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에 어디를 갈까, 묻는 서울 사람들에게 나는 곧잘 수원성을 권한다. 아이들을 동반할 때는 민속촌이나 놀이동산보다도 훨씬 더 훌륭한 곳이다. 수원성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이상이 깃들이고, 다산 정약용의 실학 정신이 구현된 곳이라 아이들에게 해줄 이야기도 많다.
수원시내 한복판에 있는 팔달문 쪽만 열려 있을 뿐, 수원성은 돌반지처럼 이어져 있다. 팔달문에서 출발하여 곧바로 팔달산으로 오르면 수원성의 지휘본부인 2층 누각 서장대가 나온다. 수원 시내를 굽어보면서 산을 내려서면 옹성이 아름다운 화서문과 장안문이 나온다. 시내를 가로질러 7개 홍예문을 거느린 화홍문과 16개 모서리를 지닌 절묘한 누각 방화수류정을 거쳐, 전망탑처럼 솟은 동북공심돈을 돌아 봉화를 피우던 봉돈에 이르면 수원성을 일주하게 된다. 전체 길이는 5.4km, 누각이나 문루에서 쉬엄쉬엄 머물다 가더라도 넉넉잡아 세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다. 튼튼하고 완벽하게 보존된 성벽을 따라 파도치듯 오르내리는 길은, 트래킹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성을 돌아보다가 시장기를 느끼면 눈에 띄는 갈비집에 들어가면 된다. 수원은 50년대 후반까지 쇠전(우시장)이 유명했다. 쇠전엔 전라북도와 충청도 소장수들까지 몰려들었다. 쇠전이 북적거리다보니, 수원 사람들의 소 보는 눈도 까다롭고 고기 맛보는 것도 까다로워졌다. 수원 갈비의 명성은 이런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갈비맛 보는 데 술 한 잔 안 걸칠 수 없다. 음식점에서 무슨 술을 마실 것인가 망설이는 친구에게 나는 약주를 권한다. 소주처럼 쓰지 않고, 맥주처럼 싱겁지 않아서 좋다. 밥 먹으면서, 나물 반찬 하나 집어들면서도 마실 수 있는 술이 약주다. 그 약주의 대표 주자가 백세주다. 이젠 웬만한 음식점에서 백세주를 주문해 낭패보는 일이 없다.
예전엔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게 약주였다. 아니,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했던 시절들이 있었다. 우리 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약주는 우리 술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세월을 천년도 넘게 이어왔다. 그런데 20세기에 술 문화가 변질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술 제조를 단속했다. 한때 세금의 30%를 주세가 차지했다. 조선인들이 식민 지배의 설움을 술로 달래는 동안에, 일본인들은 그 술로써 조선인을 통치했다. 이런 어이없는 역설이 20세기 우리 술 문화 속에 담겨 있다.
광복 뒤에 들어선 정치 세력은 술에 대한 인식이 일본인들보다 못했다. 아니 한술 더 떠 아예 쌀로 술을 못 빚게 하여, 약주의 맥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다. 어쨌든 무딘 군화발에 부서져버린 장난감 같은 신세였다. 그런 세월을 30년쯤 거치면서 약주는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말을 잃어버렸던 시절만큼이나 우리 입맛을 잃어버린 시절들이었다.
국순당에서 1992년에 백세주를 내놓고 영업을 시작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기존의 주류 유통업체에서는 약주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량 유통에 입맛을 들인 그들에겐 따분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국순당 영업사원들이 직접 술병을 들고 음식점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음식점 주인에게 약주를 가져왔다고 하면, “골치 아파서 누가 먹어요?” 하면서 받으려 하지 않았다. 뒤끝이 안 좋은 저급한 술로 여겼고, 제사나 명절 때에 마시는 귀신술로 여겼다. 그래서 국순당에서는 영업 전략을 바꿨다. 약주를 부각시키지 않고, 약재가 들어간 백세주를 들여놓아 보라고 했다. 건강술의 이미지를 가지고 음식점 주인들을 공략하자, 차라리 술을 들여놓기가 쉬워졌다.
백세주가 인기 상품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민속주를 제조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백세주가 약주 시장을 넓혀놓았다고 호평한다. 그만큼 약주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장에서 알코올 도수 10도 대의 술이 공백 상태에 있었다. 맥주는 4∼5도, 막걸리는 6∼8도, 소주는 23∼25도, 양주는 40도였다. 포도주와 과실주들이 13도였지만 대중 술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백세주의 등장으로 소주와 맥주가 점령한 술판에 약주 잔이 놓인 것이다. 지난해 백세주의 매출액만 900억원으로 이제 약주 시장은 얼추 1000억원 대를 돌파하여 전체 주류 시장의 2%를 넘보게 되었다. 아직 미미한 수치지만, 오랜 공백을 생각하면 대단한 비약이자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백세주의 성공은 어디에 있을까. 맛을 보면 느낌이 온다. 백세주는 13도 술이다. 마시면 옅은 누룩향에 짙은 약재향이 풍긴다. 한두 잔 들이키면, 잔물결에 몸을 실은 듯하다. 예민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물살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순하다. 소주나 양주로 알알하게 혀를 적시는 술꾼이라면 싱겁다고 제쳐놓겠지만, 나이든 분이나 술에 약한 이들은 부담없이 마실 수 있다. 사람을 홀딱 뒤집어놓지 않는, 음식과 음식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잘 스며드는 품격을 지녔다. 예전에 어른들이 반주로 마시던 약주의 전통을 알뜰하게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국순당의 대표 배중호씨는 술의 전통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 들지는 않는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전통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백세주는 조선시대 백세주와 많은 차이가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백세주는 옛날 백하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약주를 빚을 때면 흔히 쌀로 고두밥을 찌거나, 떡을 만들거나, 죽을 쑤어서 사용한다. 그런데 백하주는 생쌀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발효시켰다. 그 기법에서 국순당은 생쌀 발효법을 착안했다. 이 방법은 발효 시간이 길어지긴 하지만, 연료비 절감을 가져왔다.
더불어 국순당은 생쌀을 발효시킬 수 있는 질 좋은 개량 누룩을 개발했다. 흔히 민속주에서 원료와 대비해 누룩을 20% 정도 쓰면 아주 적게 쓰는 편이다. 그런데 국순당에서는 누룩을 1, 2%만 쓰고도 술을 거뜬히 만들어낸다. 획기적인 일이다.
누룩향이 옅은 백세주의 강점은 여기서 나온다. 동네 가게에서 3000원 하는 약주를 마실 수 있는 것도 연료비 절감에서 비롯된, 전통을 오늘에 맞게 재해석해낸 덕분이다.
성벽 하나도 그대로 놓아두기만 하면 세월에 무너지고 만다. 잘 살피고 제때 보수해야 본디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정약용은 정조의 지시를 받아 수원성을 지으면서 그 설계도를 잘 남겨두었다. 그 설계도 때문에 6·25 한국 전쟁 때에 무너진 성벽을 훌륭하게 복원할 수 있었고, 오늘날 수원 화성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국순당은 일제 때에 쓰인 ‘조선주조사’의 백하주 항목을 보고 생쌀 발효법을 복원했다. 술은 성벽과 달라서 전통을 지키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늘 혀로 맛보는 식품이라, 우리 입맛에 맞지 않으면 보존될 수가 없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해내는 것이야말로, 전통 술을 지켜내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다.
1950년대 대구 기린주조장에서 시작하여 포항 탁주제조장과 순천 누룩공장, 강릉 약주제조장을 거쳐 이제 수원시 경계에서 100m 벗어난 경기도 화성군 봉담읍 수영리에 자리잡은 국순당 백세주가 수원성처럼 자랑스런 우리 유산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
수원시내 한복판에 있는 팔달문 쪽만 열려 있을 뿐, 수원성은 돌반지처럼 이어져 있다. 팔달문에서 출발하여 곧바로 팔달산으로 오르면 수원성의 지휘본부인 2층 누각 서장대가 나온다. 수원 시내를 굽어보면서 산을 내려서면 옹성이 아름다운 화서문과 장안문이 나온다. 시내를 가로질러 7개 홍예문을 거느린 화홍문과 16개 모서리를 지닌 절묘한 누각 방화수류정을 거쳐, 전망탑처럼 솟은 동북공심돈을 돌아 봉화를 피우던 봉돈에 이르면 수원성을 일주하게 된다. 전체 길이는 5.4km, 누각이나 문루에서 쉬엄쉬엄 머물다 가더라도 넉넉잡아 세 시간이면 돌아볼 수 있다. 튼튼하고 완벽하게 보존된 성벽을 따라 파도치듯 오르내리는 길은, 트래킹 코스로도 손색이 없다.
성을 돌아보다가 시장기를 느끼면 눈에 띄는 갈비집에 들어가면 된다. 수원은 50년대 후반까지 쇠전(우시장)이 유명했다. 쇠전엔 전라북도와 충청도 소장수들까지 몰려들었다. 쇠전이 북적거리다보니, 수원 사람들의 소 보는 눈도 까다롭고 고기 맛보는 것도 까다로워졌다. 수원 갈비의 명성은 이런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갈비맛 보는 데 술 한 잔 안 걸칠 수 없다. 음식점에서 무슨 술을 마실 것인가 망설이는 친구에게 나는 약주를 권한다. 소주처럼 쓰지 않고, 맥주처럼 싱겁지 않아서 좋다. 밥 먹으면서, 나물 반찬 하나 집어들면서도 마실 수 있는 술이 약주다. 그 약주의 대표 주자가 백세주다. 이젠 웬만한 음식점에서 백세주를 주문해 낭패보는 일이 없다.
예전엔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게 약주였다. 아니, 먹고 싶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했던 시절들이 있었다. 우리 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약주는 우리 술의 중심에 있었다. 그런 세월을 천년도 넘게 이어왔다. 그런데 20세기에 술 문화가 변질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술 제조를 단속했다. 한때 세금의 30%를 주세가 차지했다. 조선인들이 식민 지배의 설움을 술로 달래는 동안에, 일본인들은 그 술로써 조선인을 통치했다. 이런 어이없는 역설이 20세기 우리 술 문화 속에 담겨 있다.
광복 뒤에 들어선 정치 세력은 술에 대한 인식이 일본인들보다 못했다. 아니 한술 더 떠 아예 쌀로 술을 못 빚게 하여, 약주의 맥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보릿고개를 넘던 시절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 논란의 여지는 있다. 어쨌든 무딘 군화발에 부서져버린 장난감 같은 신세였다. 그런 세월을 30년쯤 거치면서 약주는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우리말을 잃어버렸던 시절만큼이나 우리 입맛을 잃어버린 시절들이었다.
국순당에서 1992년에 백세주를 내놓고 영업을 시작하면서 있었던 일이다. 기존의 주류 유통업체에서는 약주를 받아주지 않았다. 대량 유통에 입맛을 들인 그들에겐 따분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국순당 영업사원들이 직접 술병을 들고 음식점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음식점 주인에게 약주를 가져왔다고 하면, “골치 아파서 누가 먹어요?” 하면서 받으려 하지 않았다. 뒤끝이 안 좋은 저급한 술로 여겼고, 제사나 명절 때에 마시는 귀신술로 여겼다. 그래서 국순당에서는 영업 전략을 바꿨다. 약주를 부각시키지 않고, 약재가 들어간 백세주를 들여놓아 보라고 했다. 건강술의 이미지를 가지고 음식점 주인들을 공략하자, 차라리 술을 들여놓기가 쉬워졌다.
백세주가 인기 상품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민속주를 제조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백세주가 약주 시장을 넓혀놓았다고 호평한다. 그만큼 약주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바뀌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시장에서 알코올 도수 10도 대의 술이 공백 상태에 있었다. 맥주는 4∼5도, 막걸리는 6∼8도, 소주는 23∼25도, 양주는 40도였다. 포도주와 과실주들이 13도였지만 대중 술로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백세주의 등장으로 소주와 맥주가 점령한 술판에 약주 잔이 놓인 것이다. 지난해 백세주의 매출액만 900억원으로 이제 약주 시장은 얼추 1000억원 대를 돌파하여 전체 주류 시장의 2%를 넘보게 되었다. 아직 미미한 수치지만, 오랜 공백을 생각하면 대단한 비약이자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백세주의 성공은 어디에 있을까. 맛을 보면 느낌이 온다. 백세주는 13도 술이다. 마시면 옅은 누룩향에 짙은 약재향이 풍긴다. 한두 잔 들이키면, 잔물결에 몸을 실은 듯하다. 예민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 물살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순하다. 소주나 양주로 알알하게 혀를 적시는 술꾼이라면 싱겁다고 제쳐놓겠지만, 나이든 분이나 술에 약한 이들은 부담없이 마실 수 있다. 사람을 홀딱 뒤집어놓지 않는, 음식과 음식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잘 스며드는 품격을 지녔다. 예전에 어른들이 반주로 마시던 약주의 전통을 알뜰하게 복원한 것이다.
하지만 국순당의 대표 배중호씨는 술의 전통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려 들지는 않는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전통을 끊임없이 재해석하는 것이 긴요하다고 여긴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백세주는 조선시대 백세주와 많은 차이가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백세주는 옛날 백하주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약주를 빚을 때면 흔히 쌀로 고두밥을 찌거나, 떡을 만들거나, 죽을 쑤어서 사용한다. 그런데 백하주는 생쌀에 뜨거운 물을 부어서 발효시켰다. 그 기법에서 국순당은 생쌀 발효법을 착안했다. 이 방법은 발효 시간이 길어지긴 하지만, 연료비 절감을 가져왔다.
더불어 국순당은 생쌀을 발효시킬 수 있는 질 좋은 개량 누룩을 개발했다. 흔히 민속주에서 원료와 대비해 누룩을 20% 정도 쓰면 아주 적게 쓰는 편이다. 그런데 국순당에서는 누룩을 1, 2%만 쓰고도 술을 거뜬히 만들어낸다. 획기적인 일이다.
누룩향이 옅은 백세주의 강점은 여기서 나온다. 동네 가게에서 3000원 하는 약주를 마실 수 있는 것도 연료비 절감에서 비롯된, 전통을 오늘에 맞게 재해석해낸 덕분이다.
성벽 하나도 그대로 놓아두기만 하면 세월에 무너지고 만다. 잘 살피고 제때 보수해야 본디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정약용은 정조의 지시를 받아 수원성을 지으면서 그 설계도를 잘 남겨두었다. 그 설계도 때문에 6·25 한국 전쟁 때에 무너진 성벽을 훌륭하게 복원할 수 있었고, 오늘날 수원 화성은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국순당은 일제 때에 쓰인 ‘조선주조사’의 백하주 항목을 보고 생쌀 발효법을 복원했다. 술은 성벽과 달라서 전통을 지키는 방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늘 혀로 맛보는 식품이라, 우리 입맛에 맞지 않으면 보존될 수가 없다.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해내는 것이야말로, 전통 술을 지켜내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다.
1950년대 대구 기린주조장에서 시작하여 포항 탁주제조장과 순천 누룩공장, 강릉 약주제조장을 거쳐 이제 수원시 경계에서 100m 벗어난 경기도 화성군 봉담읍 수영리에 자리잡은 국순당 백세주가 수원성처럼 자랑스런 우리 유산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