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촬영 · 장철웅]
지금보다 학벌이 더욱 이야깃거리가 되던 시절, 이화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미모의 여가수가 등장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화제였다. 다운타운에서는 포크와 록이, 또 한편에서는 트로트가 강세를 이루던 때, 정미조의 ‘개여울’엔 어느 쪽에도 걸치지 않은 독특한 서정이 있었다. 젊은 세대에게는 오늘날의 감성 발라드 같은 느낌이었을 테고, 기성세대에게는 신파를 건드리는 품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같은 노래가 보편적인 히트곡이 될 수 있었을 터.
1978년 일본 ‘야마하 동경 국제가요제’ 수상을 끝으로 정미조는 홀연히 음악계를 떠났다.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 자신을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다시 붓을 들고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심수봉부터 아이유까지 적잖은 가수가 ‘개여울’을 다시 불렀음에도 그 노래의 여진에 비해 정미조라는 이름이 덜 거론된 이유가 있다면 그 갑작스러운 마침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30여 년이 흐른 2016년 정미조는 ‘37년’이라는 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홀연한 은퇴와 마찬가지로 홀연한 컴백이었다. 많은 가수가 세월이 흘러 컴백할 때면 성인가요라는 명목 아래 트로트를 들고나온다. 혹은 시간을 망각한 채 자신의 젊음을 복제한다. 전자가 시류에 대한 알량한 영합이라면, 후자는 화석 같은 자의식의 앙상한 노출이 되곤 한다. ‘37년’과 최근 발표한 새 앨범 ‘젊은 날의 영혼’은 그런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는다. 성인가요, 또는 어덜트 컨템퍼러리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품격이 있다.
이날 공연 또한 앨범과 마찬가지였다. 오랜 공백을 애써 없애려는 과장 같은 건 없었다. 그 세대 관객에게 익숙할 디너쇼나 리사이틀 형식이 아닌 소극장 공연이었다. 오랜만에 무대에 오른 정미조 곁을 당대 연주자들이 지켰다. 밴드마스터이자 기타를 담당한 정수욱을 필두로 민경훈(피아노), 김유성(베이스), 송준영(드럼), 김정균(퍼커션), 정태호(아코디언)가 있었다. 상당한 경비가 들어갔을 법한 7인조 스트링까지 함께해 정미조의 목소리를 더욱 풍성하게 했다.
‘젊은 날의 영혼’에 담긴 ‘첫사랑’ 등으로 시작된 공연은 정미조가 들려주는 옛이야기와 더불어 객석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이 노래가 있었기에 제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수 있었다”는 말과 함께 ‘개여울’이 연주됐다. 당시 보기 드문 고음역대를, 정미조는 시간과 함께 숙성된 목소리로 불렀다. 객석 반응 또한 가장 뜨거웠다. 세파에 시달려도 자존을 잃지 않은 가수와 관객이 공진했다. 파도 같은 기승전결이 없어도 정갈하고 소박한 물결이 내내 일렁였다.
공연이 끝난 후 다시 주변을 돌아봤다. 웬만한 공연장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관객일 내가, 거기서는 가장 어린 관객 축에 들었다. 시니어들의 눈빛에서 흡족함이 엿보였다. 그들의 추억을 품위 있게 조명해준 시간이 이끌어낸 반응이었다. 마치 붓으로 부드럽게 캔버스를 터치하듯, 정미조는 자신의 목소리로 한 세대와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