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누리과정(만 3~5세) 예산을 두고 중앙정부와 지방의회, 시·도교육청의 떠넘기기가 계속돼 보육대란을 코앞에 두고 있다. 갈등의 촉발은 박근혜 정부가 누리과정에 필요한 예산 1조8000억 원을 지방에 떠넘긴 것이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예산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증세 없는 복지’라는 박근혜 정부의 실현 불가능한 정책 기조가 일으키는 소음이라는 뜻이다. 이는 기술적 조정의 실패에 따른 일시적 위기가 아니라 세수 부족이 일으키는 구조적 위기다. 앞으로 이와 비슷한 갈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올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이러한 갈등을 지켜보고 있자니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일갈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진단이 상당히 타당한 지적이었음을 되새기게 된다.
갈등 근원이 세수 부족에 있음에도 유일호 신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월 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증세는 최후 수단”이라며 “세 부담 증가나 증세를 논의할 단계가 아직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증세는 없다는 것이다. 다만 유 부총리는 과도한 면세자 비율을 줄여 넓은 세원을 구현하는 일은 필요하다는 의견을 피력해 실질적 증세에는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유 부총리의 발언 가운데 주목할 것 하나는 “(세금 부족분을) 부자가 더 부담하려고 하면 소득세를 올려야 하는데, 한계세율인 38%를 2배로 올려도 부족분을 충당하지 못한다”는 대목이다. 부자 증세로는 세수 부족을 해결할 수 없고, 면세자를 줄여 중산층과 저소득층 과세로 세수 부족을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북유럽보다 미국이 누진율 더 높다
정치적 견해에 따라 의견이 갈리지만, 부자 증세든 서민층 증세든 세수를 추가로 확보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데는 모두가 동의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격동 속에서 큰 주목을 끌지 못했지만 복지를 위해 “일정한 증세는 불가피하다”는 안철수 의원의 최근 발언도 있었다. 문제는 누구로부터 세금을 걷을 것이냐다. 증세는 첨예한 계급갈등을 일으키는 이슈다. 부자 증세 없는 서민 증세는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켜 정권을 위태롭게 할 테고, 부자 증세만으로는 지속가능하고 효율적인 세수 확보가 가능한지 의심을 불러일으킨다.그럼에도 복지국가를 원하는 진보적 유권자 대다수는 부자 증세를 선호할 것이다. 과연 부자 증세로 세수 부족을 극복하고 복지를 확대할 수 있을까. 혹은 누진세로 불평등 정도를 줄일 수 있을까. 답은 ‘아니요’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세금의 진보성, 즉 누진세로 낮은 불평등 정도와 높은 복지를 달성한 경우는 없다. 잘 알려지지 않은 데이터 가운데 하나지만, 시장소득의 불평등을 따져보면 높은 복지 수준을 유지하는 북유럽 국가와 복지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은 영미권 국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미국의 세전 지니계수는 0.49이고, 벨기에의 세전 지니계수는 0.47이다. 핀란드(0.47), 스웨덴(0.43)도 세전 시장소득의 불평등은 상당히 높다. 북유럽 복지국가와 영미권 국가의 불평등 정도는 세후 재분배가 끝난 가처분소득의 불평등에서 차이가 난다. 스웨덴 가처분소득의 불평등 지니계수는 0.26에 불과한데 미국은 0.38에 달한다. 스웨덴에서는 과세와 재분배로 지니계수가 0.17p 감소하는 데 반해 미국은 0.11p만 감소한다는 뜻이다. 한국은 재분배 효과가 극히 미미해 지니계수가 0.03p밖에 감소하지 않는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불평등 지니계수를 떨어뜨리는 주된 효과는 세금이 아니라 세금으로 이뤄지는 공적부조의 총금액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세금 효과는 시장소득에서 세금을 낸 후에 남는 소득의 불평등과 시장소득의 불평등을 비교해 그 감소 정도로 측정한다. 세금이 누진적이고 진보적일수록 효과가 크다. 반면 공적부조 효과는 세금을 모두 낸 후 정부로부터 받는 현금 지원이 불평등을 얼마나 줄이느냐로 측정한다. 노인들이 받는 기초연금, 최근 문제가 된 영·유아 보육지원 등이 그 예다.
재분배 효과는 공적부조 현금 지원의 절대액수가 높을수록 크다. 예를 들어 인당 지원액이 20만 원일 때보다 50만 원일 때 재분배를 통한 불평등 감소 효과가 큰 것이다. 저소득층에게는 공적부조가 20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올라가는 효과가 원래 얼마 내지는 않는 세금의 추가 감세 효과보다 크기 때문이다.
‘보편적 증세’만이 답이다
위 그래프는 소득세의 누진성과 불평등 감소 효과 사이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가로축은 상위 10% 소득자가 전체 소득세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내고, 세로축은 세전 소득 불평등 지니계수에 비해 세후 재분배를 실시한 후 지니계수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나타낸다. 데이터 출처는 2008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와 2013년 기준 OECD 웹사이트 통계다.그래프에서 나타나듯 소득세제의 누진성과 불평등 감소 효과는 마이너스 상관관계를 갖는다.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소득세제의 누진성이 큰 국가에서 재분배를 통해 소득 불평등을 감소시킨 효과보다, 소득세제의 누진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국가에서 재분배를 통한 소득 불평등 감소 효과가 크다. 이는 소득세제의 누진성이 약한 국가의 실효세율이 소득세제의 누진성이 강한 나라 실효세율보다 높기 때문이다.
핀란드에서 과속으로 교통법규를 위반한 노키아 부회장에게 벌금 1억1000만 원을 부과했다는 소식을 기억할 것이다. 이 에피소드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아주 강한 누진세를 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래프에서 보듯 핀란드의 세제는 영미권 국가들보다 덜 누진적이다. 핀란드에서는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세의 32%를 내지만, 미국에서는 상위 10%가 45%의 세금을 낸다. 얼마 되지도 않는 교통법규 위반 벌금의 누진성을 전체 국민소득의 70%를 차지하는 소득세의 누진성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미국의 연방 소득세제가 북유럽 복지국가 대부분의 소득세제보다 누진성이 크다. 그럼에도 미국보다 핀란드의 사회복지 제도가 더 우수하다. 이는 미국은 국내총생산(GDP)의 27%를 세금으로 내는 반면, 핀란드는 44%를 세금으로 내서 모든 국민에게 국가가 공적부조로 나눠줄 수 있는 돈이 더 많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는 세금이 누진적이고 진보적이라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먼저 모두가 세금을 많이 내서 전체 세수가 커야 하고, 다시 이를 공평하게 재분배해 각 개인과 가정에게 돌아가는 공적지원 액수가 높아야 유지할 수 있다. ‘한겨레’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2013년 소득세법 개혁으로 소득상층의 세금은 늘어나고 소득하층의 세금은 줄었다. 세금의 누진성이 강화된 것이다. 그래서 복지를 위한 재원이 확보됐나. 이제 고쳐 말해보자. ‘보편적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