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동원을 무시하는 감독이 있다면 그는 사표를 내야 마땅하다.” 메이저리그의 명장 화이티 허조그 감독(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의 말에 따르자면 김재박 현대 감독은 벌써 사표를 내야 했다. 김감독은 2000시즌 한국시리즈 챔피언 만들기엔 성공했을지 몰라도 관중 만들기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점 또한 김재박의 강점이다. 애당초 팬들의 취향에 영합하려는 야구를 했다면 그는 벌써 자진 사임 전에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재박(46). 굳이 감독 분류로 따지자면 그는 지장(智將)에 해당한다. 스파르타식으로 선수를 밀어붙이는 스타일의 맹장이 있는가 하면 융화와 화합을 최고 덕목으로 치는 감독을 덕장(德將)으로 부른다. 김재박은 상황 대처에 매우 능한 지도자, 즉 지장이다. 빠른 머리 회전에 때로는 잔인할 만큼 강한 승부수를 띄워 상대팀 관계자는 물론 언론 종사자에게 된통 비아냥거림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그의 사전에 없다. 즐기려고 했으면 감독 생활은 애시당초 하지 않는다는 게 지장들의 공통된 철학이고, 이는 김재박 감독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웃사이더 선수시절 생존법 터득
김재박은 96년 창단팀 현대 감독을 맡아 4시즌 동안 두차례 우승, 준우승 1차례를 일궈냈다. 김응룡 해태감독을 제외하고 2차례 우승한 감독은 강병철 당시 롯데 감독(현 SK)밖에 없다. 대단한 경력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선수들이 많으면 그만큼 우승 확률은 높고 감독은 자연스레 명장 대열에 올라선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현대의 우승 신화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김재박에게는 그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함은 90년대 중반 이후 새롭게 닻을 올린 현대호의 명문구단 조기 정착을 촉발시킨 요인이다. 재미없는 야구의 대명사처럼 취급됨에도 불구하고 김재박의 능력에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재박은 54년 대구 출생으로 올해 46세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경상도 토박이. 경북중학교 시절, 작고한 서영무감독 밑에서 야구를 시작한 김재박은 작은 키로 인해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구지역이 어떤 곳인가. 당시에도 온갖 야구엘리트들이 다 모인 곳이었다. 경북고 대구상고 등의 야구명문교는 1학년만으로 구성된 팀들이 대학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곧잘 이기곤 하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갖춘 학교들이었다. 김재박은 갈 곳이 없었고 그를 받아준 팀은 서울의 대광고교. 이후 영남대를 거치며 절치부심의 시절을 지내는 동안 그의 마음속엔 어떤 웅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엘리트코스라곤 밟아보지도 못했고 알아주는 이도 없었던 그 시절이 오히려 김재박야구의 원형질이 생성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국외자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자신만 믿는다는 것이다. 그는 70년대 야구의 전성기를 내달리던 대구-경북 지역의 그늘에 가려진 아웃사이더였고 이러한 배경은 자신을 더욱 단련시켜 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아웃사이더적 배경은 창단팀 현대와 딱 들어맞는다. 국내 기업 중 전설적인 창업신화를 가진 현대의 사령탑이 공교롭게 창단팀만 돌아다닌 김재박 감독의 차지가 된 것. 김감독은 대광고 창단 멤버였고, 영남대도 팀 창단과 함께 입학했다. 대학 졸업 뒤 한국화장품에 들어갔고 90년 LG의 창단 멤버로 뛰었다. 현대의 창단과 함께 사령탑을 맡았으니 창단팀만 벌써 다섯번째. 모든 창단팀을 3년 이내에 정상에 올려놨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점에서 출발하는 데는 오히려 아무런 연고도, 배경도 없는 아웃사이더들이 제격이고 그는 이것을 증명해 냈다. 그의 이런 특성은 꿋꿋한 자기 승부를 펼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해 왔는데 선배 감독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해태 시절 한국시리즈 V9을 일궈낸 명장 김응룡 삼성 감독은 김재박 현대 감독을 노골적으로 불편해 하는데, 그는 그 이유에 대해 김재박 감독의 평소 태도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야구 스타일이 싫다는 것이다. 상대가 싫어하는 야구스타일. 그것만 해도 벌써 성공한 것 아닐까. 이에 대해 김재박 감독은 “알고 있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김응룡 감독의 ‘준동’에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김응룡 감독과의 승부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던 감독들이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김응룡이 일부러 거명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김재박 야구를 인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장외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김재박은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고 무뚝뚝하다. 기자들이 그에게 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선수들은 항상 긴장한다. 말은 없어도 항상 선글라스 너머로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김재박 감독은 비웃을지 모른다. 그는 한국시리즈를 승리로 이끈 뒤 인터뷰 석상에서 “앞으로도 이기는 야구를 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간 자신이 추구해온 야구철학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다시 한번 그의 아웃사이더 기질을 설명해 보자. 국외자는 변신에 능하다. 처음부터 낯선 환경이었기에 천지가 진동해도 적응이 가능하다. 김재박은 MBC청룡 시절 연봉 문제 등으로 구단과 자주 마찰을 빚곤 했었다. 또 MBC에서 태평양 코치로 가면서도 내성적인 그의 성격상 감독 자질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건 성급한 결론이었다. 현대 감독에 오르자마자 그는 현대 프런트의 물적 지원을 듬뿍 받아냈다. 공격적인 현대 프런트가 트레이드를 통해 재목을 물어오면 그를 유니콘스 야구단에 잘 맞춰 재단하는 것은 김재박의 몫이었다. 감독과 선수단에 대한 프런트의 다소 지나칠 정도의 잔소리와 간섭도 그는 요리조리 잘 피해 나갔다. 좌충우돌의 코치시절과는 180도로 변했다. 창단 초기에 그는 인천구장 펜스를 낮추면서 공격야구를 표방했다.
“야구의 재미는 공격에 있다. 팬이 없는 프로야구는 존재가치가 없다”며 일성을 내뱉었지만 역시 김재박야구는 히트앤드런과 번트로 대변되는 기동력의 야구다. 4년 전과 ‘앞으로도 이기는 야구를 하겠다’는 요즈음을 비교해 보자. 그의 말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적응할 수 있는 생존방법을 찾겠다는 ‘선언’이었을 뿐이다.
현대 유니콘스에 팬이 몰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설명할 필요가 있다. 현대는 96년 인천 연고로 들어온 뒤 올시즌 SK의 창단과 더불어 연고지를 내주고 서울 입성을 꾀했다. 서울 입성에 앞서 수원을 임시 연고로 사용하다 보니 인천도, 수원에서도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떠돌이 신세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 마운드의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과 박재홍 박경완 등은 다른 팀에서 따라오지 못할 특급 멤버들이다. 스타군단을 장기판 말 다루듯 일사불란하게 배열해놓은 것은 감독의 책임. 김재박은 정규시즌 132게임과 한국시리즈 7차전을 정교하게 날줄과 씨줄로 짜서 시리즈 우승이라는 멋진 직조물을 만들었다.
김재박은 98년 우승 후 다음해 포스트시즌에 탈락하면서 김재박야구는 한순간 반짝이었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올해도 4강전력 턱걸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깨고 전례없이 탄탄한 투-타 짜임새로 우승 반지를 꼈다. 2001시즌의 김재박야구는 어떤 모양새를 갖출까. 김재박의 우승 인터뷰를 회고해보면 답이 얼추 나오지 않을까 한다. “야구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점수가 날 때 내야 한다. 상대의 기를 죽일 때는 확실히 해야 지금처럼 어려운 경기가 안 나온다. 야구는 드라마가 아니다. 자라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안전하게 이길 수 있는 야구를 했다.”
그러나 이점 또한 김재박의 강점이다. 애당초 팬들의 취향에 영합하려는 야구를 했다면 그는 벌써 자진 사임 전에 목이 달아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재박(46). 굳이 감독 분류로 따지자면 그는 지장(智將)에 해당한다. 스파르타식으로 선수를 밀어붙이는 스타일의 맹장이 있는가 하면 융화와 화합을 최고 덕목으로 치는 감독을 덕장(德將)으로 부른다. 김재박은 상황 대처에 매우 능한 지도자, 즉 지장이다. 빠른 머리 회전에 때로는 잔인할 만큼 강한 승부수를 띄워 상대팀 관계자는 물론 언론 종사자에게 된통 비아냥거림을 사기도 한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그의 사전에 없다. 즐기려고 했으면 감독 생활은 애시당초 하지 않는다는 게 지장들의 공통된 철학이고, 이는 김재박 감독에게도 마찬가지다.
아웃사이더 선수시절 생존법 터득
김재박은 96년 창단팀 현대 감독을 맡아 4시즌 동안 두차례 우승, 준우승 1차례를 일궈냈다. 김응룡 해태감독을 제외하고 2차례 우승한 감독은 강병철 당시 롯데 감독(현 SK)밖에 없다. 대단한 경력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선수들이 많으면 그만큼 우승 확률은 높고 감독은 자연스레 명장 대열에 올라선다’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현대의 우승 신화를 모두 설명할 수 없다. 김재박에게는 그만의 특별한 무엇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함은 90년대 중반 이후 새롭게 닻을 올린 현대호의 명문구단 조기 정착을 촉발시킨 요인이다. 재미없는 야구의 대명사처럼 취급됨에도 불구하고 김재박의 능력에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재박은 54년 대구 출생으로 올해 46세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경상도 토박이. 경북중학교 시절, 작고한 서영무감독 밑에서 야구를 시작한 김재박은 작은 키로 인해 그 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대구지역이 어떤 곳인가. 당시에도 온갖 야구엘리트들이 다 모인 곳이었다. 경북고 대구상고 등의 야구명문교는 1학년만으로 구성된 팀들이 대학팀과의 연습경기에서도 곧잘 이기곤 하던, 무시무시한 저력을 갖춘 학교들이었다. 김재박은 갈 곳이 없었고 그를 받아준 팀은 서울의 대광고교. 이후 영남대를 거치며 절치부심의 시절을 지내는 동안 그의 마음속엔 어떤 웅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엘리트코스라곤 밟아보지도 못했고 알아주는 이도 없었던 그 시절이 오히려 김재박야구의 원형질이 생성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국외자들의 공통점은 오로지 자신만 믿는다는 것이다. 그는 70년대 야구의 전성기를 내달리던 대구-경북 지역의 그늘에 가려진 아웃사이더였고 이러한 배경은 자신을 더욱 단련시켜 나가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아웃사이더적 배경은 창단팀 현대와 딱 들어맞는다. 국내 기업 중 전설적인 창업신화를 가진 현대의 사령탑이 공교롭게 창단팀만 돌아다닌 김재박 감독의 차지가 된 것. 김감독은 대광고 창단 멤버였고, 영남대도 팀 창단과 함께 입학했다. 대학 졸업 뒤 한국화장품에 들어갔고 90년 LG의 창단 멤버로 뛰었다. 현대의 창단과 함께 사령탑을 맡았으니 창단팀만 벌써 다섯번째. 모든 창단팀을 3년 이내에 정상에 올려놨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원점에서 출발하는 데는 오히려 아무런 연고도, 배경도 없는 아웃사이더들이 제격이고 그는 이것을 증명해 냈다. 그의 이런 특성은 꿋꿋한 자기 승부를 펼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해 왔는데 선배 감독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해태 시절 한국시리즈 V9을 일궈낸 명장 김응룡 삼성 감독은 김재박 현대 감독을 노골적으로 불편해 하는데, 그는 그 이유에 대해 김재박 감독의 평소 태도 때문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 마디로 그의 야구 스타일이 싫다는 것이다. 상대가 싫어하는 야구스타일. 그것만 해도 벌써 성공한 것 아닐까. 이에 대해 김재박 감독은 “알고 있다.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반응이다. 김응룡 감독의 ‘준동’에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김응룡 감독과의 승부에서 굵은 눈물을 흘렸던 감독들이 부지기수다. 그 가운데 김응룡이 일부러 거명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김재박 야구를 인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장외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김재박은 감정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고 무뚝뚝하다. 기자들이 그에게 별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선수들은 항상 긴장한다. 말은 없어도 항상 선글라스 너머로 지켜보고 있는 눈동자를 의식하기 때문이다. ‘재미없는 야구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김재박 감독은 비웃을지 모른다. 그는 한국시리즈를 승리로 이끈 뒤 인터뷰 석상에서 “앞으로도 이기는 야구를 하겠다”고 잘라 말했다. 그간 자신이 추구해온 야구철학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다시 한번 그의 아웃사이더 기질을 설명해 보자. 국외자는 변신에 능하다. 처음부터 낯선 환경이었기에 천지가 진동해도 적응이 가능하다. 김재박은 MBC청룡 시절 연봉 문제 등으로 구단과 자주 마찰을 빚곤 했었다. 또 MBC에서 태평양 코치로 가면서도 내성적인 그의 성격상 감독 자질은 부족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그건 성급한 결론이었다. 현대 감독에 오르자마자 그는 현대 프런트의 물적 지원을 듬뿍 받아냈다. 공격적인 현대 프런트가 트레이드를 통해 재목을 물어오면 그를 유니콘스 야구단에 잘 맞춰 재단하는 것은 김재박의 몫이었다. 감독과 선수단에 대한 프런트의 다소 지나칠 정도의 잔소리와 간섭도 그는 요리조리 잘 피해 나갔다. 좌충우돌의 코치시절과는 180도로 변했다. 창단 초기에 그는 인천구장 펜스를 낮추면서 공격야구를 표방했다.
“야구의 재미는 공격에 있다. 팬이 없는 프로야구는 존재가치가 없다”며 일성을 내뱉었지만 역시 김재박야구는 히트앤드런과 번트로 대변되는 기동력의 야구다. 4년 전과 ‘앞으로도 이기는 야구를 하겠다’는 요즈음을 비교해 보자. 그의 말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해 적응할 수 있는 생존방법을 찾겠다는 ‘선언’이었을 뿐이다.
현대 유니콘스에 팬이 몰리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설명할 필요가 있다. 현대는 96년 인천 연고로 들어온 뒤 올시즌 SK의 창단과 더불어 연고지를 내주고 서울 입성을 꾀했다. 서울 입성에 앞서 수원을 임시 연고로 사용하다 보니 인천도, 수원에서도 모두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됐다. 떠돌이 신세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 마운드의 정민태 김수경 임선동과 박재홍 박경완 등은 다른 팀에서 따라오지 못할 특급 멤버들이다. 스타군단을 장기판 말 다루듯 일사불란하게 배열해놓은 것은 감독의 책임. 김재박은 정규시즌 132게임과 한국시리즈 7차전을 정교하게 날줄과 씨줄로 짜서 시리즈 우승이라는 멋진 직조물을 만들었다.
김재박은 98년 우승 후 다음해 포스트시즌에 탈락하면서 김재박야구는 한순간 반짝이었다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올해도 4강전력 턱걸이라는 당초의 예상을 깨고 전례없이 탄탄한 투-타 짜임새로 우승 반지를 꼈다. 2001시즌의 김재박야구는 어떤 모양새를 갖출까. 김재박의 우승 인터뷰를 회고해보면 답이 얼추 나오지 않을까 한다. “야구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점수가 날 때 내야 한다. 상대의 기를 죽일 때는 확실히 해야 지금처럼 어려운 경기가 안 나온다. 야구는 드라마가 아니다. 자라면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안전하게 이길 수 있는 야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