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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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동진이 형 집’에서 발아한 한 시대의 음악, 정서

여름과 함께 떠난 가수 조동진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7-09-05 11: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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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30일, 생전에 공연으로 봤을 뿐인 가수 조동진의 빈소를 찾았다. 그저 가시는 길에 두 번의 절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았다. 그 전날, 그러니까 그의 타계 소식이 알려진 날 밤 어느 술집에서 마주친 지인이 “네가 왜 여기 있어. 일산에 있어야지”라고 말한 것도 한 이유가 된 것 같다.

    경기 고양시 일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는 거의 모든 영역의 음악산업 관계자가 보내온 근조화환으로 뒤덮였다. 어디를 가나 ‘선생님’ 소리를 듣는 음악계 거목들이 형, 동생 하며 잔을 기울였다. 예상한 모습이다. 당연한 모습이다. 유독 달랐던 건, 빈소의 조도였다. 빈소뿐 아니라 조문객들이 모인 자리도 어두웠다. 밝은 형광등은 최소한으로 켜고 그 대신 상마다 발광다이오드(LED) 초를 켜놓았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던 밝기라고 했다. 그의 집에 모인 음악인들은 늘 그렇게 촛불을 켜고 놀았다고 했다. 1970~80년대를 관통한 음악인들의 회고담에 종종 등장하는 ‘동진이 형 집’이 그려졌다.

    최성원은 당시 그의 자택 풍경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렇게 묘사했다. ‘항상 형 집에는 신발 놓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뮤지션으로 붐볐고 형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커피와 라면을 끓여댔다. (중략) 신기하게도 거기의 모든 뮤지션들은 그 형의 모습만 봐도 음악에 대한 절망감과 울분과 불안이 떨쳐나가는 걸 느끼는 듯했다.’ 이곳저곳에서 안부와 함께 주고받는 고인과의 추억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텅 빈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1987년 늦은 여름, 중학교 1학년 때였다. 평일 저녁 동네 화실에 다녔다. 딱히 미술을 하겠다는 의지도 없이 그저 엄마가 보내서 갔던 그 화실에서 이젤에 스케치북을 올리고 비너스, 아그리파 같은 걸 그렸다. 정해진 방식대로 정해진 대상을 그리는 일은 무척이나 재미가 없었다. 며칠 만에 그림에 흥미를 잃기 딱 좋았다. 그래도 매일 화실에 나갔다. 평일 초저녁 적막한 화실에 틀어놓은 라디오가 무척이나 좋았다. 성우 장유진이 진행하던 ‘가요산책’이 그림 그리는 한 시간 동안 매일 흘렀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 많은 가요를 접했다. 들국화, 시인과 촌장, 신촌블루스, 조덕배, 김현식, 어떤날….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는 볼 수 없던, 즉 TV에는 나오지 않는 가수들의 목소리였다.

    조동진도 그때 알았다. ‘나뭇잎 사이로’였다. ‘…여름은 벌써 가버렸나/ 거리엔 어느새 서늘한 바람/ 계절은 이렇게 쉽게 오가는데…’라는 가사가 귀에 들어왔다. 무료하고 고즈넉한 화실 공기와 퍽 어울렸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군 입대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무렵, 전국 무전여행을 했다. 콤팩트디스크(CD)가 음반의 대세가 되며 LP반 생산이 거의 중단됐을 때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던 강원 춘천의 작고 오래된 음반 가게에서 이 노래가 담긴 조동진 2집을 발견했다. 김민기 1집, 어떤날 1집과 함께 집어 들고 서울로 돌아왔다. 내가 가진 조동진의 유일한 LP반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알지 못했다. 그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어떤 존재인지.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다시피 들으며 대중음악사에서 조동진의 위치를 알게 됐을 때도 채 깨닫지 못했다. 그가 당대 동료와 후배들에게 미친 영향은 그저 음악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음을. ‘동진이 형 집’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빈소에 분명히 있었다. 일생 동안 그가 음악에 대해 지켜온 태도가. 방황하는 젊은 음악가들에게 나무 그늘 구실을 했던 그의 삶 그대로가. 조동진이 보듬었던 하나의 시대에서 발아해 숲이 된 하나의 ‘정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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