다. 부시가 결국 현실에 눈을 떴다는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아직도 외교정책의 진영을 갖추지 못했다. 빨라야 가을이다. 청사진도 그리지 못했다. 그릴 사람이 없다. 출범 100일째가 다가와서야 겨우 차관보급 실무진 자리를 하나둘씩 메워가는 실정이다. 외교안보 부서를 책임질 실무자가 오죽 모자랐으면, 각 부처의 차관들이 서류를 들고 모여 머리를 맞대는 ‘차관회의’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부시는 외교 안보진에 강온의 이분법을 절묘하게 활용했다.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강경 매파의 한축으로 세우고, 반대편 온건파에는 파월 국무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을 앉혔다. 국가 미사일 방어, 우주 전략, 첨단무기 배치를 통한 미 군사력 보강 등 공화당의 전통적인 군 우위정책은 강경파에게 맡겼다. 한마디로 레이건 시대의 부활이고, 부시의 야무진 꿈도 이것이다. 온건파의 활용도는 미 정찰기 사건 때 여실히 드러났다. 부시 행정부의 대 북한정책의 조심스런 변화 가능성도 점쳐진다.
부시는 또 전형적인 공화당 출신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보다 한발짝 물러서는 편이고, 활동의 폭도 훨씬 좁다. 정부가 나서지 않을수록 좋다는 정치이념이 배어 있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민주당과는 선 땅이 다르다.
게다가 부시는 참모 중시형이다. 그러다 보니 우두머리 참모격인 딕 체니 부통령이 ‘황제 부통령’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대통령이 두 사람이라는 농담도 그냥 흘려 들을 말이 아니다. 체니 부통령을 중시한다는 것은 부시가 매파의 둥지를 떠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유럽이 반대하고 중국 러시아가 도끼눈을 뜨고 있어도 NMD를 관철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의지가 퇴색할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화당은 집권도 했고 의회도 장악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밀어붙일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불안하다. 상원이 50 대 50이다. 자칫 하면 깨진다. 민주당도 상원을 노리고 있다. 제시 헬름스 의원 등 공화당의 상원 의석 2석이 흔들린다. 건강과 나이 때문이다. 2002년 중간선거에 공화당이 미리 공을 들이는 것도 이런 의회 상황 때문이다.
100일을 맞는 부시 정권이 치를 본시험은 타이완이다. 이지스급 구축함 판매 여부가 관건이다. 그 상대는 다시 중국이다.
중국도 중국이지만 세계의 이목은 백악관 집무실에 앉은 지 70일밖에 안 된 부시 대통령에게로 쏠렸다. 사건 발생 11일 만인 4월11일(미국 시각) 일단 중국에 억류되었던 승무원 24명이 풀려나면서 일은 싱겁게 끝나버렸다. 부시 대통령은 고작 몇 마디밖에 하지 않았고, 딕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은 아예 입도 뻥끗 하지 않았다.
취임 전부터 외교에는 재주가 없을 것이라고 부시 대통령을 깎아내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부시를 칭찬한다. 첫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은 셈이다. 민주당도 부시를 거든다. “그만하면 일류급”(조셉 바이든 상원 의원), “부시 외교술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졌다”(보브 그레이엄 상원 의원).
뉴스거리 적은 부시는 ‘4면 대통령’
부시 대통령이 합격점 이상을 얻은 데에는 까닭이 있다. 정찰기 불시착이라는 군사사건을, 그것도 상대가 중국인 민감하기 짝이 없는 사건을, 군부 등 강경파에게는 함구령을 내리고 콜린 파월 국무장관과 조셉 프뤼어 주중 대사 등 민간인에게 일임한 때문.
더구나 부시는 전면에 나서지도 않았다. “승무원들이 성경을 가지고 있느냐?” “운동은 할 수 있는 상황이냐?” “장교 막사 같은 데에서 지내느냐?” 옆을 지키는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이나 현장에서 승무원들을 만난 닐 실락 장군(준장)에게 고작 이런 것들만 물어봤을 뿐이다.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 주미-주중 대사 등 어떤 중국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파월 장관과는 딱 두 차례 만났을 뿐이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정찰기 사건에서 부시가 무대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막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부시의 업무 스타일은 진작부터 화제였다.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전혀 딴판이다. 부시 정권에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이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다. 모든 게 민주당 클린턴 정권과 견주어진다. 국내 정치는 물론 미국의 외교정책에도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부시는 우선 잘 나타나지도 않고, 아무 데나 나서지도 않으며, 여기저기 나대지도 않는다. 1993년 클린턴이 대통령이 된 후 50일 동안 텔레비전 방송이 대통령에게 할애한 시간은 모두 15시간 2분이었다. 이에 비해 부시는 7시간 42분으로 절반도 되지 않는다. 퍼스트 레이디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통령 일하는 걸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부시가 따분하게 보일 수도 있다. 여기저기 나서서 자기 주장을 펴고, 말 잘하는 스타형 클린턴을 8년이나 지켜봐 온 사람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어쨌든 부시는 레이건이나 케네디, 루스벨트처럼 즉석 연설형도 아니고, 모든 문제를 다 아는 척하며 군중 앞에 서기를 좋아하는 대중형도 아니다. 연설대 앞에 서기는 하지만 좌중을 압도하지도 않는다.
부시의 언론 참모 가운데 한 사람은 부시를 이렇게 두둔한다. “누구처럼 모든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결국 일의 경중이 없어진다. 대통령이 텔레비전에 나온 것을 국민들이 봤을 때, 아, 뭔가 중요한 일이 있구나, 이렇게 느끼도록 해야 한다. 클린턴은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아무 말이나 했다. 부시는 다르다.”
뉴스를 적게 만들어 내는 대통령, 스캔들이든 정치든 그런 것들에서 이제는 좀 쉬고 싶어하는 국민들에게는 부시가 제격이다. 텔레비전 저녁 뉴스가 클린턴의 취임 50일간 내놓은 대통령에 대한 평가 가운데 긍정적인 표현이 42%였던 것에 비해, 부시는 47%로 클린턴을 앞섰다.
텍사스 주지사 시절부터 부시는 무간섭주의를 신봉하는 회사 사장과 같다고 했다. 모든 일을 참모들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최종 결재만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오죽하면 한 언론인은 부시를 ‘4면 대통령’이라고까지 했을까. 신문 1면에는 잘 나타나지 않고 그저 4면 정도에나 나온다는 말이다.
민주당과의 감세안 싸움에서도 부시는 이런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감세안은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것이고, 취임하자마자 밀어붙였다. 그러나 정작 의회에서 공화-민주 양당이 머리싸움을 시작했을 때는 나서질 않았다. 자기 상품의 이른바 판촉활동에 발 벗고 나섰을 법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
공화당의 한 정치 자문역은 부시의 이런 스타일을 이렇게 평한다. “수동적인 동시에 공세적인 사람이다. 뉴스 하나하나에 민감하긴 하지만 일일이 전략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런 형은 통솔력을 잃을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전선에 있지 않으니 안전하다.”
부시의 언어는 짧고 무뚝뚝하고,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해군 정찰기 사건 때도 그랬고,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을 못 믿겠다. 지금은 얘기할 수 없다’는 단 두 마디였다.
백악관에 들어가자마자 부시는 그를 찾아온 각국 지도자들을 만났다. 가장 최근의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을 만났을 때나, 브라질의 카르도조 대통령, 이스라엘 샤론 총리, 콜롬비아의 파스트라나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천편일률로 ‘우리 친구 XX를 뵙게 되어 영광이며 반갑다’는 수사뿐이었다. 도무지 튀는 구석이라고는 없다. 한편에서는 그러니 ‘진중한 대통령’이라 하고, 또 한편에서는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되는 대통령’이라고 무시해 버린다.
공화당 사람들은 대통령을 그렇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막아 나선다. “전임자 수준의 흥미를 유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일을 만들어 내면 언론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나라를 위해서는 이로울 게 없다”는 것이다.
부시가 중국을 상대로 정찰기 사건을 풀어가면서 맛보기로 보여준 미국 외교정책의 한 단면은 집권 직후의 드높던 강경파의 기세와는 거리가 있다. 뚝심은 있었지만 팔뚝을 걷어붙이거나 근육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승무원과 기체가 중국 섬에 억류되어 있는 상황인 만큼 힘을 쓸 해법이 아니긴 했으나, 중국에 꼬투리를 걸 만한 호재는 2008년 올림픽 유치, 타이완 무기 판매, 중국의 WTO 가입, 중국인 학자 억류 건 등 얼마든지 가지고 있었다.
해석의 차이는 있으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의 참을성 있는 외교로 정찰기 사건이 원만하게 풀리자 미국 내 강경파들은 부시 대통령이 처음으로 매파의 둥우리를 떠났다고 서운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전략적 경쟁자로 치부했던 중국을 이젠 다시 전략적 동반자로 대하는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클린턴도 처음부터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로 여겼던 것은 아니다. 미 국익이 얽힐수록 중국은 전략적 경쟁자이든 동반자이든 미국의 파트너가 될 수밖에 없다. 부시가 결국 현실에 눈을 떴다는 평가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아직도 외교정책의 진영을 갖추지 못했다. 빨라야 가을이다. 청사진도 그리지 못했다. 그릴 사람이 없다. 출범 100일째가 다가와서야 겨우 차관보급 실무진 자리를 하나둘씩 메워가는 실정이다. 외교안보 부서를 책임질 실무자가 오죽 모자랐으면, 각 부처의 차관들이 서류를 들고 모여 머리를 맞대는 ‘차관회의’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부시는 외교 안보진에 강온의 이분법을 절묘하게 활용했다. 체니 부통령과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강경 매파의 한축으로 세우고, 반대편 온건파에는 파월 국무장관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 보좌관을 앉혔다. 국가 미사일 방어, 우주 전략, 첨단무기 배치를 통한 미 군사력 보강 등 공화당의 전통적인 군 우위정책은 강경파에게 맡겼다. 한마디로 레이건 시대의 부활이고, 부시의 야무진 꿈도 이것이다. 온건파의 활용도는 미 정찰기 사건 때 여실히 드러났다. 부시 행정부의 대 북한정책의 조심스런 변화 가능성도 점쳐진다.
부시는 또 전형적인 공화당 출신 대통령의 모습을 보여준다. 공화당 출신 대통령은 민주당 출신보다 한발짝 물러서는 편이고, 활동의 폭도 훨씬 좁다. 정부가 나서지 않을수록 좋다는 정치이념이 배어 있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민주당과는 선 땅이 다르다.
게다가 부시는 참모 중시형이다. 그러다 보니 우두머리 참모격인 딕 체니 부통령이 ‘황제 부통령’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대통령이 두 사람이라는 농담도 그냥 흘려 들을 말이 아니다. 체니 부통령을 중시한다는 것은 부시가 매파의 둥지를 떠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유럽이 반대하고 중국 러시아가 도끼눈을 뜨고 있어도 NMD를 관철하겠다는 부시 행정부의 의지가 퇴색할 낌새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화당은 집권도 했고 의회도 장악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 밀어붙일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불안하다. 상원이 50 대 50이다. 자칫 하면 깨진다. 민주당도 상원을 노리고 있다. 제시 헬름스 의원 등 공화당의 상원 의석 2석이 흔들린다. 건강과 나이 때문이다. 2002년 중간선거에 공화당이 미리 공을 들이는 것도 이런 의회 상황 때문이다.
100일을 맞는 부시 정권이 치를 본시험은 타이완이다. 이지스급 구축함 판매 여부가 관건이다. 그 상대는 다시 중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