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묻지 마세요.’ P씨(31)는 결혼 5년차 주부였던 지난해 6월 남편과 협의이혼한 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IMF 사태 이후 진 남편의 빚 탓에 위자료도 변변히 받지 못한 그는 생활고 해결을 위해 당장 취업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입사는 물론 이후 직장생활에서 이혼경력 때문에 신분상 불이익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됐던 것. 고민 끝에 P씨는 친가로 복적했던 본적을 버리고 스스로 호주가 됨으로써 이혼기록이 남지 않는 일가(一家)창립을 택했다. ‘이혼녀’보다는 ‘독신녀’로 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현재 서울의 한 닷컴기업에 2년째 근무중이다.
2년 전 아내와 성격 차이로 헤어진 K씨(32) 역시 재혼을 앞두고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아직 자신을 총각으로 알고 있는 재혼 상대 여성과 그 집안에서 결혼 뒤 자신의 이혼경력을 알게 될 경우 충격받을 것이 우려됐기 때문. 결국 그는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본적을 대구에서 서울로 옮긴 뒤 지난해 12월 새장가를 들었다. K씨는 “본적지를 옮기면 호적에 이혼경력이 남지 않는다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며 “좋지 않게 여겨지는 신분상 기록을 감추고 싶은 건 인지상정 아니냐”고 반문했다.
여성 일가창립 99년 5만1천여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신분상 기록을 숨기려 호적을 깨끗이 정리하는, 이른바 ‘호적 세탁’이 늘고 있다. 이는 대법원이 지난 97년 12월 본적지를 옮기는 전적(轉籍) 절차를 거치면 이혼사유 등 ‘현재 효력이 없는 신분변동 사유’가 전적에 의해 새로 편제된 호적에서는 삭제되도록 호적 예규를 개정함에 따른 것.
예전엔 누구라도 호적상에 이혼경력이 고스란히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규 개정으로 호주인 남성들도 관련 기록을 숨기는 것이 가능해졌고, 여성의 경우 이미 지난 91년 1월부터 일단 친가에 복적한 뒤 단독 분가를 통해 호주가 되면 이혼기록이 남지 않는 일가창립이 허용되고 있어 일선 구-군청에는 이런 ‘호적 세탁’ 신청자가 줄을 잇고 있다.
“호적예규 개정 직후부터 전적 신고가 하루 20여건 이상 쇄도했다. 하지만 예규 개정 이전의 이혼자 중 상당수가 3년 동안 ‘호적 세탁’을 마친 지금도 매월 30건 가량의 전적 신고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청 호적계 관계자는 “전적 신고 사유 중 상당수가 이혼으로 인한 것이며 특히 구조조정이나 실직에 따른 가정해체로 이혼한 남성들의 전적 사례도 적지 않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신고기간에 따로 제한이 없는 이같은 전적 및 일가창립은 날로 급증하는 이혼(1999년 국내 이혼 11만8000여건, 2000년 통계청 발표)과 맞물려 더욱 보편화하고 있다. 대법원 통계담당관실에 따르면 호적예규 개정 직후인 98년부터 전국의 전적 건수는 매년 4만여건을 웃돌고 있다. 게다가 여성의 일가창립은 최초 허용연도인 지난 91년 1만1897건에 머물던 것이 96년 2만4260건에 달하고 97년 3만533건, 98년 4만4575건, 99년 5만1032건(2000년 통계 미산정)으로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일선 구-군청에서 전적 및 일가창립 신고시 해당 사유를 별도로 조사하지 않는 행정관례상 이혼에 따른 ‘호적 세탁’의 정확한 통계치를 뽑을 순 없지만 일가창립의 이유가 대부분 이혼 때문이란 현실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수치다. 더욱이 이혼 여성에게는 일가창립과 친가복적 중 택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도 이혼기록이 그대로 남는 친가복적(입적 포함) 건수는 연평균 2만여건으로 일가창립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점 또한 이런 경향을 뒷받침한다.
범죄나 신분세탁 목적으로 빈발했던 호적부의 위-변조를 막고 개인 프라이버시를 보호하자는 취지의 호적예규 개정으로 가능해진 전적 절차와 일가창립 제도가 ‘본적지 이전’이란 장소적 개념을 넘어 이혼 남녀를 위한 일종의 ‘사면장’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렇게 ‘세탁’된 호적은 당사자들의 바람대로 ‘영원한 비밀’로 묻힐 수 있는 것일까.
“전적이나 일가창립 절차만으로 이혼경력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는다. 제적부에는 이혼은 물론 입양, 파양기록 등 모든 개인의 신분변동 사항이 그대로 남는다.” 대법원 법정과 이소영 호적계장은 국민의 신분관계를 등록하여 공증하는 것이 현행 호적제도의 취지인 만큼 ‘호적 세탁’으로 신분변동 전체를 부정할 순 없다고 말한다. 제적등-초본을 통해 언제든 초혼 여부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올해 1월4일부터 공포-시행중인 개정 호적법 시행규칙이 호적-제적부 열람 및 등-초본 교부를 청구사유가 명백하고 사생활 침해 등 악용 소지가 없는 사람에게만 허용하는 제한을 둬 누구나 열람 가능했던 과거의 폐단을 막고는 있지만 결혼예정자 등 합당한 사유를 갖춘 사람의 경우 여전히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고객 신뢰성 확보가 생명이랄 수 있는 대다수 결혼정보회사들은 초-재혼 신규회원 가입시 호적등본을 구비서류로 받지만 변조된 사례가 수시로 발견되자 2, 3년 전부터 아예 본인의 위임을 받아 제적부까지 추적하고 있다.
“요즘 이혼사실 자체를 숨기는 회원은 거의 없다. 하지만 취업 등을 이유로 호적을 깨끗이 정리해둔 이혼 여성의 경우 가끔 자식 양육관계 등이 불명확한 케이스가 있어 확인은 필수적이다.” 재혼 성사율이 30%에 달하는 ㈜좋은만남 선우의 박미숙 재혼팀장의 말이다. 그는 “생활의 편리성이란 원래의 목적보다 자신의 부담스런 ‘과거’ 때문에 ‘호적 세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아직도 이혼을 ‘빅 뉴스’로, 이혼자를 사회 부적응자나 인생 낙오자로 매도하거나 동정하는 그릇된 사회 풍토 때문일 것”이라 지적한다.
‘호적 세탁’에 대한 선호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혼-사별 상처 치유를 표방한 커뮤니티 사이트인 ‘쏠로사이트’(www.ssolo.com)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려면 호적등본을 제출해 자신이 이혼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 사이트의 1만3000여 남녀회원 중 독신자를 제외한 이혼자는 80%. 사이트 부운영자 남균씨(32)는 “이들이 제출한 호적등본 역시 전적이나 일가창립을 거친 이후의 호적들이 대다수”라고 털어놓는다. ‘호적 세탁은 새 출발을 위한 기본사양’이라는 이혼자들의 변화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호적 세탁’에 대한 이런 맹신이 자칫 또다른 가정문제로 비화되는 불행한 사례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드물긴 하지만 재혼 후 배우자의 과거 혼인경력이 뒤늦게 드러나 가정불화가 생겨 상담을 의뢰하는 사례가 1년에 2, 3건은 접수된다.” 호주제 폐지운동을 벌이고 있는 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상담위원은 “젊은 이혼 여성일수록 호적 세탁에 대한 관심이 높아 이혼경력 삭제와 관련한 상담을 곧잘 의뢰한다”며 “호적제도의 전면개편이 이뤄지지 않는 한 ‘호적 세탁’은 많은 문제점을 파생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궁극적으로 기존 호적제도를 대체할 개인별(1인 1호적) 신분공증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호주제 폐지가 올해 여성계의 화두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혼경력이 인생의 ‘흠’이나 ‘얼룩’으로 치부되는 사회. ‘한 점 부끄럼없는’ 호적을 가지려는 ‘호적 세탁’의 열망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2년 전 아내와 성격 차이로 헤어진 K씨(32) 역시 재혼을 앞두고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아직 자신을 총각으로 알고 있는 재혼 상대 여성과 그 집안에서 결혼 뒤 자신의 이혼경력을 알게 될 경우 충격받을 것이 우려됐기 때문. 결국 그는 ‘과거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본적을 대구에서 서울로 옮긴 뒤 지난해 12월 새장가를 들었다. K씨는 “본적지를 옮기면 호적에 이혼경력이 남지 않는다는 친구의 조언을 따랐다”며 “좋지 않게 여겨지는 신분상 기록을 감추고 싶은 건 인지상정 아니냐”고 반문했다.
여성 일가창립 99년 5만1천여건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신분상 기록을 숨기려 호적을 깨끗이 정리하는, 이른바 ‘호적 세탁’이 늘고 있다. 이는 대법원이 지난 97년 12월 본적지를 옮기는 전적(轉籍) 절차를 거치면 이혼사유 등 ‘현재 효력이 없는 신분변동 사유’가 전적에 의해 새로 편제된 호적에서는 삭제되도록 호적 예규를 개정함에 따른 것.
예전엔 누구라도 호적상에 이혼경력이 고스란히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예규 개정으로 호주인 남성들도 관련 기록을 숨기는 것이 가능해졌고, 여성의 경우 이미 지난 91년 1월부터 일단 친가에 복적한 뒤 단독 분가를 통해 호주가 되면 이혼기록이 남지 않는 일가창립이 허용되고 있어 일선 구-군청에는 이런 ‘호적 세탁’ 신청자가 줄을 잇고 있다.
“호적예규 개정 직후부터 전적 신고가 하루 20여건 이상 쇄도했다. 하지만 예규 개정 이전의 이혼자 중 상당수가 3년 동안 ‘호적 세탁’을 마친 지금도 매월 30건 가량의 전적 신고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서울 종로구청 호적계 관계자는 “전적 신고 사유 중 상당수가 이혼으로 인한 것이며 특히 구조조정이나 실직에 따른 가정해체로 이혼한 남성들의 전적 사례도 적지 않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신고기간에 따로 제한이 없는 이같은 전적 및 일가창립은 날로 급증하는 이혼(1999년 국내 이혼 11만8000여건, 2000년 통계청 발표)과 맞물려 더욱 보편화하고 있다. 대법원 통계담당관실에 따르면 호적예규 개정 직후인 98년부터 전국의 전적 건수는 매년 4만여건을 웃돌고 있다. 게다가 여성의 일가창립은 최초 허용연도인 지난 91년 1만1897건에 머물던 것이 96년 2만4260건에 달하고 97년 3만533건, 98년 4만4575건, 99년 5만1032건(2000년 통계 미산정)으로 폭발적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일선 구-군청에서 전적 및 일가창립 신고시 해당 사유를 별도로 조사하지 않는 행정관례상 이혼에 따른 ‘호적 세탁’의 정확한 통계치를 뽑을 순 없지만 일가창립의 이유가 대부분 이혼 때문이란 현실을 감안하면 실로 엄청난 수치다. 더욱이 이혼 여성에게는 일가창립과 친가복적 중 택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도 이혼기록이 그대로 남는 친가복적(입적 포함) 건수는 연평균 2만여건으로 일가창립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뚜렷한 대조를 보이는 점 또한 이런 경향을 뒷받침한다.
범죄나 신분세탁 목적으로 빈발했던 호적부의 위-변조를 막고 개인 프라이버시를 보호하자는 취지의 호적예규 개정으로 가능해진 전적 절차와 일가창립 제도가 ‘본적지 이전’이란 장소적 개념을 넘어 이혼 남녀를 위한 일종의 ‘사면장’ 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셈이다.
과연 이렇게 ‘세탁’된 호적은 당사자들의 바람대로 ‘영원한 비밀’로 묻힐 수 있는 것일까.
“전적이나 일가창립 절차만으로 이혼경력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는다. 제적부에는 이혼은 물론 입양, 파양기록 등 모든 개인의 신분변동 사항이 그대로 남는다.” 대법원 법정과 이소영 호적계장은 국민의 신분관계를 등록하여 공증하는 것이 현행 호적제도의 취지인 만큼 ‘호적 세탁’으로 신분변동 전체를 부정할 순 없다고 말한다. 제적등-초본을 통해 언제든 초혼 여부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올해 1월4일부터 공포-시행중인 개정 호적법 시행규칙이 호적-제적부 열람 및 등-초본 교부를 청구사유가 명백하고 사생활 침해 등 악용 소지가 없는 사람에게만 허용하는 제한을 둬 누구나 열람 가능했던 과거의 폐단을 막고는 있지만 결혼예정자 등 합당한 사유를 갖춘 사람의 경우 여전히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고객 신뢰성 확보가 생명이랄 수 있는 대다수 결혼정보회사들은 초-재혼 신규회원 가입시 호적등본을 구비서류로 받지만 변조된 사례가 수시로 발견되자 2, 3년 전부터 아예 본인의 위임을 받아 제적부까지 추적하고 있다.
“요즘 이혼사실 자체를 숨기는 회원은 거의 없다. 하지만 취업 등을 이유로 호적을 깨끗이 정리해둔 이혼 여성의 경우 가끔 자식 양육관계 등이 불명확한 케이스가 있어 확인은 필수적이다.” 재혼 성사율이 30%에 달하는 ㈜좋은만남 선우의 박미숙 재혼팀장의 말이다. 그는 “생활의 편리성이란 원래의 목적보다 자신의 부담스런 ‘과거’ 때문에 ‘호적 세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아직도 이혼을 ‘빅 뉴스’로, 이혼자를 사회 부적응자나 인생 낙오자로 매도하거나 동정하는 그릇된 사회 풍토 때문일 것”이라 지적한다.
‘호적 세탁’에 대한 선호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이혼-사별 상처 치유를 표방한 커뮤니티 사이트인 ‘쏠로사이트’(www.ssolo.com)에 정식회원으로 가입하려면 호적등본을 제출해 자신이 이혼했음을 입증해야 한다. 이 사이트의 1만3000여 남녀회원 중 독신자를 제외한 이혼자는 80%. 사이트 부운영자 남균씨(32)는 “이들이 제출한 호적등본 역시 전적이나 일가창립을 거친 이후의 호적들이 대다수”라고 털어놓는다. ‘호적 세탁은 새 출발을 위한 기본사양’이라는 이혼자들의 변화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호적 세탁’에 대한 이런 맹신이 자칫 또다른 가정문제로 비화되는 불행한 사례가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지적마저 나오고 있다.
“드물긴 하지만 재혼 후 배우자의 과거 혼인경력이 뒤늦게 드러나 가정불화가 생겨 상담을 의뢰하는 사례가 1년에 2, 3건은 접수된다.” 호주제 폐지운동을 벌이고 있는 가정법률상담소 조경애 상담위원은 “젊은 이혼 여성일수록 호적 세탁에 대한 관심이 높아 이혼경력 삭제와 관련한 상담을 곧잘 의뢰한다”며 “호적제도의 전면개편이 이뤄지지 않는 한 ‘호적 세탁’은 많은 문제점을 파생할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한다. 궁극적으로 기존 호적제도를 대체할 개인별(1인 1호적) 신분공증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호주제 폐지가 올해 여성계의 화두라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혼경력이 인생의 ‘흠’이나 ‘얼룩’으로 치부되는 사회. ‘한 점 부끄럼없는’ 호적을 가지려는 ‘호적 세탁’의 열망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