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평화를 원하고 있었다. 한국 기자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위원장 김용순·이하 아태)의 단독 초청을 받아 7박8일(10월14∼21일) 동안 평양을 취재한 소감은 ‘평양은 평화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이 예정된 상황에서 기자와 만난 아태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초청자인 아태를 대표해 10월18일 기자의 숙소인 평양 양각도국제호텔(1427호)로 찾아와 한 시간 남짓 비공식 인터뷰(의례 면담)를 가진 이 고위관계자는 남북 및 북미관계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두루 언급하는 가운데 이같이 밝혔다(다만 익명을 전제한 비공식 인터뷰이기에 이 고위관계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우선 이 고위관계자는 “조-미관계도 (북-남관계처럼) 정상화됩니다. 올브라이트도 23일 오기로 돼 있고 클린턴도 인차 올 겁니다”고 말해 북-미관계 정상화에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 관계자가 올브라이트의 방북 일정이 10월23일로 확정된 사실을 밝힌 10월18일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올브라이트의 방북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올브라이트가 10월23일 방북한다는 사실은 미국측의 공식 발표로 국내 언론에서는 10월20일자 조간부터 보도되었다). 따라서 북-미 고위급 회담 시점과 전망을 한국 기자에게 먼저 알려준 셈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클린턴도 인차 온다’는 대목이다. ‘인차’는 ‘이제’ 혹은 ‘금방’을 뜻하는 사투리다. 이는 곧 클린턴 대통령의 11월 방북을 의미한다. 그는 클린턴의 방북 여건과 직결된 북-미관계 개선의 3대 현안인 핵-미사일-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잘 될 겁니다”고 말해 미국과 이미 상당한 수준의 의견접근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북-미관계 개선에 나선 배경에 대해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하는 거지만 미국은 ‘유관국가’ 아닙니까. 통일을 하자면 그런 나라(유관국가)들과의 문제를 풀어야 하니까 관계를 정상화하는 겁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아태가 민간단체지만 북남 최고위급(정상) 회담에도 관여를 했다”(아태 송호경 부위원장과 국정원 김보현 3차장이 비밀접촉을 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고 밝혀 현재 진행중인 북-미 고위급회담에도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또 그는 대미관계 개선에서도 ‘자주와 친선 그리고 평화의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이같은 대외정책 이념은 적대국이 아닌 ‘선린우호국’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주는 친선과 평화의 기초이자 그것들을 규정짓는 것”이라면서 “(미국에) 친선과 평화를 구걸하지는 않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북-일 수교에도 관여하고 있는 이 고위관계자는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북-일관계 정상화는 서두르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물론 이런 입장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면 일본은 따라온다는 북한 당국의 주미종일(主美從日)이라는 기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사일 문제에 대해 “미국도 갖고 있고 다른 많은 나라들도 갖고 있는데 일본이 우리 미사일만 문제삼는 것은 우리를 적대시하기 때문”이라면서 “일본이 우리와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으면 우리 미사일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북-일관계의 경우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통미봉남’은 모르는 소리 … 북-일 수교 서두르지 않겠다
평양 체류기간에 남한에서 논란이 된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및 ‘속도조절론’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인식도 엿볼 수 있었다. 이 관계자는 “남측에서 통미봉남이라고 하는데 6·15 공동선언이 뭡니까.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 아닙니까”고 일축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은 남북관계의 기초 위에서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다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므로 일단 시동단계인 북미관계 개선에 속도를 낸 다음 이미 궤도에 오른 남북관계 개선에 가속도를 낼 것임을 시사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 전래의 미풍양속에 따라 명절(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행사)을 함께 즐기자고 남측 정당-사회단체를 초청했는데 3당 대표단이 빠져 아쉽다”며 정치권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남측에서 (관계 개선이) 급진적이다,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55년이란 세월이 어디 짧은 세월입니까. (관계 개선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북이 합의한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데는 북한의 전문인력난과 행정망의 미비라는 속사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통일을 위한 대의명분에는 공감하면서도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면서 “정치권이 앞장서야 6·15 북남선언의 실천이 앞당겨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한 정치권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 요새 여러 가지 생각이 많다”며 “그래서 우리도 관망중이다”고 밝혔다. 남측이 속도조절을 요구하면 북측도 서두르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는 “북남선언은 이제 아무도 되돌릴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적인 북남 공동선언을 수표(서명)한 사람이 누굽니까. 최고위급 두 분, 그쪽말로 하면 정상이 한 것인데, 그걸 누가 막습니까?”고 되물었다.
사실 6·15 공동선언의 ‘위력’과 그 이후 달라진 북한의 대남 인식은 평양 시내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발간되는 각종 화보와 호텔이나 공공장소에 붙어 있는 벽보판을 보면 빠짐없이 선전되는 ‘일대 사변’은 △북남 최고위급 상봉을 포함한 6·15 공동선언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조-러 최고위급회담 △비전향 장기수 석방의 세 가지 소식이었다. 노동당 창당 55돌을 기념해 10월12일부터 매일 저녁 7시에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한 차례씩 공연되고 있는 집단체조에서도 참가자들은 ‘축 6·15 북남선언’이라는 구호를 몸으로 연출했다(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참관한 이 집단체조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4장 ‘삼천리 강산에 울리는 민족의 환호’의 한 장면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미 방북단과 서방 기자단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0월23일 저녁 5·1 경기장에서 관람한 이 ‘조선로동당 창건 55돌 경축 10만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었다. 구소련과 동구에도 이런 공연은 있었지만 ‘진영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 북한의 집단체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조직된 집단공연’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충격적인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마치 컴퓨터그래픽을 보는 듯한 배경대(카드섹션) 연출과 형형색색의 옷과 깃발로 장식한 수천명의 군중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장면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기자가 집단체조를 참관한 10월16일에도 똑같은 공연이 연출되었고 기자가 앉은 초대석 아래의 주석단에는 라오스 국회의장 등 방북 외교사절단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로 찬사를 보냈다. 그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혼연일체의 기예(技藝)에 대한 찬사였다.
사실 이 공연은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는 아니다. 이 공연은 그들의 구호처럼 ‘고난의 행군에서 강성대국으로’ 전환하는 ‘꺾어지는 해’에 당 창건 55주년을 자축하는 예정된 행사였다. 실제로 매일 수만명의 평양 시민들은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4시부터 줄을 섰다. 따라서 북한 당국이 올브라이트에게 이 공연을 참관케 한 것은 ‘계획’적일 수 있어도 집단체조는 예정된 행사였다. 올브라이트가 평양에 오지 않았어도 이 ‘지상 최대의 쇼’는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집단체조는 역시 달랐다.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기자단은 거의 한 목소리로 “어린 학생들이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모습을 연출하고, 학생들의 카드섹션에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장면을 보여주는 대목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밝혔다. 심지어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한국 기자도 “북한은 회담장보다 수백배 웅변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학생들은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장면을 연출했고, 카드 섹션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그려냈다…대표단과 기자단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침묵 속에서 눈앞의 행사를 응시했다”고 참관기를 썼다.
그러나 집체 공연은 핵분열 모습을 연출했지만 실상은 ‘당의 사상 중시, 총대 중시, 과학기술 중시 노선’ 중에서 과학기술 중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방북 대표단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거나 ‘한 대 얹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려고 연출한 장면은 더더욱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올브라이트가 오기 전부터 이 ‘지상 최대의 쇼’는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명성1호’라고 적힌 인공위성 발사를 상징하는 장면은 있었다. 이것이 장거리 미사일인지 인공위성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올브라이트 장관은 10월24일 방북 결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제 저녁 관람한 집단체조에서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장면이 나오자 김위원장은 즉시 내게 몸을 돌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인공위성 발사’라고 말했다.”
김위원장이 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오늘 북한이 처한 현실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북한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6·15 선언은 ‘민족의 행운’이다. 이 행운을 못잡으면 민족 간에 크나큰 불행이다. 두 정상이 약속한 것을 못 지키면 그 후과를 누가 원위치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로 인한 반작용의 여파는 감당하기에 너무 클 것이다”고 밝혔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구호대로 아직 ‘총대 위의 평화’다. 올브라이트는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평양은 아름답고 인상적인 도시다. 풍경과 기념물이 좋고 집단체조도 웅장하고 경이로웠다”고 방북 소감을 밝혔다. 올브라이트의 말대로 평양시는 일종의 ‘건축 전시장’이라고 부를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운 기념비적인 건물이 많다. 그러나 돌로 지은 건물이 많아 더러는 이국적이기까지 한 웅장한 잿빛 건물과 도로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입성은 ‘국방색’ 일색이다. 평양을 상징하는 회색건물과 국방색 입성은 밤이면 무채색으로 잠긴다. 어둠이 내리면 빛(색)은 수령과 당의 상징물에만 쏘여진다.
사실 북한 어느 지역을 가든 ‘병영국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평양 시내에서든 시외에서든 심지어 관광휴양지 어디를 가든 군인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묘향산에서 상원암을 가는 길에도 무장 군인들이 경비를 서며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했다.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군사시설이 아닌 휴양지인데 왜 군인들이 지키냐고. 답변은 간단했다. ‘국가적 명소이기 때문에 총검으로 지키는 것’이란다.
주민들 또한 군이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군인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질감은 엿볼 수 없었다. 그것은 뒤집어보면 ‘외세의 침탈’에 대한 근심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그만큼 무력을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총대 위에 평화 있다’는 선군영도(先軍領導)의 구호는 상당 부분 대내외적인 방어기제에서 나온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의 총비서이자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원수)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군에 복무한 경력은 없다. 그러나 주민들은 다들 김위원장을 ‘장군님’이라고 부른다. 국제친선전람관의 종합선물관에 가면 한 해외동포가 선물한 ‘3대 장군 위인상’이 걸려 있다. 3대 장군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김정숙(생모)이다. ‘장군님’의 의미를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이해할 수가 없다.
북한 인민들은 이 ‘장군님’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고 말한다. ‘고난의 행군’ 기간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자료로 접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평양 시민들은 식량난을 99년까지 2∼3년간 겪었다. 물론 지방은 더했다. 평양특별시는 그래도 식량난이 지방보다는 늦게 와 함께 끝났으니 그 기간이 훨씬 더 짧았다. 그들은 내게 물었다. “기자 선생님은 혹시 대용식품이나 풀죽을 드셔본 적이 있습니까?” 말이 ‘대용식품’이지 이것은 벼의 열매(쌀) 대신에 줄기와 뿌리를 갈아서 먹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 위궤양, 소화불량 증세를 앓아야 했다.
호텔의 한 여성 복무원은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쌀 배급은 몇 달 전의 일이다”고 털어놓았다. 이 여성의 세대주(남편)는 평양방어사령부에 근무(출퇴근)하는 계급이 중좌(대위)인 군관이었다. 군인가족들도 똑같이 굶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원 식량의 군량미 전용(轉用) 논란은 한가하고 무의미한 것이었다. 기자가 본 평양 시민의 3분의 1은 군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접한 생활상은 대부분 ‘그때를 아십니까’류의 방송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60∼70년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국제호텔의 위생실(화장실)에 휴지가 없었을 때 당혹감을 느끼고, 시내 공중전화에 줄지어 늘어선 평양 시민들을 볼 때 안타까움을 가졌지만 돌이켜보면 남쪽의 공중 화장실에 휴지가 풍족하고 집집마다 전화가 놓인 것은 불과 10년 어간의 일이다. 또 남쪽에서는 발에 차이는 것이 휴대폰이지만 아침이면 공동 화장실이나 공중전화를 이용하느라 줄을 서는 것이 얼마 전까지 서울의 달동네 풍경이 아니었던가.
가난한 사람은 부자 동네에 살 수 있어도 부자는 달동네에 못 산다는 얘기가 있다. 부자들이 느끼는 위화감과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 가난한 이웃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이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북한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일 뿐이다. 다만 ‘집단적인 가난’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그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다. 평화(平和)는 그 본뜻이 그렇듯, 벼(禾)를 사람들 입(口)에 고루 나눌(平) 때 오는 것이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이 예정된 상황에서 기자와 만난 아태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점을 분명히 했다. 초청자인 아태를 대표해 10월18일 기자의 숙소인 평양 양각도국제호텔(1427호)로 찾아와 한 시간 남짓 비공식 인터뷰(의례 면담)를 가진 이 고위관계자는 남북 및 북미관계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두루 언급하는 가운데 이같이 밝혔다(다만 익명을 전제한 비공식 인터뷰이기에 이 고위관계자의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우선 이 고위관계자는 “조-미관계도 (북-남관계처럼) 정상화됩니다. 올브라이트도 23일 오기로 돼 있고 클린턴도 인차 올 겁니다”고 말해 북-미관계 정상화에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 관계자가 올브라이트의 방북 일정이 10월23일로 확정된 사실을 밝힌 10월18일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올브라이트의 방북 날짜를 모르고 있었다(올브라이트가 10월23일 방북한다는 사실은 미국측의 공식 발표로 국내 언론에서는 10월20일자 조간부터 보도되었다). 따라서 북-미 고위급 회담 시점과 전망을 한국 기자에게 먼저 알려준 셈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클린턴도 인차 온다’는 대목이다. ‘인차’는 ‘이제’ 혹은 ‘금방’을 뜻하는 사투리다. 이는 곧 클린턴 대통령의 11월 방북을 의미한다. 그는 클린턴의 방북 여건과 직결된 북-미관계 개선의 3대 현안인 핵-미사일-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잘 될 겁니다”고 말해 미국과 이미 상당한 수준의 의견접근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는 또 북-미관계 개선에 나선 배경에 대해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 하는 거지만 미국은 ‘유관국가’ 아닙니까. 통일을 하자면 그런 나라(유관국가)들과의 문제를 풀어야 하니까 관계를 정상화하는 겁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아태가 민간단체지만 북남 최고위급(정상) 회담에도 관여를 했다”(아태 송호경 부위원장과 국정원 김보현 3차장이 비밀접촉을 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고 밝혀 현재 진행중인 북-미 고위급회담에도 상당 부분 관여하고 있음을 암시했다. 또 그는 대미관계 개선에서도 ‘자주와 친선 그리고 평화의 원칙’을 지켜나갈 것이라고 밝혀 관심을 끌었다. 이같은 대외정책 이념은 적대국이 아닌 ‘선린우호국’의 관계 설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주는 친선과 평화의 기초이자 그것들을 규정짓는 것”이라면서 “(미국에) 친선과 평화를 구걸하지는 않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북-일 수교에도 관여하고 있는 이 고위관계자는 일본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북-일관계 정상화는 서두르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물론 이런 입장은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면 일본은 따라온다는 북한 당국의 주미종일(主美從日)이라는 기본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미사일 문제에 대해 “미국도 갖고 있고 다른 많은 나라들도 갖고 있는데 일본이 우리 미사일만 문제삼는 것은 우리를 적대시하기 때문”이라면서 “일본이 우리와의 관계를 개선할 의지가 있으면 우리 미사일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북-일관계의 경우 아직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 많이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통미봉남’은 모르는 소리 … 북-일 수교 서두르지 않겠다
평양 체류기간에 남한에서 논란이 된 이른바 통미봉남(通美封南) 및 ‘속도조절론’에 대한 북한 당국의 인식도 엿볼 수 있었다. 이 관계자는 “남측에서 통미봉남이라고 하는데 6·15 공동선언이 뭡니까. 자주적으로 통일하자는 것 아닙니까”고 일축하면서 북-미관계 개선은 남북관계의 기초 위에서 추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다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므로 일단 시동단계인 북미관계 개선에 속도를 낸 다음 이미 궤도에 오른 남북관계 개선에 가속도를 낼 것임을 시사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 전래의 미풍양속에 따라 명절(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행사)을 함께 즐기자고 남측 정당-사회단체를 초청했는데 3당 대표단이 빠져 아쉽다”며 정치권에 유감을 표명했다. 그는 “남측에서 (관계 개선이) 급진적이다,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55년이란 세월이 어디 짧은 세월입니까. (관계 개선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북이 합의한 일정이 지연되고 있는 데는 북한의 전문인력난과 행정망의 미비라는 속사정이 작용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는 “통일을 위한 대의명분에는 공감하면서도 야당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다는 인상을 받는다”면서 “정치권이 앞장서야 6·15 북남선언의 실천이 앞당겨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한 정치권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 요새 여러 가지 생각이 많다”며 “그래서 우리도 관망중이다”고 밝혔다. 남측이 속도조절을 요구하면 북측도 서두르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그러나 그는 “북남선언은 이제 아무도 되돌릴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역사적인 북남 공동선언을 수표(서명)한 사람이 누굽니까. 최고위급 두 분, 그쪽말로 하면 정상이 한 것인데, 그걸 누가 막습니까?”고 되물었다.
사실 6·15 공동선언의 ‘위력’과 그 이후 달라진 북한의 대남 인식은 평양 시내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발간되는 각종 화보와 호텔이나 공공장소에 붙어 있는 벽보판을 보면 빠짐없이 선전되는 ‘일대 사변’은 △북남 최고위급 상봉을 포함한 6·15 공동선언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조-러 최고위급회담 △비전향 장기수 석방의 세 가지 소식이었다. 노동당 창당 55돌을 기념해 10월12일부터 매일 저녁 7시에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한 차례씩 공연되고 있는 집단체조에서도 참가자들은 ‘축 6·15 북남선언’이라는 구호를 몸으로 연출했다(올브라이트 국무장관도 참관한 이 집단체조는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4장 ‘삼천리 강산에 울리는 민족의 환호’의 한 장면이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미 방북단과 서방 기자단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10월23일 저녁 5·1 경기장에서 관람한 이 ‘조선로동당 창건 55돌 경축 10만명 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었다. 구소련과 동구에도 이런 공연은 있었지만 ‘진영으로서의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 북한의 집단체조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조직된 집단공연’이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충격적인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마치 컴퓨터그래픽을 보는 듯한 배경대(카드섹션) 연출과 형형색색의 옷과 깃발로 장식한 수천명의 군중이 한 사람처럼 움직이는 장면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물론 기자가 집단체조를 참관한 10월16일에도 똑같은 공연이 연출되었고 기자가 앉은 초대석 아래의 주석단에는 라오스 국회의장 등 방북 외교사절단이 앉아 있었다. 이들은 공연이 끝나자 기립박수로 찬사를 보냈다. 그것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혼연일체의 기예(技藝)에 대한 찬사였다.
사실 이 공연은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사는 아니다. 이 공연은 그들의 구호처럼 ‘고난의 행군에서 강성대국으로’ 전환하는 ‘꺾어지는 해’에 당 창건 55주년을 자축하는 예정된 행사였다. 실제로 매일 수만명의 평양 시민들은 저녁 7시부터 시작하는 이 공연을 보기 위해 4시부터 줄을 섰다. 따라서 북한 당국이 올브라이트에게 이 공연을 참관케 한 것은 ‘계획’적일 수 있어도 집단체조는 예정된 행사였다. 올브라이트가 평양에 오지 않았어도 이 ‘지상 최대의 쇼’는 계속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집단체조는 역시 달랐다.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기자단은 거의 한 목소리로 “어린 학생들이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모습을 연출하고, 학생들의 카드섹션에서 장거리 미사일 발사 장면을 보여주는 대목이 가장 충격적이었다”고 밝혔다. 심지어 올브라이트를 수행한 한국 기자도 “북한은 회담장보다 수백배 웅변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학생들은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장면을 연출했고, 카드 섹션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그려냈다…대표단과 기자단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침묵 속에서 눈앞의 행사를 응시했다”고 참관기를 썼다.
그러나 집체 공연은 핵분열 모습을 연출했지만 실상은 ‘당의 사상 중시, 총대 중시, 과학기술 중시 노선’ 중에서 과학기술 중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방북 대표단에게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거나 ‘한 대 얹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려고 연출한 장면은 더더욱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올브라이트가 오기 전부터 이 ‘지상 최대의 쇼’는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광명성1호’라고 적힌 인공위성 발사를 상징하는 장면은 있었다. 이것이 장거리 미사일인지 인공위성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올브라이트 장관은 10월24일 방북 결산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밝혔다.
“어제 저녁 관람한 집단체조에서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 장면이 나오자 김위원장은 즉시 내게 몸을 돌려 ‘이것은 처음이자 마지막 인공위성 발사’라고 말했다.”
김위원장이 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오늘 북한이 처한 현실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북한 당국의 한 고위 관계자는 “6·15 선언은 ‘민족의 행운’이다. 이 행운을 못잡으면 민족 간에 크나큰 불행이다. 두 정상이 약속한 것을 못 지키면 그 후과를 누가 원위치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그로 인한 반작용의 여파는 감당하기에 너무 클 것이다”고 밝혔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그들의 구호대로 아직 ‘총대 위의 평화’다. 올브라이트는 “많은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평양은 아름답고 인상적인 도시다. 풍경과 기념물이 좋고 집단체조도 웅장하고 경이로웠다”고 방북 소감을 밝혔다. 올브라이트의 말대로 평양시는 일종의 ‘건축 전시장’이라고 부를 만큼 웅장하고 아름다운 기념비적인 건물이 많다. 그러나 돌로 지은 건물이 많아 더러는 이국적이기까지 한 웅장한 잿빛 건물과 도로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입성은 ‘국방색’ 일색이다. 평양을 상징하는 회색건물과 국방색 입성은 밤이면 무채색으로 잠긴다. 어둠이 내리면 빛(색)은 수령과 당의 상징물에만 쏘여진다.
사실 북한 어느 지역을 가든 ‘병영국가’임을 실감하게 된다. 평양 시내에서든 시외에서든 심지어 관광휴양지 어디를 가든 군인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묘향산에서 상원암을 가는 길에도 무장 군인들이 경비를 서며 관광객의 출입을 통제했다.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군사시설이 아닌 휴양지인데 왜 군인들이 지키냐고. 답변은 간단했다. ‘국가적 명소이기 때문에 총검으로 지키는 것’이란다.
주민들 또한 군이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군인들에 대한 거부감이나 이질감은 엿볼 수 없었다. 그것은 뒤집어보면 ‘외세의 침탈’에 대한 근심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그만큼 무력을 중시한다는 것이었다. ‘총대 위에 평화 있다’는 선군영도(先軍領導)의 구호는 상당 부분 대내외적인 방어기제에서 나온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집권당인 조선노동당의 총비서이자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원수)이다. 김정일 위원장이 군에 복무한 경력은 없다. 그러나 주민들은 다들 김위원장을 ‘장군님’이라고 부른다. 국제친선전람관의 종합선물관에 가면 한 해외동포가 선물한 ‘3대 장군 위인상’이 걸려 있다. 3대 장군은 김일성-김정일 부자와 김정숙(생모)이다. ‘장군님’의 의미를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이해할 수가 없다.
북한 인민들은 이 ‘장군님’과 함께 ‘고난의 행군’을 이겨냈다고 말한다. ‘고난의 행군’ 기간에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자료로 접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평양 시민들은 식량난을 99년까지 2∼3년간 겪었다. 물론 지방은 더했다. 평양특별시는 그래도 식량난이 지방보다는 늦게 와 함께 끝났으니 그 기간이 훨씬 더 짧았다. 그들은 내게 물었다. “기자 선생님은 혹시 대용식품이나 풀죽을 드셔본 적이 있습니까?” 말이 ‘대용식품’이지 이것은 벼의 열매(쌀) 대신에 줄기와 뿌리를 갈아서 먹는 것이다. 그 때문에 대부분 위궤양, 소화불량 증세를 앓아야 했다.
호텔의 한 여성 복무원은 “사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다. 쌀 배급은 몇 달 전의 일이다”고 털어놓았다. 이 여성의 세대주(남편)는 평양방어사령부에 근무(출퇴근)하는 계급이 중좌(대위)인 군관이었다. 군인가족들도 똑같이 굶었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원 식량의 군량미 전용(轉用) 논란은 한가하고 무의미한 것이었다. 기자가 본 평양 시민의 3분의 1은 군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접한 생활상은 대부분 ‘그때를 아십니까’류의 방송프로그램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은 60∼70년대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국제호텔의 위생실(화장실)에 휴지가 없었을 때 당혹감을 느끼고, 시내 공중전화에 줄지어 늘어선 평양 시민들을 볼 때 안타까움을 가졌지만 돌이켜보면 남쪽의 공중 화장실에 휴지가 풍족하고 집집마다 전화가 놓인 것은 불과 10년 어간의 일이다. 또 남쪽에서는 발에 차이는 것이 휴대폰이지만 아침이면 공동 화장실이나 공중전화를 이용하느라 줄을 서는 것이 얼마 전까지 서울의 달동네 풍경이 아니었던가.
가난한 사람은 부자 동네에 살 수 있어도 부자는 달동네에 못 산다는 얘기가 있다. 부자들이 느끼는 위화감과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직 가난한 이웃들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한 이웃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북한은 우리의 가난한 이웃일 뿐이다. 다만 ‘집단적인 가난’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두려워하는지 모른다. 그들이 평화를 원하고 있다. 평화(平和)는 그 본뜻이 그렇듯, 벼(禾)를 사람들 입(口)에 고루 나눌(平) 때 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