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 “공정과 통합, 차기 대권의 승부수가 될 것” [진중권의 직설-20회]

진보와 보수의 합의 정치를 기대하며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10-13 16:18:13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진보논객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한국 정치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이 담긴 ‘진중권의 직설’은 이번 20회가 마지막입니다. 진중권의 직설을 애독해 주신 독자여러분 감사합니다. 〈편집자 주〉

    진중권 전 교수. [뉴스1]

    진중권 전 교수. [뉴스1]

    오래 전에는 진보에서 “새는 두 날개로 난다”고 말했다. 보수우익이 툭하면 ‘빨갱이’ 운운하며 좌파 사냥을 하던 시절의 일이다. 이 말에는 한 사회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데에는 좌파와 우파가 모두 필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당시에 진보진영은 홍세화 선생이 제시한 ‘똘레랑스’라는 말을 아예 입에 달고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사상이나 이념,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다름’에 ‘관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두 날개와 관용을 얘기하던 그 세력이 권력을 쥐었다. 그로써 사회에 관용이 넘치게 되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빨갱이에서 토착왜구로

    처지가 뒤바뀌자 이제는 진보를 자처하던 진영에서 툭하면 우익 사냥을 한다. 자기들과 조금이라도 견해가 다르면 ‘토착왜구’로 몰아서 공격하기에 바쁘다. ‘관용’을 말하던 그들이 이제는 ‘무관용’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한 언론사들을 향해 고소장을 남발하고 있다. 추미애 법무부장관 역시 자신에게 부당청탁 의혹을 제기한 이들과 이를 보도한 언론에 “무관용으로 대응”할 것이라 엄포를 놓는다. 대통령과 총리와 민주당은 광화문 광장을 원천봉쇄하고 불법집회에 “무관용의 원칙으로 엄격히 대응할 것” 이라 천명했다. 

    물론 진보진영에도 비판의 목소리는 아직 존재한다. 정의당의 심상정 전 대표는 한글날 광화문 원천봉쇄를 “방역 편의주의”라 비판했다. 민변에서도 “정부의 무관용 원칙이 집회의 자유와 가치를 중대하게 훼손할 수 있다”는 성명을 냈다. 더불어민주당에서 추진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에 대해서도 언론단체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전체로 보면 이런 움직임은 극히 일부분일 뿐, 과거에 비해 사회분위기는 더 각박하고 삭막하고 살벌해졌다. 진영논리가 난무하는 곳에 관용이 설 자리는 없다. 국민을 통합해야 할 대통령부터 갈라치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왜 이렇게 됐을까? 진보나 보수나 어차피 군사주의 마인드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일 게다. 과거에 보수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바꾸어 놓았다. 시민사회 안에서 6‧25의 연장전을 치른 셈이다. 이 전장에서 견해가 다른 이들은 간단히 ‘간첩’ 혹은 ‘빨갱이’로 몰렸다. 이들에 대항했던 운동권의 주류는 민족주의 이념의 영향 아래 민족의 자주권을 빼앗은 미국과 일본에 대항하여 독립전쟁의 연장전을 치른다는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관성으로 여전히 자기들과 견해가 다른 이들을 ‘토착왜구’로 몰아붙이는 버릇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전장에 관용이란 있을 수 없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나 보수나 모두 ‘자유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인식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보수는 어차피 군사정권의 후예로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안보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왔다. 군사정권의 대척점에 있던 진보 역시 민족이나 계급의 이해를 개인의 자유 위에 올려놓는 것을 당연시해 왔다. 보수나 진보나 사회를 적과 아로 쪼개 상대를 섬멸하는 것을 정치로 여겨온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한밤중에 방문을 열고 얼굴에 플래시를 비추며 다짜고짜 “대한민국이냐, 인민공화국이냐”라고 물었다는 한국전쟁의 상황이 시민사회의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공정과 통합의 화두

    국회 본회의장. [뉴시스]

    국회 본회의장. [뉴시스]

    사회가 진영으로 분열되면, 모든 일이 진영논리에 따라 처리되기 마련이다. 진영을 지키기 위해 내 편의 잘못은 무조건 덮어두게 된다. 그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는 적의 음모로, 그것을 비판하는 행위는 적의 공세로 치부된다. 그 결과 윤리적 사안은 돌파해야 할 전술적 과제로 둔갑한다. 잘못이 수정될 길이 없으니 진영은 안으로부터 썩어 들어가고, 그 짓을 양 진영에서 하다 보면 사회 전체가 병이 들 수밖에 없다. 제 편의 잘못은 무조건 덮어주니 권력자들은 제 진영 안에서 법과 도덕을 초월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에 따르는 대가는 물론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개인’들이 필요하다. 그 개인들은 설사 특정 진영에 속해 있어도 제 ‘진영’이 아니라 제 ‘자신’의 이름으로 발언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그 해방된 개인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을 통해 진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안에 대해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공론의 장’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시민단체나 진보정당에서 그 공론의 장을 대변해 왔다. 가령 정의당 ‘데스 노트’는 공직임명에 관해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객관적 기준을 제시해 주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에 들어와 그 ‘최소한’마저 무너졌다. 

    진영으로 사회를 갈라 치는 정치에서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 중에는 진보의 해법을 요하는 것도 있고, 보수의 해법을 요하는 것도 있고, 두 해법을 결합한 종합적 처방을 요하는 것도 있다. 군사주의적 마인드로 상대를 제압한다는 발상으로는 정책의 안정적 시행에 필요한 사회적 합의를 얻어낼 수가 없다. 적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악하지 않고, 친구는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선하지 않다. 하지만 이 정권은 그 동안 주로 국민을 갈라 치는 정치를 해 왔다. 지난 의사파업 국면에서는 아예 대통령까지 나서서 의사와 간호사 사이를 갈라놓은 바 있다. 

    여기서 자연스레 차기 정권에 필요한 리더십의 윤곽이 드러난다. 언제나 그렇듯이 권력을 잡으려면 ‘시대정신’을 제 것으로 해야 한다. 다음 선거에서는 아마도 ‘공정’과 ‘통합’이 화두가 될 것이다. 이미 국민의 대다수는 정의를 무너뜨린 진영논리와 나라를 분열시키는 대통령의 갈라치기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여당이든 야당이든 차기 지도자는 진영논리가 망가뜨린 ‘공정’의 기준을 다시 세우고 편 가르기 정치가 갈라놓은 사회를 다시 ‘통합’하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승부는 공정과 통합이라는 시대정신을 누가 선점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의 자유주의적 정의

    [GettyImage]

    [GettyImage]

    현재의 상황은 33년의 역사를 가진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지 보여준다. 보수는 여전히 국가주의적 이념에 사로잡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비(非)국민, 혹은 반국가분자로 몰아가려 한다. 진보 역시 민족주의적 이념에 매몰되어 생각이 다른 이들을 반(反)민족분자, 혹은 토착왜구로 몰아 배제하려 든다. 정치 자체가 비국민이나 반국가분자, 혹은 반민족분자나 토착왜구를 척결하기 위한 소탕전으로 여겨지고 있는 셈이다. 87년 시민항쟁으로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완성됐지만, 그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들의 마인드는 여전히 시대에 뒤쳐져 있는 셈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다원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자유주의자는 사회에 자기와는 이념, 이해, 가치관이 다른 이들이 존재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대화와 논쟁, 혹은 협상과 타협을 통해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합의하는 방안을 찾아내는 데에 정치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좌우익의 전체주의자는 나치 법학자 칼 슈미트의 말대로 정치성의 본질이 세계를 적과 아로 구분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이 경우 정치의 목적은 적을 섬멸하는 데에 있게 된다. ‘정치’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념은 여전히 이 두 정의 중 전체주의적 관념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직도 우리 정치는 여전히 87년 체제에 갇혀 있다. 그나마 참여정부까지는 보수정권 하에서든, 진보정권 하에서든 그 틀 내에서 일정 정도 민주주의의 성장이 있었으나, 그 이후 우리의 정치문화는 후퇴를 거듭해 왔다. 정치는 경제의 선행지표다. 민주주의의 후퇴는 곧 경제를 비롯한 사회 전체의 정체로 이어질 것이다. 한참 ‘국뽕’에 취해 있는 지금이야말로 일본식 ‘잃어버린 20년’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정치든 사회든 뭔가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나, 그 혁신의 비전은 보수와 진보의 생산적 경쟁을 통해서만 얻어지고, 두 진영 사이의 합의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가 있다. 

    이제 과거의 정권들이 우리의 의식에 심어 놓은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의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입으로 떠들면서 실제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자유주의’를 실천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내가 보는 것을 상대는 보지 못하고, 상대가 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시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시각은 너의 편향을 견제해 주고, 너의 시각은 나의 편향을 바로잡아준다. 그럴 때 사회는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다. 새는 두 날개로 난다. 한쪽 날개가 잘린 새는 날지 못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