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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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의 기회 또 놓칠 것인가

구조조정 몰아치는데도 국가 경영전략은 불투명 …정치적 리더십, 국민적 역동성 살리기가 최우선 과제

  • 입력2005-03-15 16: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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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만의 기회 또 놓칠 것인가
    싱가포르의 최남단 센도사섬에는 이 나라의 상징물인 사자 모양의 대형 탑이 하나 서있다. 머리는 사자 모양에 하반신은 인어의 모습을 띠고 있는 이 ‘머라이언’ 타워 위에 올라서면 싱가포르 국부의 상징인 탄종 파커 항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집채만한 컨테이너들이 수천개 쌓여 있는 이 항만은 미주대륙과 유럽을 오가는 수많은 선박들이 너나할것없이 물류 중개기지로 이용하는 곳이다. 세계 각국이 이 첨단 항만에 떨어뜨리고 가는 돈은 오늘날 싱가포르 국부의 원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가 35년밖에 안 되는, 서울 크기만한 도시국가가 세계 1위의 국가경쟁력을 갖게 된 비밀은 바로 이러한 첨단 항만 시설을 바탕으로 ‘아시아의 비즈니스 거점’이라는 국가 비전을 수립하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한 데에 있었다.

    소규모 도시국가였지만 국가의 비전과 미래상을 명확히 하고 이를 위해 모든 자원과 인력을 집중했기 때문에 동아시아 일대를 온통 휩쓸고간 외환 위기의 폭풍 속에서도 싱가포르만은 끄떡없이 버텨낼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외환위기 이후 3년이 넘는 구조조정의 수렁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은 구조조정 이후 어떠한 국가적 모델을 세워나가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없다. 기껏해야 신자유주의가 옳으니 그르니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을 뿐이다. 또 사회적으로 보더라도 효율의 가치가 우선하는 것인지 분배나 평등의 가치를 앞세워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최소한의 합의조차 없다.

    100년 만의 기회 또 놓칠 것인가
    그동안 우리 경제발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상 초유의 구조조정 과정을 거치면서 시민사회 일각에서 소득 격차의 심화니 ‘20대 80의 사회’니 하는 불길한 시나리오들은 간혹 제기되었지만 이러한 구조조정 작업의 종착점에 어떤 사회경제적 체제가 자리잡고 있을지 명쾌하게 제시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국민에게 지금의 고통을 참고 견디면 경제가 좋아지고 국민소득도 다시 1만달러시대를 회복하리라는 막연한 계몽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림대 성경륭 교수(사회학)는 국가 비전 부재의 원인에 대해 정권 담당 세력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6공 이후 집권한 민주화 세력의 무능력과 비효율성 때문에 각 집단의 이익과 요구를 조정,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 성교수의 진단. 문민정부 이후 국정 운영을 담당한 과거 민주화 세력은 대정부 투쟁에서는 유능한 면모를 보였지만 집권 이후 새롭게 발생한 복잡다단한 사회경제적 갈등을 조정, 운영하는 데에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를 조직적으로 통합해 국민에게 제시할 수 있는 국가 비전이란 손조차 댈 수 없었다는 결론이다. 비전이 마련되기도 전에 다원화된 사회의 이익 갈등만 거칠게 표출되면서 국가적 원심력만이 극대화되는 사태에 이른 것이다. YS시절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을 지낸 서울대 박세일 교수 역시 정권 담당 세력, 또는 개혁 추진 세력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창업(創業)세력을 정치인이라고 하고 수성(守成)세력을 관료 집단이라고 할 때 경장(更張)세력, 즉 개혁세력이 우리 사회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들은 조직화되어 있지도 못했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작은 어떠한 후발 개도국의 경우를 보더라도 정부가 나서서 명확한 국가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00년 만의 기회 또 놓칠 것인가
    얼마 전 OECD 주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양수길 전 대사는 “선진국에서 국가 비전은 모든 정책토론의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선진국 중심의 경제 협력 기구인 OECD에서도 경제, 환경, 사회 각 분야에서 미래 연구 프로그램을 마련하기 위해 ‘비전 스터디’(Vision Study), 또는 ‘비전 세팅 엑서사이즈’(Vision Setting Exercise)들이 이뤄지고 이 결과물들이 OECD의 구체적 프로그램으로 채택된다는 것. 양 전 대사는 “선진국들의 공통점은 비전이 수립되고 채택되는 과정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김정원 전 국제교류재단 이사장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대부분의 선진국은 헌법 조항에 국가의 비전을 분명히 하고 거시적인 틀은 그대로 놓아둔 상태에서 미시적 정책만 바꾸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에게도 독자적인 경제 발전 모델을 세우기 시작한 60년대 이후 이러한 국가 비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대 초반을 관통한 ‘공업입국’이나 ‘수출진흥’ 또는 5공의 모토였던 ‘선진조국 창조’ 같은 것도 넓게 보면 국가 비전에 해당하는 구호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전은 국민의 피부에 와닿는 구체성이 적었을 뿐 아니라 5공 정권의 ‘의식 개혁’이나 ‘선진조국 창조’처럼 집권 과정의 정통성 부재를 보완하기 위해 던져진 것들도 있었다. 그런 만큼 국민들의 자발적 공감대를 끌어내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문민정권이 들어선 이후 내세운 국가적 비전은 바로 ‘세계화’였다. 어쩌면 이 세계화라는 비전은 박정희 시대의 공업입국이나 수출진흥 이후 처음으로 제시된 21세기형 국가 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YS정부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세계화를 ‘추진’하겠다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세계화는 우리가 ‘추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밀려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세계화의 핵심 요소인 금융시장의 글로벌화에 관심을 기울였던 사람은 당시 아무도 없었다. ‘세계화 총리’로 불리기까지 했던 이홍구 전 국무총리의 회고.

    “당시 자본시장의 세계화 움직임과 정보기술 혁명 등 두 가지 거대한 트렌드를 예측하고 여기에 대비했더라면 지금 상황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던 것이 당시 세계화 추진과 관련해 가장 뼈아픈 약점이었다.”

    이 전총리는 “바로 이점과 관련해 국가 비전과 경영 전략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지적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21세기를 지배하는 화두인 세계화의 핵심이 바로 금융시장의 급속한 통합과 단일시장화라는 데에 동의한다. 물론 그 밑바탕에는 정보기술 혁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수출 총액이 1000억달러를 돌파하고 선진국 클럽이라는 OECD의 품에 안기면서 장밋빛 꿈에 젖어 있던 YS시절 추진했던 세계화의 핵심은 교육개혁과 사법개혁이었다. 뭔가 우선 순위가 뒤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박세일 전 수석은 이에 대해 “금융개혁은 OECD 가입 이후 국제기준이라는 압력을 동원해 이뤄내려고 했으며 당시 상대적으로 치중했던 것은 교육, 노동 등 실물 분야의 개혁이었다”고 말했다.

    ‘세계화 국가’ 라는 국가 비전이 맥을 정확히 짚은 것은 사실이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에 사회민주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당시의 세계화 전략은 외환 위기 이후 DJ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시장경쟁과 대외개방체제 구축, 그리고 생산적 복지를 통한 사회적 결속 강화 등의 정책 조합과 크게 다르지 않다. 21세기의 문턱을 내다보는 데 있어서는 어느 정도 적중했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YS식 세계화가 노정한 방법론상의 오류를 지적한다. 산업연구원 심영섭 선임연구위원은 “세계화 전략은 정작 우리나라와 같이 강대국에 둘러싸인 소국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전략적 개념을 결여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DJ정부 출범 이후 벌어지고 있는 구조조정 과정도 국가 비전이라고 할 만한 명확한 방향성을 각 경제 주체들에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은행을 인위적으로 통합해 대형은행을 만들어 놓으면 금융의 체질이 어떻게 강화되고 고객들이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감하는 국민은 별로 없다. 기업구조조정도 마찬가지. 찢어진 부위를 꿰매고 부러진 뼈를 봉합하는 대수술 이후 태어날 시장의 새로운 플레이어가 그라운드에 섰을 때 기골이 장대한 센터포드형이 나올지, 아니면 발빠르고 다부진 미드필더형이 출현할지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더구나 이러한 플레이어를 정글이나 다름없는 세계시장에 홀로 내놓기 위해서는 무엇을 먹이고 어떤 유니폼을 입혀야 하는지 관중은 더더욱 헷갈릴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을 흔히 ‘창조적 파괴’라고 하지만 ‘파괴’를 목격하는 국민들은 많아도 ‘창조’를 예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말이다. 구조조정이 성공해 경제의 체질이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고스란히 남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난해 10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개막식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개방형 신(新)통상국가’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끄집어낸 바 있다. 한국을 싱가포르와 같은 세계적 비즈니스센터의 한 축으로 설정하고 재화, 용역, 물류, 인적자원 등이 자유롭게 드나드는 거점국가화하겠다는 구상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양질의 인적 자원과 지경학적 이점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커다란 관심을 끌었지만 이것이 막바로 국가 비전으로 검토되거나 논의되지는 못했다. 어느 한 부처 차원에서 검토, 추진할 만한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제 규범 이행에 따른 소극적 개방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필요에 따른 적극적인 개방 전략이 필요하다. 국민의식도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하고 영어 교육 대중화도 이뤄져야 한다. 산업연구원 심영섭 선임연구위원은 “이를 위해 초중고 교과서를 국-영문으로 동시발간하거나 직장인들에 대한 사내 외국어연수에 세금 감면 혜택을 주는 등 획기적인 외국어 지원책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림대 성경륭 교수도 “국가와 국민, 노와 사가 모두 합쳐 ‘인적 자본을 위한 연대’를 결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이러한 국가 모델은 특히 IMF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명분 하에 자연스레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던 미국 모델보다는 네덜란드나 벨기에 같은 유럽식 모델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끌고 있다.

    이어령 전 새천년준비위원장도 국가 비전을 세우지 못한 이유에 대해 “개발 드라이브시대에는 일본형 모델만을, 일본이 침체 국면으로 들어간 이후에는 리스트럭처링 등 구조조정에 관한 미국형 모델만을 따라갔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면서 유럽 지역의 부국들로 눈을 돌려 볼 것을 주문했다.

    한편 단국대 김태기 교수(경제학)는 영미식이나 유럽식 모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지난 3년간 우리가 추진했던 구조조정 모델 역시 국가 주도의 정책 드라이브였다는 점에서 미국식 구조조정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 김교수는 “미국이나 네덜란드 등 벤치마킹 국가로 거론되는 나라들과 우리나라는 정치적 구도 자체가 다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적 리더십에 의해 우리 국민이 가졌던 역동성을 되살리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시장을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라도 ‘정책의 탈(脫)정치화’를 통해 국민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역시 비전 수립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국가 발전 전략을 내세우고 이를 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만들 수 있는 정치권의 능력이다. 이러한 역할은 관료들의 몫도, 시민단체의 몫도 아니다. 여기에는 물론 국민에 대한 설득과 강력한 리더십이라는 두 개의 바퀴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혁은 곧 리더십이고 리더십은 곧 정치권의 핵심세력이 비전을 확실히 틀어쥐고 이를 바탕으로 국민을 설득해 끌고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흠집내기에 발목잡혀 한발짝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정치권에 국민적 비난이 집중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박세일 전 수석은 “현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다음 정권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혀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이 보는 한국호(號)의 미래는 대체로 낙관적이다. 김정원 전 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은 “한국은 다른 나라들이 가질 수 없는 인적-지적-역사적 환경적 요인을 모두 갖추고 있다”며 지도자 그룹이 비전만 명확히 제시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국가적 에너지를 모아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게다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에게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개혁 작업에 참여했던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여소야대 상황이나 국가적 위기 국면에서 개혁 작업이 오히려 수월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리더십을 발휘하기가 용이했다는 말이다. 역설적이지만 우리에게도 IMF 사태가 초래한 극단적 위기 국면이 오히려 개혁을 채찍질해오지 않았던가.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은 뚜렷한 비전을 찾아내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한국호(號)에도 중요한 충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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