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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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의 심리적 충격 해소엔 ‘역지사지’ 대화와 시간이 약 [‘보수 참패’, 그 후]

  • 임우영 건양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입력2020-04-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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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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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대 총선은 여권의 압도적 승리와 야권의 일방적 패배로 끝나서인지, 선거 후유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많다고 한다. 그나마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 이들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표현하지 못한 채 속만 태우는 ‘샤이 보수’도 많기 때문이다. 

    선거 때마다 부모와 자식 간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의견 충돌을 빚는 것은 이제 한두 해의 문제가 아니다. 심지어 명절에 오랜만에 모인 일가친척끼리 서로 얼굴을 붉히지 않도록 정치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암묵적 룰이 됐다는 집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르신 중에는 “민주당 찍은 자녀와는 얼굴도 보기 싫다”고 말할 정도로 속상함과 분노를 호소하며 급기야 수면장애를 앓는 이도 있다.

    ‘선거 완패’ 충격에 따른 감정 반응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이는 전형적으로 ‘선거 완패’라는 심리적 충격을 수용하지 못한 모습이다. 정신의학적으로 스트레스나 그에 따른 심리적 트라우마가 발생했을 때 나타나는 감정 반응이다. 

    이번 총선 결과로 심리적 충격을 심하게 받은 이들도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이다. 하지만 본인의 바람이 이번 총선에서 발현되지 못해 좌절하고 화가 났다. 동시에 자신의 뜻이 꺾인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에 따른 상실감으로 우울, 불안, 화, 분노 같은 감정을 겪고 있다. 

    이들의 심리적 트라우마가 큰 이유를 살펴보자. 우선 선거 판세를 오판했을 수 있다. 당연히 자신이 지지하는 쪽이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한 상황에서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났을 때 느끼는 충격은 클 수밖에 없다. 필자는 얼마 전 빌 클린턴과 조지 부시, 두 전직 미국 대통령이 TV 토크쇼에 나와 대담하는 것을 봤다. 서로 다른 당 출신인 전직 대통령들이 대중 앞에서 웃으며 대화하는 것이 우리 정치문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생경하기도, 부럽기도 했다. 그중 빌 클린턴의 다음 말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현재 우리 미국 사회는 진영이 양 극단으로 나뉘어 다른 진영 사람과는 소통하거나 대화할 기회조차 줄어드는 게 가장 큰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도 정치 성향이 비슷한 사람끼리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소통하고, 채팅하며, 유튜브 영상을 공유했다. 다른 진영의 얘기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들을 기회가 없었다. 특히 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로 온라인 소통에 더더욱 의지하다 보니 온라인 소통이 마치 유일한 안식처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유튜브 채널은 조회수 상승과 구독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시청자가 듣고자 하는 말만 하는 경향이 있다. 듣기 좋은 말이란 곧 ‘나의 무의식적 욕망과 판타지가 투영돼 이를 현실에서 발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언어를 통해 재확인해주는 것’이다. 이는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하려는 대중의 경향을 자극해 실제 현실과 괴리를 생성한다. 의도를 내포한 한쪽의 일방적인 정보만 접하는 상황이 계속 반복된다면 우리의 마음은 ‘현실세계(real world)’보다 내 마음속 ‘정신적 세계(psychic world)’에 존재하는 것만이 사실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은 ‘부정(denial)’이라는 심리적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통해 의식 저편으로 보내버린다. 이러한 방어기제는 그다지 성숙한 것이 아니어서, 냉엄한 현실과 마주하게 되면 곧바로 심리적 트라우마를 유발한다.

    ‘내가 틀렸을 수 있다’는 용기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에 출연한 미래통합당 민경욱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가로세로연구소 유튜브 화면 캡처]

    유튜브 채널 ‘가로세로연구소’에 출연한 미래통합당 민경욱 의원(오른쪽에서 두 번째). [가로세로연구소 유튜브 화면 캡처]

    트라우마 이후에 생긴 혼란스러운 생각과 감정은 마음속 갈등을 처리하기 위한 ‘타협 형성(compromise formation)’의 산물이기도 한데, 이때도 심리적 방어기제가 작동한다. 가령 총선 이후 보수 유튜버 사이에서 불거진 사전투표 관련 부정선거 의혹은 ‘투사(projection)’의 방어기제에 해당한다. 이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일부 진보 팟캐스트가 주장한 선거 조작 음모와 맥락을 같이한다. 현실을 부정과 동시에 심리적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킨 원인이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외부에만 있다고 여기고 싶어 하는 마음이 투사된 것이다. 

    이 또한 성숙한 대처가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숙한 사람도 완전하지는 않기에, 내 탓도 하지만 남 탓도 하고 싶은 ‘양가감정(ambivalence)’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다만 그 심리적 균형(psychic balance)이 심각하게 깨지면 외부에 대한 분노 감정이 충동적 행동으로 변모해 현실에서 문제가 되기도 하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감정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유리병 속 흙탕물의 부유물이 바닥에 침전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듯, 사람도 어지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데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유리병을 흔들면 다시 부유물이 올라와 뿌연 상태가 지속된다. 차분하게 돌아보고 정리할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와 함께 반성과 성찰의 시간 또한 필요하다. 이때 요구되는 것은 ‘내가 믿었던 것 가운데 틀린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다. 

    화나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은 오래 담아두면 화병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감정은 휘발시켜야 하는데 술이나 약물, 말초적 쾌락으로 해소하는 것은 좋지 않다. 감정을 잠시 잊게 하는 마취 효과만 주기 때문이다. 등산 같은 신체적 운동과 취미 생활 등 건전한 방법으로 묵힌 감정을 휘발시키길 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조절되지 않고 불면 혹은 신체 증상이 지속된다면 전문가를 찾아 진료, 상담받을 것을 추천한다. 

    무엇보다 가장 필요한 것은 가족 및 주위 사람들과 소통하고,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지지하는 일이다. 나와 뜻이 맞는 사람과 소통하는 것은 쉽다. 그렇지 않은 사람과 소통하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한데, 그 노력이 바로 공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상대 진영을 불신하는 것을 넘어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어 안타깝다. 심리적 방어기제 가운데 ‘분리(splitting)’라는 것이 있다. 어떤 대상을 절대적으로 선한 것(good)과 절대적으로 나쁜 것(bad)으로 바라보는 성향을 말한다. 이렇게 한쪽 면만 보고 다른 쪽은 전혀 보지 않는 것은 두 가지 상반된 부분이 동시에 존립한다는 점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심리적 통합(integration)을 이루지 못한 미성숙한 모습이다. 내가 믿는 것만 무조건 옳고 상대방은 무조건 틀리다는, ‘분리’에서 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자신이 믿는 것만 진리라고 말하는 사람과는 대화나 소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승리의 세대’가 가져야 할 책임

    가족 구성원에게는 이러한 공감과 소통이 더욱 필요하다. 공감하고 소통하고자 노력할 책임은 비단 어르신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녀들은 부모 세대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눠야 한다. 이번 총선에서 자녀 세대가 지지하는 정당이 승리를 거뒀다면, 그렇지 못해 낙심한 부모 세대의 마음을 자녀 세대가 응당 헤아려야 한다. 부모 세대도 4·15 총선을 젊은 세대를 이해해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오늘날 젊은이는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번 총선을 계기로 이러한 젊은 세대의 무력감을 이해하고 공감했으면 좋겠다. 

    “얘기를 들어보니 ◯◯ 입장에서는 그런 생각이 충분히 들 수 있겠다”는 말이 몹시도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 가정과 사회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양극으로 치닫기만 하는 감정적 사투가 줄어들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사회적 현상을 좀 더 이성적인 태도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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