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여권신장 투쟁.
현모 진짜 비가 너무 무섭게 쏟아져요. 저희 집 새시 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와 난리도 아니에요.
영대 아, 진짜요? 이사 간 지 얼마 안 됐잖아요.
현모 그러니까요.
영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겠어요.
현모 그래도 비가 오늘 와서 다행이에요. 어제는 야외에서 촬영했거든요.
영대 무슨 촬영했어요?
현모 9월 1일이 무슨 날인지 영대 님 혹시 아세요?
영대 음…, 9월의 첫날?
현모 여권통문의 날이래요. 그래서 관련 홍보 영상을 찍었어요.
영대 여권통문? 그게 뭐죠?
현모 우리나라 최초 여성 인권 선언서예요. 무려 1898년 9월 1일에 북촌 양반 여성들을 주축으로 300명가량의 아낙네가 착명해 발표했대요. 미국이나 영국보다도 일찍 나왔다는!
영대 아, 그거 지지난해인가 양성평등기본법이 개정되면서 제정된 날이죠? 뉴스에서 들어본 거 같아요.
현모 맞아요! 2019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됐어요. 이런 건 널리 널리 알려야죠.
영대 잘못하면 여권(passport) 관련 날로 오해하는 분들도 있겠네요.
현모 그죠. ㅎㅎ ‘통문’은 한마디로 ‘통지문’ 같은 거고요, 여성의 교육권과 직업권, 참정권 이 세 가지를 요구한 거예요.
영대 장소는 어디서 찍으셨어요?
현모 서울 종로 일대에서 그 발자취를 따라가며 찍었어요. 처음으로 관립 여학교가 세워졌던 자리인 헌법재판소도 가고, 김란사(1872~1919) 여사 특별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교육박물관도 갔고요.
영대 김란사 여사님??
현모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 유학을 가 학사학위까지 받은 정말 멋진 분이에요.
영대 잠깐만!!! 그분 오하이오랑 연관 있죠? 오하이오 웨슬리언대! 미국에 있을 때 거기 졸업한 분한테 얘기 들었던 기억이 나요.
현모 네. 기혼 여성 신분으로 선교사를 겨우 설득해 미혼만 들어갈 수 있었던 이화학당에 입학하고, 웨슬리언대에서는 문학사를 전공해 고종황제 통역사도 하셨어요. 귀국 후에는 독립운동에도 힘 쓰셨고요.
영대 현모 님은 더 남다르게 느껴졌겠네요.
현모 이분의 스토리도 물론 인상적이었지만, 하루 동안 여러 흔적을 살펴보며 많은 걸 느꼈어요. 어머니가 다니셨던 풍문여고(현 서울공예박물관) 앞을 지나면서도 감회가 남달랐고요. 내가 오늘날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고, 때로는 낭비하고 있는 내 권리가 참으로 소중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영대 그렇게 깨닫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려는 모습도 멋지세요.
현모 어휴, 전 그냥 좋은 시절에 태어난 거고요.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어떻게 느끼고 행동했을까 궁금하기도 했어요.
영대 사실 저는 남자다 보니 이런 주제에 대해 섣불리 의견을 내기보다 주로 여성의 입장을 듣게 되거든요. 요즘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워낙 민감하고 다양한 범주로 해석되기도 하고요.
현모 그죠. 저도 어떤 주의자나 운동가까지는 아니지만, 아무런 의식이 없지는 않아요. 특히 결혼을 하고 나니까 문득 문득 부당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고 문제의식이 생기더라고요. 출산과 육아를 하게 된다면 훨씬 심해지겠죠? 딱히 ‘여권’을 인식한다기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불평등이 싫은 거예요.
영대 여권도 결국 인권이니까요.
현모 이번에 좀 반성한 것이 결혼하고 나이가 들다 보니 저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포기하고 겁먹는 측면들이 있었거든요. 더 꿈꾸고 도전해도 되는데, 괜히 남편 일이 더 중요한 거 같고요. 어차피 아이가 생기면 못할 거 같으니 지레 한 발 물러나게 되는 것도 있거든요. 그런데 옛날 사진 속 선배 여성들이 저에게 용기를 주고 응원을 보내는 거 같았어요. ‘린인(Lean In)’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저자 셰릴 샌드버그도 그렇게 말했거든요. “여성들이여, 자꾸만 자신의 커리어를 ‘sabotage’(사보타주: 고의적인 방해 행위) 하지 마라”고요.
영대 저도 딸만 둘을 키우다 보니 성차별적 사고를 주입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교육시키는 편인데, 얘들은 Z세대라 그런지 가르치지 않아도 이미 훨씬 앞서 있더라고요. 이제 초교 6학년인데도 성평등은 물론이고 성정체성이나 성소수자 문제까지도 거침없이 의견을 밝혀 깜짝 깜짝 놀란다니까요.
현모 세대 차이 굉장하죠. 저도 나름 M세대라 X세대인 남편이랑은 넘나 다르거든요. ㅋㅋㅋ
영대 같은 X세대인 저는 웁니다…. 암튼 가정교육이 참 중요한 거 같아요. 변화를 만들려면 딸 교육만큼이나 아들 교육도 중요하고요.
현모 대공감!! 그리고 교육은 거창한 게 아니라 일상에서 쓰는 사소한 언어들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 같아요. 언어야말로 우리가 매일 산소처럼 들이마시는 거니까요. 가끔 보면 성별과 전혀 무관한 사안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여자들이 그래” “남자들은 이래” “딸이니까” “아들이라서” 이런 말을 뱉는 경우가 있는데, 전 고개를 갸웃하죠.
영대 저희 딸아이 앞에서 그런 말실수했다간 큰일 나요. ㅋㅋㅋ
페미니즘을 다룬 영화 ‘거룩한 분노’ ‘세상을 바꾼 변호인’ ‘서프러제트’(왼쪽부터). [네이버 영화]
영대 저는 장난감 조립은 못 해도 그릇은 아주 잘 닦는데! ㅎㅎ 궁금해서 찾아보니 원제가 ‘Die go‥ttliche Ordnung’네요. 독일어 영화인가 봐요.
현모 공교롭게도 바로 며칠 전에 본 영화는 법정영화라 더 흥미진진했는데, 우리말 제목이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고 원제는 ‘On the Basis of Sex’예요.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삶을 극화한 거랍니다.
영대 지난해에 돌아가셨죠, 아마?
현모 네. 슬퍼요. ㅠㅠ 근데 생전에 만들어진 영화라 마지막에 직접 깜짝 출연해 감동이 ‘뿜뿜’ 배가 되고요, 그분의 꼬꼬마(?) 시절인 로스쿨 입학 날부터 영화가 시작돼 아주 몰입해서 봤어요. 저 지금이라도 로스쿨 갈까요? ㅋㅋㅋ
영대 현모 님이 좋아하는 일이라면 응원하겠지만, 인재들이 변호사직으로 쏠리는 건 사회 발전에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제 개인적 견해입니다.
현모 한 편 더 말씀드려도 돼요?
영대 ㅋㅋㅋ 말씀하세요. 역시 영화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분이라 추천 능력이 탁월하시네요. 안현모의 알고리즘, ‘안고리즘’ 좋아요.
현모 ‘서프러제트’도 20세기 초 영국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싸움에 뛰어든 이야기예요. 주인공은 원래 조용하고 평범한, 투쟁 같은 것을 멀리하는 인물이었어요. 하지만 자기 앞의 억압과 불의에 눈을 뜬 순간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나서 서프러제트(suffragette: 참정권을 주장하는 여자)로 거듭나요. 목소리가 크든 작든, 계급이 높든 낮든 누구나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차별에 다 같이 힘을 합쳐 저항하는 과정을 볼 수 있죠.
영대 불과 100년 전 일이라는 게 신기하네요. 그렇다 보니 여권신장 투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고요. 시기의 문제이지, 방향은 명백한 거 같아요.
현모 100년 전이었으면 이 기사가 제 이름으로 나가지도 못했을 거예요. 아닌가. 그나마 남자이름 같아서 가능했을지도~. ㅎㅎ
(계속)
안현모는… 방송인이자 동시통역사. 서울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SBS 기자와 앵커로 활약하며 취재 및 보도 역량을 쌓았다. 뉴스, 예능을 넘나들며 대중과 소통하고 있다. 우주 만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본 연재를 시작했다.
김영대는… 음악평론가. 연세대 졸업 후 미국 워싱턴대에서 음악학으로 박사학위 취득.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집필 및 강연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BTS : THE REVIEW’ 등이 있으며 유튜브 ‘김영대 LIVE’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