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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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바지가 5500원, 고물가에 ‘기증품 판매점’ 뜬다

기업 기증 새 물품을 시중 가격의 3분의 1에 판매… 수익금은 취약계층 일자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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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채원 기자

    ycw@donga.com

    입력2024-06-12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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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30일 오후 기자가 찾은 서울 중구 기증품 판매점 ‘굿윌스토어’는 평일인데도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 기업의 지하 유휴공간을 활용해 꾸민 178㎡(54평형) 크기의 가게에는 손님 20여 명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그중 50대 중반 여성 2명이 전신거울 앞에서 리넨 바지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바지에 걸린 가격표는 5500원. 여기에 ‘금주(今週) 특별 할인’을 적용하면 바지 가격은 2750원까지 내려간다. 이날 한 가격 비교 사이트에서 검색한 리넨 바지 평균 가격 1만7000원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싼값이다. 이는 온라인 중고 플랫폼에서도 찾기 힘든 저렴한 가격인데, 손님들이 집어든 바지는 중고 제품이 아니라 한 제조업체가 기증한 새 물건이었다.

    “기증품 판매점에 반찬 사러 간다”

    서울 중구에 있는 기증품 판매점 굿윌스토어 우리금융점 내부. [윤채원 기자]

    서울 중구에 있는 기증품 판매점 굿윌스토어 우리금융점 내부. [윤채원 기자]

    가게 안에서 만난 또 다른 손님 서진실 씨(33)는 치마 1벌과 상의 2벌, 스카프 1장을 모두 합쳐 1만1500원에 샀다. 서 씨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서 기증품 판매점 관련 게시글을 보고 저렴한 가격에 혹해 직접 와봤다”며 “요즘은 옷 한 벌 사려면 5만 원은 기본으로 줘야 하는데 생각보다 새 물건이 많고 그중 예쁜 것도 꽤 있어 놀랐다”고 말했다. 서 씨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추천할 계획이라고 했다.

    소비자가 새 상품을 시중 가격과 비교해 ‘반의 반의 반값’에 살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기증품 판매점이기 때문이다. 기증품 판매점은 개인이나 기업으로부터 기증받은 물건을 소비자에게 판매해 그 차익을 공익을 위해 쓰는 곳이다. 사회복지법인 밀알복지재단이 운영하는 ‘굿윌스토어’와 ‘기빙플러스’ 등이 그 예다. 장애인·노인·지역사회 등을 위한 복지사업을 하는 밀알복지재단은 기증품 판매 수익으로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기자가 찾은 굿윌스토어에서도 장애인 직원이 기증품을 분류해 진열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간 기증품은 중고인 데다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강했지만, 최근 기업에서 개봉조차 않은 재고를 기부하는 경우가 늘면서 새 상품이 많아졌다. 밀알복지재단에 따르면 기빙플러스의 경우 올해만 80억 원 상당의 기증품이 접수됐다. 씀씀이를 줄이려는 소비자 사이에서 새것 같은 기증품을 구입하는 ‘알뜰 소비’가 입소문을 타는 이유다.

    최근 기증품 판매점은 의류와 신발뿐 아니라, 식료품 등 다양한 품목을 취급한다. 남은 소비기한은 2~3개월 정도로 시판 제품보다 짧지만 그날그날 먹을 만큼 사면 싼값에 장바구니를 채울 수 있다. 매주 이곳을 찾는다는 주부 손모 씨(53)는 “식료품값이 마트에 비해 3분의 1가량 저렴한 것 같다”며 만족해했다. 이날 손 씨가 구매한 열무김치 900g 가격은 3000원, 쌈장 170g은 500원이었다. 인터넷 쇼핑몰에선 보통 각각 1만 원, 2000원은 줘야 살 수 있다.



    고물가에 소비자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한국은행이 5월 21일 발표한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5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98.4로 전월보다 2.3 하락했다. 지수가 100보다 낮으면 장기 평균(2003∼2023)과 비교해 소비심리가 비관적이라는 뜻이다.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기증품 판매점을 찾는 소비자도 늘고 있다. 밀알복지재단에 따르면 4월 굿윌스토어 이용객 수는 23만 명으로, 1월(18만 명) 대비 28% 증가했다. 2021년 120억 원 수준이던 매출은 지난해 약 257억 원으로 114% 급증했다. 같은 기간 굿윌스토어가 기업으로부터 기증받은 물건도 373만 점에서 697만 점으로 크게 늘었다. 밀알복지재단은 올해 굿윌스토어 신규 매장 10개를 추가로 열 계획이다.

    지난해 매출, 2021년 대비 2배 급증

    소비자들이 꼽는 기증품 판매점의 또 다른 매력은 그때그때 파는 물건이 다르다는 점이다. 주기적으로 물품을 기부받지만, 매번 같은 물건이 들어오지 않고 일반 마트보다 품목도 적다. 일견 불편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이런 특징이 도리어 가계에는 도움이 된다는 게 기증품 판매점을 자주 찾는 이들의 설명이다. 기증품 판매점 단골이라는 A 씨는 “일반 마트에 가면 이것저것 과소비하게 되는데, 기증품 판매점에선 당장 매장에 있는 물품 가운데 꼭 필요한 것만 사게 된다”고 말했다. 기증품 판매점 구경이 쏠쏠한 취미가 되기도 한다. 시내에서 친구와 약속이 있으면 함께 지하철 역사(驛舍) 안 기증품 판매점에 들르곤 한다는 박민진 씨(24)는 “기증품 판매점에서 가끔 고가의 브랜드 의류도 볼 수 있다”며 “부분 가발, 팔찌 만들기 재료, 캠핑용 가방 등 일반 잡화점에선 한데 볼 수 없는 물건도 많아 친구들과 보물찾기하듯 구경한다”고 말했다.

    기업들도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가치에 부합하는 물품 기부에 적극 나서고 있다. 오뚜기는 장애인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취지에 공감해 2012년부터 굿윌스토어에 식품과 잡화를 기증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장애인 일자리 창출과 환경보호에 기여하고자 2019년부터 식품 등 458만 점(올해 5월까지 누적 기준)을 기부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기증품 판매점 인기에 대해 “고물가 상황에서 구매력이 감소한 소비자들에게 기증품 판매점이 소구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철 숙명여대 소비자경제학과 교수는 “소비자로선 소비를 줄이는 동시에 물건 고르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기증품 판매점이 매력적인 선택지로 보일 것”이라며 “알리·테무 등 해외 플랫폼에서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초저가 상품을 사는 것보다 기증품 판매점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는 게 더 안심되는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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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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