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2

2015.04.06

“소비자 감동시켜 물건 잘 파는 게 디자인”

김봉진 ‘배달의민족’ 서비스 우아한형제들 대표

  • 최충엽 전 벤처기업협회 부회장 albertseewhy@gmail.com 정호재 동아일보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5-04-06 11:2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소비자 감동시켜 물건 잘 파는 게 디자인”
    배달요리 주문 앱(애플리케이션)의 대명사로 통하는 ‘배달의민족’을 서비스하는 우아한형제들은 본업인 모바일 사업보다 남다른 ‘디자인 감각’으로 더 큰 관심을 받는 회사다. 전문가 사이에선 디자인 경영을 전면에 내세운 모 신용카드사의 실질적인 라이벌로까지 회자될 정도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무장한 다양한 매체 광고뿐 아니라 혁신이 전무했던 외식업계의 변화를 선도하며 현재는 1조 원에 가까운 ‘배달앱’ 시장의 개척자이자 스타트업계가 낳은 최고 스타로 손꼽힌다.

    디자인을 단순히 외형적 아름다움이 아닌 ‘사고하는 방식’이라고 정의하는 김봉진(39 · 사진) 우아한형제들 대표의 이력은 평범함과 거리가 멀다. IT(정보기술)업계에서 쉽게 마주치는 유학파나 대기업 출신이 아닌, 전문대를 졸업한 웹디자이너 출신이다. 파르라니 짧은 머리에 컴퓨터 마우스 하나로 업계의 고정관념을 파괴한 그가 가진 남다른 내공의 근원을 살펴봤다.

    “내신 14등급, 미술학원도 안 받아줘”

    “어릴 적부터 디자인을 좋아해 예술중·고교에 가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됐어요.”

    1995년 대학에 입학한 그는 암기 중심 교육이 절정에 달하던 때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 학교 공부에 좌절한 그는 반항심으로 공업고를 택했다. 고교 시절 내내 흥미로운 제품을 찾아 서울 남대문시장을 쏘다니고 아이디어를 탐구하는 등 사실상 학교 공부에서 손을 놓았다. 고3이 코앞에 다가오자 걱정이 된 부모는 그에게 입시미술학원을 권했다. 서울 홍대 부근 미술학원을 모두 찾아가 면접을 봤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내신 14등급에 미술학원이란 데를 처음 온 공고 출신은 아예 받아주지 않더군요. 돌이켜보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당시 미술입시도 일종의 암기였거든요.”

    미술계 입장 불가 통보를 받은 그가 택한 길은 웹디자인이었다. 대학 공부가 어렵다면 실무를 익히자는 생각으로 고3 내내 웹디자인 공부에 몰두했다. 그의 남다른 감각과 열정에 탄복한 학원 강사는 그에게 전문대 입시를 권했다. 그것도 콕 집어 서울예술전문대(1998년 서울예술대로 변경)를 추천했다.

    “대학수학능력시험과 내신 점수는 최소한만 적용하고 실기 능력을 우선시한다고 했어요. 실제 당시 여러 곳의 전문대에 원서를 냈는데 거짓말처럼 서울예술전문대 딱 한 곳만 합격했습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 ‘물을 만난 고기’처럼 자신의 끼와 능력을 발휘했다. 4학기 내내 장학금을 받고 다닐 만큼 제도권 디자인 교육에 대한 갈증을 단박에 풀어버린 것.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기업들은 당장 매출에 기여가 없다는 이유로 디자이너들을 해고하기 시작했고, 그 여파로 크고 작은 디자인 에이전시(대행업체)가 생겼다. 이제 학벌로 디자인하는 시대가 아닌 실무 능력으로 평가받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것도 인터넷과 웹이라는 새로운 물결과 함께. 그는 순식간에 준비된 인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에게 디자인이란 소비자를 감동시켜 물건을 더 사게 만드는 방법이었다. 그러려면 소비자의 생각과 태도를 바꿔야 한다. 웹디자인에서 시작된 인터넷산업에 대한 관심은 사회생활과 더불어 진화를 거듭한다. 전세 대출금을 갚고자 잠시 월급을 많이 주는 네이버에서 일하던 시절 온라인 비즈니스에 눈을 떴다. 그가 주목한 것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지만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음식 배달 전단지였다. 그의 사업 아이디어와 새롭게 불어닥친 스타트업 창업 열풍이 딱 맞아떨어졌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김 대표는 논리적 사고보다 디자이너로서의 직관과 감성에 더 의존한다. 엄숙주의를 거부하고 직설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는 전략이다. 사람들은 이런 김 대표의 경영 방식에 열광한다.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광고 및 디자인, ‘배달의민족’의 톡톡 튀는 폰트에는 소위 공부 잘하고 명문대 나온 범생이 머리에서는 쉽게 나올 수 없는 신선함과 재미와 아름다움이 있다.

    “제가 영어를 잘했다면 이처럼 튀는 마케팅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봐요.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아 우리 회사에서 제가 영어를 가장 못해요. 한글의 언어적 유희를 카피로 뽑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제게 고정관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 대표는 직원들을 신나게 하고, 동기부여를 잘하며,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등 리더로서 3박자를 갖췄다. 그의 손에서는 책이 떠나지 않고, 머리에서는 질문이 끊이지 않는다. 많은 경영 컨설턴트가 그에게 접근해 컨설팅을 시도했지만 그의 질문 공세를 버티지 못했다. 예를 들어 회사 규모가 커질수록 직원들에 대한 엄격한 평가와 그에 따른 보상이 중요하다고 조언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저는 보통 사람이 모여 비범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회사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상은 상대방을 쥐어짜고 그 대가를 치르는 것 아닌가요? 저는 직원들에게 행복한 회사, 일하고 싶은 회사를 만들어주고 싶습니다. 보상이 아닌 포상을 해주고 싶어요.”

    처음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사무실을 얻은 것도 직원들이 공원이 있는 한적한 곳을 원했기 때문이다.

    ‘배달의민족’이 알려지면서 회사 비전과 목표에 대해 묻는 이가 많아졌다. 그는 회사 구성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장기간 논의한 끝에 비전과 목표를 ‘국내 50대 기업’으로 정했다. 우리나라에 재벌 계열사 빼고 50대 기업에 속한 회사가 거의 없다는 현실에서 출발한 것이다. 또한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성공하기를 원하는 신세대다운 패기도 보여준다.

    김 대표는 스스로 최고경영자(CEO) 대신 디자인경영자(DEO)라고 말한다. 고정관념을 깨고 새롭게 바뀐 기준으로 기업 문화와 제도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책임자라는 개념이다.

    ‘배달의민족’은 최근 배달원의 안전을 위한 ‘민트라이더’ 캠페인을 실시했다. 음식 배달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전문적인 오토바이 안전 운전 교육과 헬멧을 제공하는 캠페인이다. 여기서도 그의 아이디어가 번뜩인다. 오토바이 헬멧 안에 가족사진을 부착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 것. 운전대를 잡기 전 가족 얼굴을 한 번 더 보라는 것은 제품디자인을 넘어선 사회적 디자인이다.

    “비효율적이고 권위적이지 않아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작은 회사니까 가능한 게 아니라 직원이 1000명, 2000명 넘더라도 현재 우리가 가진 기업문화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사회에 보여드리고 싶어요.”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