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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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사업에 뛰어든 학병 세대

1917~23년 태어나 고등교육받은 엘리트…일본군 탈출 후 광복군 입대

  • 김건우 대전대 교수 kwms00@chol.com

    입력2015-08-17 12: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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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사업에 뛰어든 학병 세대
    70년 전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로 돌아가보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자격이 누구에게 주어졌을까. 식민통치라는 기존 건물은 무너졌고 그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세워야 했다. ‘완전히 새로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과거 일제통치에 협력한 이들에게 새로운 건물을 세울 자격이 있을까. 소위 ‘친일’의 문제가 여기에 따른다. 잘 알려져 있듯 한국의 해방 후 역사에서 친일 청산은 이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해방 후 역사는 친일 기득권자들이 여전히 득세하고 변신하는 과정이었다.

    그럼에도 해방기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데 누가 주체가 될 것이냐에서 ‘친일’ 여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인다. ‘민족에 반역하고 친일을 했던 이들에게는 새 나라의 주체가 될 자격이 없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문제는 너무 많은 이가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했다는 것. 당장 나라 만들기라는 긴급한 과제가 있음에도 ‘몸을 더럽히지 않은’ 이들을 찾기가 힘들었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세대가 주목받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좌우익을 막론하고 어느 쪽에게든 ‘준비된 젊은이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학병(學兵) 세대’가 총아로 등장했다. 일제강점기 말 전쟁에 동원돼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전쟁터로 끌려갔던 사람들, 제국 최고의 고등교육을 이수했음에도 친일 전력이 없는 이들, 정확하게는 친일을 요구받기에 너무 ‘젊었던’ 이들이다. 대표적인 좌익계 문인이던 김남천은 이런 사정을 해방 직후 소설에 담아냈다. 1945년 10월 ‘자유신문’에 연재한 장편 ‘1945년 8·15’에서 김남천은 학병 세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이들의 입을 통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8월 15일 뒤에 자기가 앞으로 건설될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이바지할 것인가 하는 생각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줄 압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건국사업에 바치는 가장 바른 봉사요 노력을, 나는 이 불행하였던 나라의 젊은 청년이 마땅히 가져야 할 가장 정당하고 또 아름답고 순수한 애국심만을 가지고 이 길을 선택하고 이 길을 실행에 옮기려는 것입니다.’(김남천의 ‘1945년 8·15’ 중에서)

    이 대사의 키워드는 ‘건국’과 ‘청년’이다. 젊은 청년들이 건국사업에 자신을 바쳐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청년이라고 해서 모두가 건설될 나라에 이바지할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최고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 대다수가 소학교도 다니지 못했던 현실에서 대학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들이라면 새 나라를 만들 능력을 갖췄다고 할 만했다.



    최근에 황용주(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이자 학병의 한 사람)에 대한 평전을 낸 안경환은 학병 세대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학병 세대는 해방 후 나라의 사회적 중추 기능을 맡아온 실세로서 각계에 진출해 사회 기반을 형성했으며, 무엇보다 ‘학병은 일제 말기 조선의 최고 청년지식인 집적체였다. 엄연한 대일본제국의 지적 수준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던 집단’(안경환의 ‘황용주그와 박정희의 시대’ 중에서)이었다.

    학병 세대의 범위는 어떻게 될까. 규모는 어느 정도이며 연령대는 어떻게 되는가. 학병 대상이 됐던, 일제강점기 말 대학을 다니던 연령층은 위로는 1917년생부터 아래로는 23년생까지 20년을 전후해 약 6~7년에 걸쳐 태어난 이들이었다. 1944년 당시 고등교육을 받던 조선인 학생 수는 7200명 정도로 추산된다. 당대 최고 재원들이었다.

    이 세대는 실제 남북한 건국 과정에서 많은 일을 했다. 북으로 넘어간 사람들 가운데는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확립한 황장엽 같은 이도 있다. 그렇다면 남쪽을 선택한 사람은 어떤 이들인가.

    건국사업에 뛰어든 학병 세대
    장준하와 김준엽의 일본군 탈출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인 학병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의 수기 ‘장정’ 두 권과, 일반 대중에게는 박정희 시대 민주화운동가로 주로 기억되는 장준하가 쓴 ‘돌베개’다. 이 두 사람의 수기가 유독 돋보였던 것은 기본적으로 양자 모두 일본군 ‘탈출기’인 까닭이었다. 말하자면 민족의 편에 서 있다는 것, 일본군으로부터 탈출해 광복군으로 편성됐고 민족의 적자(嫡子)로서 정통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맥을 잇고 있다는 자부심이 두 수기의 바탕에 깔렸기 때문이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학병으로 징집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학병 징집 대상자들이 처했던 상황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반도인 학도 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된 것은 1943년 10월로 사범계와 이공계를 제외한 대학생 및 전문학교생이 학병으로 전선에 나가야 했다. 대학, 전문학교에 재학 중인 징집 대상 조선인 학생 약 5000명 가운데 실제 학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한 수는 4385명이었다.

    건국사업에 뛰어든 학병 세대
    반도인 학도 특별지원병제가 공포된 일제강점기 말, 장준하는 1941년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東洋)대 예과를 거쳐 1942년 장로교 계통의 일본신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장준하가 일본신학교에 재학할 때 김준엽은 게이오(慶應)대에 재학 중이었다. 두 사람은 각각 신변을 정리하고 1944년 1월 입대했다. 징집된 조선인 학병들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각자의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입대 직전 장준하는 자신의 평안도 정주 신안소학교 시절 제자인 김희숙과 결혼했다. 눈여겨보고 있던 제자의 정신대 징발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장준하의 나이 27세, 김희숙은 17세였다.

    장준하와 김준엽의 두 책은 서술 대상으로 삼는 시기와 내용 면에서 거의 겹쳐 있다. 김준엽 스스로 책 서문에 ‘나와 장형(張兄)과의 연인과 같은 우정의 기록’이라고 한 ‘장정’ 1, 2권은 장준하의 ‘돌베개’와 동일한 시기 동일한 경험을 대상으로 하는 또 하나의 기록이다.

    김준엽과 장준하의 첫 대면은 일본군 진지에서 탈출하는 과정에서 이뤄졌다. 두 사람 모두 20대 젊은이였다. 김준엽은 ‘장정’에서 첫 만남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 사람 가운데 처음부터 장(張)형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하얗고 깨끗한 얼굴에 매사에 침착하였다. 그는 무슨 이야기든지 차분한 목소리로 조리 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내 마음에 꼭 들었다.’ 이어서 말한다. ‘이로부터 그와 나는 친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냈으며, 그가 1975년 8월 별세할 때까치 연인처럼 일생 고락을 함께 하’였다.

    1920년생으로 장준하보다 두 살 아래였던(‘장정’에는 자신이 네 살 아래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준엽은 장준하에게 ‘귀인(貴人)’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학병 탈출 때 그를 도와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충칭(重慶)으로 이끌었고, 한참 시간이 흐른 1959년에서 61년 사이, 4·19혁명 전후의 가장 긴박한 시기에 장준하가 발행하던 잡지 ‘사상계’의 주간을 맡아줬다.

    장준하와 김준엽의 수기에는 학병 세대가 자신들의 윗세대, 즉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선배세대에 대해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추측하게 하는 서술들이 등장한다. 장준하는 ‘돌베개’의 ‘부치는 말’에서 이 수기의 핵심 메시지를 ‘한국 학병들의 저항정신’과 ‘못난 조상이 또다시 되지 말아야 한다.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못난 조상에 대한 한스러움과 다시는 후손에게 욕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우리의 단호한 결의’라고 요약했다. 김준엽 역시 ‘장정’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라 잃은 젊은이들의 고생을 생각할수록 나라를 빼앗긴 못난 조상이 원망스러웠고 나는 그런 못난 조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건국사업에 뛰어든 학병 세대
    우익 민족주의의 적자(嫡子)

    학병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김준엽의 기록에 의하면, 학병 세대는 해방 후 자신들이 할 일을 ‘건국사업’, 즉 ‘정치뿐 아니라 경제, 문화, 사회, 군사에 걸친 제반 건설사업’이라고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건국과 건설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무엇보다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이라는 데 있었다. 이런 자기인식은 상당 부분 ‘객관적’인 것이었다. 외부에서도 이들 ‘엘리트’를 특별하게 대우했다.

    단적인 예가 있다. 장준하, 김준엽 등이 해방 전 광복군 시절 미군의 OSS(미국 전략정보기관으로 CIA의 전신) 훈련을 받았다는 것은 훗날 분단 후 한국의 운명 한 가닥을 징조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당시 OSS는 식민지 출신 청년 지식인을 전략요원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유한양행 설립자로 유명한 유일한 박사도 태평양전쟁기 미국에서 OSS 한국담당고문으로 활동했다. 장준하와 김준엽이 OSS 훈련 후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의 일원이 된 것도 이들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온 학병 출신 ‘인텔리’였기에 가능했다.

    해방기는 물론이고 이후로도 내내 장준하와 김준엽은 자신들이 광복군의 ‘적통(嫡統)’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일본군에서 해산된 한국인 출신 학병들이 광복군으로 포섭된 바 있었는데, 이들 일본군 패잔병 출신들과 자신들을 구분했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까지 통역을 했거나 아니 일선지구를 돌아다니며 아편 장사나 일군 위안소 포주 노릇을 한 사람들까지도 하루아침에 광복군 모자 하나씩을 얻어 쓰고 독립운동가, 망명가, 혁명가를 자처하는 목불인견의 꼴이었다. 사실 임시정부나 광복군도 그 이름에 비해 기구나 인원이 너무 약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도급 인물들은 그런대로 있었지만, 청년층의 인재는 정말 과부족상태였다.’(장준하의 ‘돌베개’ 중에서)

    후일 두 사람이 당당히 학병 탈출기를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장준하와 김준엽은 광복군의 중심이 자신들이 속했던 이범석 부대에 있으며, 이념으로는 임시정부의 ‘우익 민족주의’에 바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건국사업에 뛰어든 학병 세대
    이런 까닭에 광복군의 또 다른 지대장 김원봉은 항상 의혹의 대상이 됐다. 장준하는 김원봉을 명확히 공산당 노선에 서 있는 인물로 봤다. 해방 직후 김원봉 휘하로 편입되는 일본군 출신도 경계 대상이었다. 장준하의 수기에는 광복군 3개 부대(제1지대, 제2지대, 제3지대) 사이에 세력 다툼이 있었으며 제1지대장 김원봉이 해방 직후, 일본군 육군 소위 출신으로 ‘일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와 손을 잡고 광복군과 임시정부에 대해 백해무익한 작당을 해 임시정부 반대파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황모’란 황용주를 가리킨다. 장준하 등에게 황용주 같은 인물은 우익 학병들과 계통을 전혀 달리하는, 그 이념성이 의심되는 존재였다. 장준하, 김준엽들은 스스로를 우익 민족주의의 적자로 인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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