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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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A 투어 지배력 상실… 위기의 한국 여자골프

[김도헌의 골프 이야기] 韓, 올 시즌 2승 그쳐… 세대교체 실패가 주된 요인

  • 김도헌 스포츠동아 기자

    dohoney@donga.com

    입력2023-09-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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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다는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

    한국 여자골프 1세대인 고(故) 구옥희가 LPGA 투어 최초 한국인 우승자가 된 것은 1988년 스탠더드 레지스터 대회에서였다. 1994년과 이듬해 고우순이 각각 1승씩을 기록했지만 LPGA 무대가 본격적으로 한국 선수를 주목하기 시작한 건 1998년 박세리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과 US여자오픈 등 메이저대회 2승을 포함해 4승을 거둔 박세리는 그해 신인상까지 거머쥐었다.

    한때 세계 여자골프를 주름잡았던 한국이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 힘을 잃으며 변방 국가로 전락했다. 여자골프 세계랭킹 최장 기간(163주) 1위 기록을 가진 고진영(사진)은 올 시즌 2승에 그치며 세계랭킹 4위에 머물고 있다. [LG전자 제공]

    한때 세계 여자골프를 주름잡았던 한국이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투어에서 힘을 잃으며 변방 국가로 전락했다. 여자골프 세계랭킹 최장 기간(163주) 1위 기록을 가진 고진영(사진)은 올 시즌 2승에 그치며 세계랭킹 4위에 머물고 있다. [LG전자 제공]

    韓 여자골프 전성시대 연 세리키즈

    박세리에 이어 김미현, 박지은, 한희원 등이 가세하며 서서히 세계 여자골프계의 주류로 발돋움한 한국은 ‘세리키즈’ 대표 주자인 박인비가 한 시즌 5승(메이저대회 2승)을 달성한 2015년 15승을 합작해 미국을 제치고 시즌 최다 우승국 영예를 안았다(표 참조). 2017년과 2019년에도 각각 15승을 수확하는 등 2020년까지 6년 연속 LPGA 최다 우승국 타이틀을 차지하며 ‘한국 여자골프 전성시대’를 이어갔다.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한국이 삐걱대기 시작한 것은 2021년부터다. 9월 이후 고진영이 4승을 보태 시즌 5승을 거두고 합작 7승을 챙겼지만 총 8승을 기록한 미국에 7년 만에 최다 우승국 타이틀을 넘겨주고 ‘넘버 2’로 내려앉았다.

    2021년 상승세가 꺾인 한국은 지난해 4승에 그쳤고, 올해 부진은 더 깊어지고 있다. 9월 11일 끝난 크로거 퀸 시티 챔피언십까지 2023시즌 25개 대회를 치른 가운데 미국이 8승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 뒤를 프랑스와 태국, 호주(이상 3승)가 잇고 있다. 프랑스는 셀린 부티에가 올 시즌 홀로 3승을 챙겼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태국은 9월 초 포틀랜드 클래식에서 LPGA 투어 역사상 3번째로 월요예선을 거쳐 정상에 오른 신인 짠네띠 완나샌의 ‘반란’에 힘입어 3승을 기록했다. 호주는 크로거 퀸 시티 챔피언십을 제패한 이민지를 비롯해 그레이스 김(롯데 챔피언십), 한나 그린(JM 이글 LA 챔피언십)이 골고루 승수를 챙겼다. 반면 한국은 3월 HSBC 위민스 월드 챔피언십과 5월 코그니전트 파운더스컵에서 우승한 고진영의 2승이 전부다.



    투어 지배력이 뚝 떨어진 한국의 냉혹한 현실은 최근 3년간 메이저대회 우승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은 2023시즌 5개 메이저대회서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전인지가 지난해 6월 KPMG 위민스 PGA 챔피언십에서 정상에 오른 이후 7연속 무승이다.

    한국은 1998년 박세리의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 우승 이후 메이저대회 통산 35승을 합작했다. 한 시즌 최다 3개 메이저대회를 휩쓴 시즌도 6번(2012, 2013, 2015, 2017, 2019, 2020)이나 됐지만 최근 3년간 15개 메이저대회에서 단 1승밖에 거두지 못했다. 9월 12일 기준 여자골프 세계랭킹도 톱10에 고진영(4위), 김효주(6위) 둘뿐이다.

    한때 LPGA 무대를 주름잡던 한국은 왜 힘을 잃었을까. 여자골프 세계랭킹 최장 기간(163주) 1위 기록을 갖고 있는 고진영이 지난해 손목 부상으로 단 1승에 그쳤고, 올해도 시즌 초반 2승에 그친 것이 결정적이지만 좀 더 근본적 이유는 세대교체 실패에서 찾을 수 있다.

    LPGA에 최근 진출한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 투어 출신 선수는 2020년 US여자오픈에서 비회원 자격으로 우승한 뒤 이듬해 태평양을 건넌 김아림, 퀄리파잉 토너먼트를 통해 입성한 최혜진과 안나린(이상 2022년 데뷔), 유해란(2023년 데뷔)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새 피 수혈은 많지 않은데 출산 휴가로 자리를 비운 ‘골프 여제’ 박인비를 비롯해 유소연, 김세영, 전인지, 박성현 등 우승 트로피를 노릴 만한 선수들은 최전성기를 지나 점차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KLPGA 투어 선수들의 미국 진출이 과거처럼 폭발적이지 않은 이유는 KLPGA 투어의 활황 덕분에 미국 무대에 도전할 동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대회 수가 늘어나고 상금 규모도 커지면서 국내 최정상급 선수들은 굳이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낯선 환경에서 잦은 이동과 비싼 비용, 한국보다 많은 세금 등 미국의 환경은 ‘비즈니스 차원’에서 접근할 때 위험을 감수할 만큼 매력이 없기 때문이다.

    중국·태국 골프 신흥 강국으로 부상

    올해 LPGA 투어 2년 차로 2승을 거두며 세계랭킹 1위로 우뚝 선 인뤄닝. 펑샨샨에 이어 중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월드 넘버 1’ 자리를 꿰찬 인뤄닝은 2002년생 신예다. [뉴시스]

    올해 LPGA 투어 2년 차로 2승을 거두며 세계랭킹 1위로 우뚝 선 인뤄닝. 펑샨샨에 이어 중국 선수로는 두 번째로 ‘월드 넘버 1’ 자리를 꿰찬 인뤄닝은 2002년생 신예다. [뉴시스]

    한국이 정체된 사이 미국은 베트남계 보트피플 3세 릴리아 부를 비롯해 여러 젊은 선수를 앞세워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LPGA 투어에서 첫 우승을 경험한 선수는 총 10명이다. 이 중 미국 선수는 부를 포함해 로즈 장(미즈호 아메리카스 오픈), 메건 캉(CPKC 위민스 오픈) 등 6명이나 된다. 미국뿐 아니라 태국, 중국과 함께 잉글랜드, 프랑스 등 유럽까지 그동안 LPGA 무대에서 변방에 머물렀던 나라들이 새 얼굴을 앞세워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9월 12일 발표된 세계랭킹에서 1위로 올라선 선수는 인뤄닝(중국)이다. 투어 2년 차로 올 시즌 2승을 거두며 펑샨샨 이후 중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월드 넘버 1’이 된 인뤄닝은 2002년생 신예다. 한국 막내인 유해란(2001년생)보다 어리다.

    지난해에도 LPGA 투어 32개 대회에서 생애 첫 우승을 거둔 선수는 제니퍼 컵초(미국), 아타야 티띠꾼(태국) 등 11명이나 됐다. 2년간 한국 선수 이름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세대교체 실패로 LPGA 투어에서 지배력을 상실한 한국은 언제쯤 다시 위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좀처럼 반등 계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냉정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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