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102

2017.08.23

사회

도둑맞은 불법체류 싱글맘이 도망치려 한 까닭은?

베트남 출신 여성, 이삿짐 도난에도 신고하면 추방될까 봐 주저 주민 배려와 ‘인권 경찰’ 신속한 처리로 짐 되찾고 ‘엉엉’

  • 배수강 기자 bsk@donga.com

    입력2017-08-21 15: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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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진경찰서 중곡3파출소 이동수(43) 경위는 며칠 전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파출소로 돌아오던 중 누군가 등을 ‘콕콕’ 찌르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뒤를 돌아보자 동남아계 여성이 어눌한 한국말로 “경찰 선생님, 정말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딸애와 잘 살고 있어요” 하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그제야 여성을 알아본 이 경위는 그의 일상과 두 살배기 딸의 안부를 물으며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 경위와 ‘동남아 여성’의 만남은 3개월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5월 28일 오전 9시 중곡3파출소에 트레이닝 복장을 한 남성이 찾아와 “이사하려고 집 앞에 내놓은 짐이 사라졌다”며 도난 신고를 했다. 이 경위가 피해자 신분과 피해 물품을 묻자 그는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면서 종종걸음으로 파출소를 빠져나갔다. 30분이 흘렀을까. 이번엔 한 할머니가 “베트남 출신 애기 엄마가 딱한 일을 당했는데 경찰아저씨가 도와줘야겠다”며 112 신고를 했다. 불법체류자의 이삿짐 도난 사건이었다. 중곡3동은 서민동네로 가내수공업 공장이 많아 외국인 노동자가 꽤 거주한다. 이 경위는 앞서 온 남성도 도난 피해자가 불법체류자라 신고를 포기했다고 직감했다.  



    2세 딸 안고 “이삿짐이 없어졌어요”

    이 경위는 동료 최주호 순경과 순찰차를 타고 현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도난 사건을 신고한 할머니를 만나 함께 한 다세대빌라 골목에 도착했다. 현장에는 한 무리의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딸아이를 안은 채 발을 동동 구르는 한 여성을 위로하고 있었다. 조금 전 파출소로 신고하러 온 남성도 눈에 띄었다. ‘동남아 여성’은 경찰복을 입은 이 경위가 다가오자 딸을 안고 뒷걸음질 치며 도망가려 했다. 이 경위는 재빨리 여성을 골목 안쪽으로 데려가 안심시킨 뒤 자초지종을 물었다.

    사연은 이랬다. 이 여인은 베트남 출신 쩐뚜엉(34·가명) 씨로, 이날 중곡4동으로 이사하려고 오전 5시 반 무렵 딸아이의 옷과 신발, 기저귀, 가재도구 등을 비닐봉투에 담아 집 앞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30분가량 아이에게 밥을 먹인 뒤 나와 보니 이삿짐이 전부 사라져버린 것. 몇 해 전 한국에 들어온 쩐씨는 경기 포천시 한 공장에서 일했다. 그때 만난 한국 남자와 사이에서 딸을 낳은 미혼모, ‘싱글맘’이었다. 딸은 아빠 성을 따 ‘안◯◯’로 불렀다. 중곡동으로 이사 온 뒤 봉제공장에 다니며 악착같이 딸아이를 키웠다. 쩐씨는 평소 인사성이 밝았고, 주민들은 이국땅에서 홀로 갓난아기를 키우는 그를 안쓰럽게 여겨 관심과 온정의 손길을 건넸다. 중곡3동에 사는 한 주민의 말에서 애정이 묻어난다.





    불법체류자 통보의무 면제제도

    “이곳 빌라촌은 할머니가 많아 매일 삼삼오오 골목길 앞에 둘러앉아 대화하는 게 낙이다. 외국에서 온 애기 엄마와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이사 와 꼬박꼬박 인사하니 모두 딸처럼, 손녀처럼 귀여워했다. 할머니들이 기저귀나 과자를 사주기도 했다. 이사한다고 해 모두 서운해했는데 인근 중곡4동으로 가는 거라 ‘자주 볼 수 있겠다’며 안심했다.” 

    그런 주민들이 이른 아침부터 쩐씨가 딸아이를 안은 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이삿짐 도난 사실을 알게 됐다. 삼삼오오 모인 주민들은 ‘골목 반상회’를 열었고, 절도범을 잡아야 한다며 중곡3파출소에 신고했다.

    과일가게를 운영하는 한 주민은 “아이 신발도, 기저귀도 다 사라져 쩐뚜엉이 아이를 안고 이삿짐을 찾으려 골목 이곳저곳을 다녔다”며 “그가 불법체류자라 신고하면 자칫 강제추방이라도 될 것 같아 발만 동동 굴렀는데, 중곡3파출소장과 경찰들은 믿을 만하니 신고하자고 결정했다”며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사연을 접한 이 경위는 과거 경찰서 외사계 근무 시절 알게 된 ‘불법체류자 통보의무 면제제도’가 떠올랐다고 한다.

    “주민들은 쩐씨를 딱하게 여겨 ‘불법체류자지만 잡아가지 마라’며 여러 차례 부탁했고, 나도 이곳 주민인 만큼 최대한 빨리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다. 급히 광진경찰서에 절도 피해를 당한 불법체류자가 구제 대상인지 문의해 맞다는 걸 확인했다.”

    원래 공무원은 출입국관리법에 따라 불법체류자를 발견하면 그 사실을 지역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통보해야 한다. 이 경위가 떠올린 통보의무 면제제도는 불법체류자가 범죄를 당하고도 강제 추방 가능성 때문에 신고하지 못하는 인권침해 사례를 막고자 범죄 피해자에 한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통보하는 것을 면제해주는 제도다.

    이 경위는 쩐씨에게 이 제도를 차분히 설명해 안심시킨 뒤에야 구체적인 피해 진술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포천공장에서 알고 지낸 전 직장동료의 1t 트럭을 이용해 5월 28일 이사하기로 하고 오전 5시 반 무렵 가벼운 짐들을 먼저 집 앞에 내놓았는데 그게 감쪽같이 없어진 것. 



    주민들과 함께 잡은 절도범

    사건 현장을 둘러본 이 경위는 맞은편 신축빌라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된 것을 확인하고는 집주인에게 연락해 CCTV 녹화 영상을 입수했다. 화면에는 오전 5시 반쯤 파란색 체크무늬 셔츠에 ‘선캡 모자’를 눌러 쓴 할머니가 옷가지 등이 담긴 이삿짐 봉투 2개를 들고 가더니, 잠시 뒤 손수레를 끌고 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머지 물건을 싣고 가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절도범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다. 영상을 함께 본 한 주민이 “인근 ◯◯시장 주변에 사는 사람 같다. 시장 주변에서 종종 본 거 같다”고 말했고, 이를 바탕으로 이 경위는 현장 순찰에 나섰다.

    보통 옷가지는 고물상에 파는 만큼 이 경위는 관내 고물상 3곳을 찾았지만, 마침 일요일이라 문을 연 곳이 없었다. 이 경위는 ◯◯시장 주변을 꼼꼼히 순찰하던 중 한 집 마당에 CCTV 영상에 담긴 것과 똑같은 손수레가 놓인 걸 발견하고는 집에 들어가 피의자(73)를 검거했다. 당시 마당에는 고물 여러 개가 뒤섞여 있었다. 이 경위의 연락을 받고 현장을 찾은 쩐씨는 고물 속에서 잔뜩 때가 묻은 아이의 옷과 신발을 찾아내 안고는 흐느껴 울었다. 아이도 울고, 지켜보던 주민들도 함께 울었다. 

    이 경위는 “보통 옷은 무게를 달아 고물상에 팔다 보니 아이의 옷이 여러 옷가지와 뒤섞여 있었고, 새 기저귀는 고스란히 비닐에 담겨 있었다. 나도 여덟 살 아들을 키우는 아빠이다 보니 피해자가 우는 모습에 눈물이 나더라. 피의자는 멀쩡한 옷과 신발이 집 앞에 놓인 것을 보고 ‘로또 맞은 거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지만, CCTV 영상과 피해자, 피의자의 진술을 종합해 절도혐의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중곡3동에서 발생한 ‘베트남 싱글맘 이삿짐 도난 사건’은 결국 주민들의 온정과 평소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아온 파출소 경찰관의 신속한 처리 덕에 사건 접수 2시간 만에 해결될 수 있었다. 현재 쩐씨는 예정대로 중곡4동으로 이사했으며, 조만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자진 신고해 선처받을 것으로 전해졌다.

    정의석 중곡3파출소장은 평소 마을 경로잔치에서 색소폰 공연을 하며 교통사고 예방 활동을 펴 주민들에게 ‘친근한 소장님’으로 알려졌고, 경찰관들은 매일 관내 초교에서 교통안전 지도 캠페인(굿모닝 해피스쿨)을 벌여 지역 주민들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었다.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관내 초교 교사들이 중곡3파출소 경찰관들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준 사연이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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