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0일 한 축구 감독이 쓰러졌다. 2017 K리그 챌린지(2부 리그)에서 K리그 클래식(1부 리그) 승격을 놓고 선두 경쟁을 하던 때다. 그는 이틀 전 패배를 유독 쓰라려 했다. 2위인 그의 팀이 선두인 경남FC를 만난 날, 뒤집기를 바랐으나 아쉬운 경기력에 0-2 패배. 승점 차를 좁히지 못한 부산아이파크는 승격 플레이오프라는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담담한 어조로 풀어낸 그의 소감엔 응어리가 가득 차 있었다. “상대 팀 경남이 승격 자격을 갖췄다. 축하한다.” “앞으로 험난한 과정이 남아 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조진호 감독이 아파트에서 나오다 심장에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다”는 구단 관계자의 증언에도 모두가 실감할 수 없었다. 평소 심장 질환을 앓아왔어도 그렇게 급작스레 떠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프로축구판에서 40대 감독 전성시대를 열어가던 고인에게 추모가 뒤따랐다. 살만 빈 이브라힘 알칼리파 아시아축구연맹(AFC) 회장에 이어 잔니 인판티노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도 애도 서신을 보내왔다. 승격을 겨냥해 온 힘을 짜내던 그가 불과 이틀 사이 애도의 대상이 됐다. ‘황망하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승패의 벼랑에 선 지도자들
지도자를 지낸 한 축구인은 “축구 감독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라고 했다. “선수단을 이끌며 대중 앞에 서는 일이 언뜻 화려해 보이지만, 그 장막 뒤에서 감독은 결국 혼자”라는 그의 말이 처연하게 들렸다.여느 직업이 그렇듯 축구 감독도 성과로 평가받는다. 다만 승패가 극명히 갈리는 스포츠 세계에서는 그 잣대가 더 엄격하다. 선수단 연봉 등 구단 운영비로 한 해에만 수십, 수백억 원이 움직인다. K리그 클래식 또는 챌린지 우승,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 같은 가시적 성적은 팀을 운영하는 모기업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다. 축구대표팀은 또 어떤가. 그 성패에 따라 대한축구협회(축구협회)의 위신이 판가름 난다. 현대그룹이 오랫동안 후원해온 축구협회는 다른 나라의 축구협회에 비해 기업적 성향이 강한 편이어서 성과에 매우 민감하다.
고용주(구단/협회)와 피고용인(감독) 관계로 보면 이해가 쉽다. 큰마음 먹고 지갑을 연 고용주는 그에 걸맞은 결과를 거머쥐고자 한다. 당장의 금전적 이득뿐 아니라 긍정적 홍보 효과도 노린다. 높은 연봉을 보장받는 감독이 실적 압박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한국 축구는 물론, 유럽 각 프로리그도 마찬가지다. 축구 감독 대부분은 오늘도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다. 단, 국민성 혹은 축구를 받아들이는 문화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감독직을 맡은 이들이 감내해야 하는 스트레스 강도는 남다르다.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의 멘탈 코치를 맡고 있는 윤영길 한국체육대 사회체육학 교수는 “한국 사회 내 문제로 봐야 한다. 축구협회, 각 구단, 선수 등의 관계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보니 지도자들이 필요 이상 압박을 받는다. 외국 감독과 달리 국내 감독들이 자기 할 말을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며 “스트레스가 대부분 사회·문화적 원인에서 유발되다 보니 이를 받아들이는 감독 개개인도 취약한 모습을 보인다. 스포츠 심리학 등 관련 시스템의 발전 여부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문화적 변수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하다”고 진단했다.
시한폭탄 안고 가는 신태용 감독
“다들 앓는 소리 내도 신태용만 하겠느냐.”
최근 축구 지도자들 사이에서 도는 자조적 한탄이다. 10월 15일 FIFA A매치 이후 뒤늦게 귀국한 신태용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일부 축구팬의 거센 항의와 맞닥뜨렸다. ‘근조(謹弔)’라는 표현이 붙은 ‘한국 축구 사망했다!’ 현수막이 등장한 인천국제공항. 10월 7일과 10일 치른 러시아전, 모로코전 연패의 여파는 상당했다. 거스 히딩크 전 감독이 부임할지도 모른다는 설이 나돌면서 대표팀을 향한 화살촉도 더 날카로워졌다. 축구협회는 기자회견 장소를 공항에서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축구회관으로 부랴부랴 옮겼다.
이렇게 쫓겨가듯 자리를 피한 일에 대해 다수 축구 지도자는 “남 일 같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7월 초 부임한 신 감독을 지켜봐온 주변인들은 “스트레스 때문에 밥도 잘 못 먹더라. 얼굴부터 야위었다”고 설명했다. 신 감독이 “대표팀 감독직 제안이 오자 지인들이 ‘본선행 좌절되면 이민 가야 할지도 모른다’며 만류했다”고 털어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기대하기 어려운 연전이었다. 신 감독이 지금까지 지휘한 경기는 총 네 차례 360분이다. 8~9월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이란전, 우즈베키스탄전(이상 0-0 무)과 10월 평가전 러시아전(2-4 패), 모로코전(1-3 패)이었다. 월드컵 본선행을 갈구한 당시에는 극단적으로라도 결과를 내고자 했다. 이번 평가전은 배려 차원에서 K리거를 제외하고 반쪽짜리 팀으로 실험에 나섰다. 신 감독 또한 명단 발표석상에서 경기 성격을 설명하며 양해 아닌 양해를 구한 바 있다. 축구협회 내 밀실행정을 향한 칼날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감독 지도력을 깎아내릴 시기는 아니다.
2009년 성남 일화(현 성남FC)를 맡아 2010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2011 FA컵 우승을 일궈낸 신 감독이다. 울리 슈틸리케 전 대표팀 감독 시절 코치로 전술 파트에 관여하며 한때 팀이 승승장구하도록 도왔다. 그는 이후 성인 대표팀을 떠나 올림픽 대표팀, 20세 이하(U-20) 월드컵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했다. 좀 더 지켜봐야 할 시점이건만 지나친 비난에 그의 이력도 너덜너덜해졌다. 며칠도 안 된 소집 기간을 고려하는 이는 드물었다. 신 감독 역시 잘 알 것이다. 러시아월드컵 본무대를 밟는 순간까지도 히딩크 전 감독과 비교될 것임을. 대중에게 이해를 구하기 어렵고, 그저 버티면서 결과로 답해야 하는 자리에 앉았음을.
외롭다. 잡을 지푸라기조차 없다. “견뎌야 한다”는 말을 되뇌며 가슴에 폭탄 하나씩 품고 사는 게 이들의 숙명이다. 고인이 된 조진호 감독도, 신 감독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