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낚시를 할 줄 모른다. 바람이 일으키는 물살 위에 두둥 떠있는 낚시찌를 오래 바라보고 있질 못한다. 성미가 급한 편도 아닌데, 자꾸 잡념이 끼여들어 무념에 잠기지 못한다. 그래도 낚시는 해보고 싶다. 누가 날 좀 낚시터로 데려가주길 바랐는데, 하루는 시를 쓰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서울에 기가 막힌 낚시터가 있는데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한강 하류, 행주산성 아래의 창릉천이었다.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서오릉을 감고 돌아 한강으로 이어지면서 짧은 여로를 마치는 하천이었다. 서쪽 행주산성 아래로는 신공항으로 이어지는 전용도로 공사가 한창이고, 하천둑 너머로는 비닐 하우스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난지도가 가깝고 극성스런 파리떼 때문에 낚시터가 아니라 고행 장소라 여겨졌지만, 친구는 몇 달 전에 이곳에서 29cm짜리 붕어를 낚았다고 한다.
어쨌든 예로부터 이곳은 훌륭한 낚시터였다. 행주산성 부근을 추강(秋江)이라고 불렀는데, 요즘 텔레비전 연속극 ‘왕과 비’에 등장하는 연산군의 큰아버지 월산대군(1454~88)이 시를 읊으며 놀았다 한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이름은 때로 한 사람의 운명을 암시하기도 한다. 월산대군이 딱 그런 경우다.
세조의 장손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자라면서 월산군에 봉해진 것은 7세 때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죽고, 작은아버지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다. 예종도 요절하고, 다음 왕위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이어야 했지만, 한명회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지원을 받은 월산대군의 동생 자을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종이고, 바로 한명회의 사위였다. 그런 뒤바뀐 왕위 계승 때문에 성종은 형을 극진하게 모셨고, 월산대군은 동생을 배려해 정치에 관여치 않고 산과 달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며 한 시절을 보냈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손자로서 취할 수 있었던 현명한 처신이었던 셈이다.
경기도 고양시 신원동 너멍골 그의 무덤 비명에는 월산(月山)을 아예 달과 산 모양으로 그려놓았다. 그의 무덤은 한양을 뒤로 하여 아예 북향(北向)하고 있다. 볕이 좋은 남향을 택하는 게 풍수지리의 상식인데, 이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후대에 큰 인물이 나와 정치에 관여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나무꾼을 해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는 지역이라 하여 묘를 썼다고 한다. 그의 뜻대로 후손들 중에 큰 벼슬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월산대군 사당 옆에서 너멍골 주유소를 운영하는 월산대군의 후손은 말한다. 한때 묘의 방향을 바꿔볼까 하는 의논이 있었지만, 차마 선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여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월산대군이 빈 배를 저어온 추강을 아예 자신의 호로 삼은 이가 있다. 월산대군과 같은 해에 태어난 추강 남효온(1454~92)이다.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사육신이라는 말을 생겨나게끔 한 장본인이다.
그는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그들의 실체를 역사 속에 분명하게 각인했다.
“누가 신하가 아니겠는가만 지극하도다, 육신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겠느냐만 크도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섬기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어서 충성하여 신하된 절개를 세웠도다.”
‘육신전’의 서문에서 그는 감히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사라지도록 둘 수는 없다며 지은 글이다. 세조의 아들과 손자들이 왕통을 이어가고 있는 세상에, 세조에 반기를 든 역적들을 추모했으니 반체제 사상범인 셈이다. 훗날 그의 글을 보게 된 임금 선조조차도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를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남효온은 우리 조정의 죄인이다”고 말했을 정도다.
추강 남효온은 단종 2년에 태어났는데, 단종이 폐위된 것은 그가 세살 때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사건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과거사였다. 그보다 19세 위로, 세종대왕 앞에 5세 때 나아가 시를 지어 오세 신동이라 불렸던 매월당 김시습(1435~93)은 “나는 세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이런 고생도 마땅하지만 그대는 나와 다른데 어찌하여 세상을 위해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고 남효온에게 벼슬길에 나가도록 독려했을 정도였다.
추강 남효온은 25세 때에, 성종이 유생들에게 조언을 듣기를 바라자 8개 항목으로 된 상소문을 올렸다. 그 안에 세조가 폐한 단종의 어머니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해 ‘동문선’을 편찬한 서거정(1420~88)조차 “충격적인 상소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려는 비열하고도 얄팍한 수작”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남효온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
가을 강 가을 흥에 포성주 한통 끼고
배 안에 밝은 달 싣고 낚싯대 드리우네
낚시 거두자 달 지고 밤빛은 칠흑인데
거나하게 취한 술 깨니 가슴 서늘해지네
그가 지은 서호시(西湖詩)다. 서호는 마포 서강을 이른다고 하는데, 나와 내 친구가 낚싯대를 드리운 창릉천 주변을 말한다고도 한다. 그 명칭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지만, 행주산성에서 동편으로 화정이나 일산 신도시 쪽의 들판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밀물 때면 행주산성은 섬이 되고, 썰물 때면 거대한 호수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지리상의 특성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에 권율 장군은 행주대첩을 이끌 수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에 제방을 막아서 이제는 모두 비닐하우스 덮인 들판으로 변했다.
행주산성의 그림자가 창릉천으로 길게 늘어질 때까지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나는 피래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친구는 은비늘 반짝이는 붕어를 세 마리 잡았지만 변변치 못한 실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물에 다시 놓아주려는 붕어를 나는 애써 물 봉지에 담았다. 아파트에 사느라 강아지를 기르지 못하는 애들에게 살아 있는 붕어나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강 하류, 행주산성 아래의 창릉천이었다. 북한산에서 발원하여 서오릉을 감고 돌아 한강으로 이어지면서 짧은 여로를 마치는 하천이었다. 서쪽 행주산성 아래로는 신공항으로 이어지는 전용도로 공사가 한창이고, 하천둑 너머로는 비닐 하우스가 들판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난지도가 가깝고 극성스런 파리떼 때문에 낚시터가 아니라 고행 장소라 여겨졌지만, 친구는 몇 달 전에 이곳에서 29cm짜리 붕어를 낚았다고 한다.
어쨌든 예로부터 이곳은 훌륭한 낚시터였다. 행주산성 부근을 추강(秋江)이라고 불렀는데, 요즘 텔레비전 연속극 ‘왕과 비’에 등장하는 연산군의 큰아버지 월산대군(1454~88)이 시를 읊으며 놀았다 한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드리오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매라
이름은 때로 한 사람의 운명을 암시하기도 한다. 월산대군이 딱 그런 경우다.
세조의 장손으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자라면서 월산군에 봉해진 것은 7세 때다. 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일찍 죽고, 작은아버지 예종이 왕위에 오르면서다. 예종도 요절하고, 다음 왕위는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이어야 했지만, 한명회와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지원을 받은 월산대군의 동생 자을산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성종이고, 바로 한명회의 사위였다. 그런 뒤바뀐 왕위 계승 때문에 성종은 형을 극진하게 모셨고, 월산대군은 동생을 배려해 정치에 관여치 않고 산과 달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며 한 시절을 보냈다. 피바람을 일으키며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의 손자로서 취할 수 있었던 현명한 처신이었던 셈이다.
경기도 고양시 신원동 너멍골 그의 무덤 비명에는 월산(月山)을 아예 달과 산 모양으로 그려놓았다. 그의 무덤은 한양을 뒤로 하여 아예 북향(北向)하고 있다. 볕이 좋은 남향을 택하는 게 풍수지리의 상식인데, 이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다. 후대에 큰 인물이 나와 정치에 관여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고, 나무꾼을 해도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는 지역이라 하여 묘를 썼다고 한다. 그의 뜻대로 후손들 중에 큰 벼슬을 한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월산대군 사당 옆에서 너멍골 주유소를 운영하는 월산대군의 후손은 말한다. 한때 묘의 방향을 바꿔볼까 하는 의논이 있었지만, 차마 선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여 옛 모습 그대로 지키고 있다고 한다.
월산대군이 빈 배를 저어온 추강을 아예 자신의 호로 삼은 이가 있다. 월산대군과 같은 해에 태어난 추강 남효온(1454~92)이다.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고, 사육신이라는 말을 생겨나게끔 한 장본인이다.
그는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그들의 실체를 역사 속에 분명하게 각인했다.
“누가 신하가 아니겠는가만 지극하도다, 육신의 신하됨이여. 누가 죽지 않겠느냐만 크도다, 육신의 죽음이여. 살아서 임금을 섬기고 신하된 도리를 다하고, 죽어서 충성하여 신하된 절개를 세웠도다.”
‘육신전’의 서문에서 그는 감히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이름을 사라지도록 둘 수는 없다며 지은 글이다. 세조의 아들과 손자들이 왕통을 이어가고 있는 세상에, 세조에 반기를 든 역적들을 추모했으니 반체제 사상범인 셈이다. 훗날 그의 글을 보게 된 임금 선조조차도 “저 남효온이란 자는 감히 사사로이 문묵(文墨)을 희롱하고 요망한 혀를 놀려서 국사를 폭로하였으니 심히 패악 부도하여 그 죄는 붓으로 이루 다 쓸 수 없다. 남효온은 우리 조정의 죄인이다”고 말했을 정도다.
추강 남효온은 단종 2년에 태어났는데, 단종이 폐위된 것은 그가 세살 때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한 사건을 목격하지는 못했다. 그저 지나칠 수도 있는 과거사였다. 그보다 19세 위로, 세종대왕 앞에 5세 때 나아가 시를 지어 오세 신동이라 불렸던 매월당 김시습(1435~93)은 “나는 세종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이런 고생도 마땅하지만 그대는 나와 다른데 어찌하여 세상을 위해 계책을 세우지 않는가”고 남효온에게 벼슬길에 나가도록 독려했을 정도였다.
추강 남효온은 25세 때에, 성종이 유생들에게 조언을 듣기를 바라자 8개 항목으로 된 상소문을 올렸다. 그 안에 세조가 폐한 단종의 어머니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에 대해 ‘동문선’을 편찬한 서거정(1420~88)조차 “충격적인 상소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려는 비열하고도 얄팍한 수작”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남효온은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게 되었다.
가을 강 가을 흥에 포성주 한통 끼고
배 안에 밝은 달 싣고 낚싯대 드리우네
낚시 거두자 달 지고 밤빛은 칠흑인데
거나하게 취한 술 깨니 가슴 서늘해지네
그가 지은 서호시(西湖詩)다. 서호는 마포 서강을 이른다고 하는데, 나와 내 친구가 낚싯대를 드리운 창릉천 주변을 말한다고도 한다. 그 명칭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지만, 행주산성에서 동편으로 화정이나 일산 신도시 쪽의 들판에 큰 호수가 있었다고 한다. 밀물 때면 행주산성은 섬이 되고, 썰물 때면 거대한 호수가 생겨났다고 한다. 이런 지리상의 특성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에 권율 장군은 행주대첩을 이끌 수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에 제방을 막아서 이제는 모두 비닐하우스 덮인 들판으로 변했다.
행주산성의 그림자가 창릉천으로 길게 늘어질 때까지 낚시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나는 피래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친구는 은비늘 반짝이는 붕어를 세 마리 잡았지만 변변치 못한 실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물에 다시 놓아주려는 붕어를 나는 애써 물 봉지에 담았다. 아파트에 사느라 강아지를 기르지 못하는 애들에게 살아 있는 붕어나마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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