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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영화觀

내가 나를 잊어도, 나는 나일까

리처드 글래처 감독의 ‘스틸 앨리스’

내가 나를 잊어도, 나는 나일까

내가 나를 잊어도, 나는 나일까
프랑스 철학자 레지스 드브레는 ‘죽음은 곧 부재’라고 했다. 죽는 것은 변하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다. 따뜻한 온도를 지녔던 몸이 차가워지고 말랑말랑했던 피부가 딱딱하게 굳는다. 이내 참기 힘든 냄새를 풍기며 천천히 부패한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죽게 된 사람은 과연 우리가 알고 가까이 지낸 바로 그 사람이 맞을까. 체취도, 온도도, 생김새도 달라져버린 ‘그것’이 정말 ‘그’일까.

죽음을 말할 때 우리는 대개 이런 감각적 변화를 먼저 떠올린다. 사라짐이라는 단어도 물질에 가 닿는다. 하지만 또 다른 죽음도 있다. 육체는 이곳에 머물지만 정신은 사라진 상태다. 외모와 체온, 체취는 그대로인데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면, 과연 그 사람은 여전히 그일 수 있을까. 영혼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는 죽음, 영화 ‘스틸 앨리스’는 바로 그런 죽음에 대한 영화다.

그동안 죽음에 대한 영화는 주로 남은 자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다뤄왔다. 치매,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영화도 대부분 그랬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장수상회’ 같은 영화를 봐도 그렇다. 사랑했던 사람이 점점 다른 모습을 보이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황망한 상실 앞에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막상 기억을 잃어가는 당사자, 환자의 마음은 어떨까. 여전히 두 발로 세상을 딛고 살아가고 있지만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할 수 없는 환자의 마음 말이다.

내가 나를 잊어도, 나는 나일까
우리의 삶은 어떤 학교를 나오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지 등에 대한 수많은 기억과 기록으로 채워져 있다. 이 같은 삶의 행적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여러 기록이 없다면 그것을 우리라고 할 수 있을까. ‘스틸 앨리스’에서 주인공 앨리스는 알츠하이머병에 걸리면서 바로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 자신에 대해 잊어버림으로써 앨리스로 살아온 인생 자체를 잃게 된 것이다.

병을 앓기 전 그가 언어학 분야 석학이었다는 점도 비극성을 더한다. 세상 누구보다 민감하게 언어와 기억을 다뤘던 앨리스는 그 뛰어난 재능을 가장 먼저 잃는다. 겨우 쉰 살밖에 안 됐는데 말이다. 문제는 기억이 사라지고 언어 감각을 잃어도 그는 여전히 실존한다는 점이다. 바지에 실례를 하고, 딸을 알아보지 못해도 그가 앨리스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스틸 앨리스’가 앨리스의 병을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 자신을 잃어가는 둔중한 통증을 줄리앤 무어의 연기를 통해 설득한다. 루게릭병으로 세상을 떠난 감독의 유작인 만큼 죽음과 병에 대한 고찰은 자못 아프다.

정신은 여전하지만 근육을 모두 상실한 감독이, 몸은 여전하지만 기억을 모두 잃어가는 여인을 그렸다. 이 아이러니 속에서 영화는 삶 자체를 질문으로 이끈다. 쉽게 답할 수 없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어려운 질문, 바로 그 질문들 말이다.



주간동아 2015.04.27 985호 (p80~80)

  • 강유정 영화평론가 · 강남대 교수 noxka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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