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2

2015.01.19

‘백제의 미소’는 솔바람을 타고

마애삼존불, 보원사지, 개심사, 해미읍성…역사의 길을 걷다

  • 양영훈 여행작가 travelmaker@naver.com

    입력2015-01-19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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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미소’는 솔바람을 타고

    흔히 ‘백제의 미소’라 일컫는 서산 마애삼존불.

    올겨울에도 어김없이 충남 서산 땅을 밟았다. 아니, ‘강댕이골’의 서산마애삼존불을 다시 찾았다. 한 해에도 몇 번씩 들락거리는 길이라 전혀 낯설지 않았다. 서산IC에서 강댕이골까지 짧은 길에도 ‘비산비야(非山非野)’로 함축되는 내포(內浦) 특유의 풍경이 차창 밖으로 펼쳐진다. 산도 아니고, 그렇다고 들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구릉의 연속이다. 그래서 강원도의 첩첩산중처럼 답답하지 않고, 전라도의 광활한 평야처럼 밋밋하지도 않다. 언제 봐도 편안하고 아늑한 풍경이다.

    강댕이골은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계곡의 속칭이다. 초입은 관문처럼 좁다. 그러나 상류 쪽으로 오를수록 계곡 양옆 평지가 점차 넓어진다. 마치 신세계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다. 이 신세계의 들머리에 서산마애삼존불(국보 제84호)이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의 정식 명칭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인암(印巖·도장바위)이라 부르는 바위에 새긴 돌부처다. 2.8m 높이의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돼 있다.

    백제 최고 유적을 따라

    본존불인 여래입상은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운 낯빛을 띤다. 두툼한 얼굴에 반원형의 눈썹, 살구씨 모양의 눈, 얕고 넓은 코, 미소를 머금은 입 등이 후덕한 이웃 아저씨 같다. 특히 꾸밈없이 밝고 너그러워 보이는 미소가 일품이다. 이 불상 앞에 서면 ‘백제의 미소’라는 수식어가 빠지지 않는 까닭을 누구라도 저절로 알 수 있다.

    두 협시불의 표정과 자세도 본존불 못지않게 인간적이다. 머리에 관을 쓴 오른쪽 보살입상 역시 약간 살이 오른 이웃집 아주머니 같은 얼굴이다. 만면에 미소가 가득해 보는 사람마다 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본존불 왼쪽에 있는 반가상도 웃음 띤 얼굴이다. 얼굴을 약간 치켜들고 천진하게 웃는다. 손가락으로 볼우물을 파는 듯한 모습이 마치 누구를 약 올리는 것 같다. 이곳의 세 불상에서는 사람을 괜히 주눅 들게 하는 권위나 위엄 따위를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오늘날의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백제인의 따뜻한 낯빛과 심성이 고스란히 담겼다.



    서산마애삼존불 입구에서 1.4km가량 더 올라가면 의외로 넓은 평지에 이른다. 한때 1000여 명의 승려가 머무르던 보원사가 바로 이곳에 자리 잡았다. 통일신라 때 화엄 10찰 중 하나로 손꼽혔던 보원사는 ‘강당사’라고도 불렸다. 큰스님들이 강연을 잘하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강댕이골이라는 지명도 거기서 비롯됐다. 고려 초기에는 국사(國師)까지 배출할 정도로 번창하다 400여 년 전 갑자기 폐허로 변했다.

    ‘백제의 미소’는 솔바람을 타고

    보원사지의 당간지주와 오층석탑(위). 참나무숲의 자연스러운 멋이 돋보이는 용현자연휴양림 캠핑장.

    근래 대규모 발굴조사가 마무리되긴 했지만 보원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창건 연대와 연혁을 알기 어렵다. 오늘날 넓고도 휑한 보원사지(사적 제316호)에는 석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탑(보물 제105호)과 법인국사탑비(보물 제106호) 등이 남아 있어 전성기 때의 영화를 짐작게 한다.

    보원사지에서 다시 계곡 상류 쪽으로 거슬러 오르면 점차 평지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보원사지에서 가장 멀찍했던 찻길과 산자락이 점차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용현자연휴양림 입구부터 맞닿게 된다. 휴양림은 가야산(678m) 정상에서 흘러내려 상왕산, 수정봉, 옥양봉 등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에 안겼다. 길은 끊이지 않고 나직한 산자락 사이로 이어진다.

    자동차는 통행할 수 없지만, 두 발로 걷는 길은 퉁퉁고개와 으름재를 거쳐 예산 땅으로 넘어간다. 바로 이 길이 아득한 옛날에 백제와 중국 당나라를 잇는 교통로였다. 태안반도나 당진 땅의 어느 포구를 통해 유입된 중국 불교문화가 백제 수도 부여로 전해지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쳤다고 한다. 서산마애삼존불이라는 백제 최고 문화유적이 이곳에 남은 것도 그런 지정학적 위치 덕택이었다.

    용현자연휴양림은 동계 캠핑이 가능한 몇 안 되는 국립자연휴양림이다. 38곳의 국립자연휴양림 가운데 서산 용현, 가평 유명산, 서천 희리산, 봉화 청옥산 등 4곳만 겨울철에도 캠핑장을 개방한다. 4곳 중에서도 용현자연휴양림을 선택한 것은 순전히 서산마애삼존불을 보기 위해서였다. 드나들 때마다 손쉽게 ‘백제의 미소’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은 이 휴양림이 가진 어떠한 덕목보다도 매력적이다.

    ‘백제의 미소길’, 서산 아라메길의 ‘솔바람길’ 등 명품 걷기 코스를 이용하기가 아주 쉽다는 이점도 빼놓을 수 없다. 백제의 미소길을 따라 6.7km쯤 걸어가면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묘가 있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도착하고, 솔바람길을 타고 3.4km를 가면 개심사에 당도한다. 특히 개심사, 보원사지, 서산마애삼존불 등을 두루 거쳐 가는 솔바람길은 꼭 한 번쯤 걸어볼 만하다.

    ‘백제의 미소’는 솔바람을 타고

    개심사와 보원사지 사이 상왕산 등성이를 따라가는 솔바람길의 설경(왼쪽). 용현자연휴양림의 숲을 가로지르는 ‘백제의 미소길’.

    포행(布行)의 길

    솔바람길은 개심사나 인근 보현선원 승려들이 즐겨 걷는 포행의 길이기도 하다. 포행은 가볍게 걷는다 해서 ‘경행(輕行)’, 걸으면서 참선한다 해서 ‘행선(行禪)’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솔바람길은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걸어야 그 길의 독특한 느낌과 정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다. 이 길은 일반적으로 개심사에서 보원사지 쪽으로 넘어가거나, 그 반대방향으로 걷는 편도 코스로 이용된다.

    솔바람길은 순하다.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된비알이 없다. 승려의 포행 길답게 시종 고즈넉해서 사색을 즐기기에도 좋다. 용현자연휴양림에서 출발할 경우에는 보원사지, 개심사 입구(쉼터), 전망대 입구 삼거리 등을 거쳐 다시 휴양림으로 돌아오는 순환 코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5.8km쯤 되는 이 순환 코스를 일주하는 데는 2시간 30분쯤 걸린다. 내친 김에 개심사까지 다녀오려면 약 800m의 거리가 더해진다.

    백제 의자왕 때 혜감국사가 창건했다는 개심사는 소박하고도 단정한 멋이 돋보인다. 허세도 없고, 호사스럽지 않은 산사다. 초입에 자리한 소나무숲과 절집을 둘러싼 활엽수림도 운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5월 초 만개하는 청벚꽃과 한여름에 몽실몽실 피어나는 배롱나무꽃이 인상적인 곳으로 기억한다. 몇 안 되는 건물에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겸손함이 여기저기 배어 있다. 특히 요사채인 심검당의 기둥을 눈여겨볼 만하다. 제멋대로 휘어지고 구부러진 나무의 자연스러운 멋을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삼았다.

    ‘백제의 미소’는 솔바람을 타고

    소박하고도 정갈한 분위기의 개심사 심검당과 대웅보전(왼쪽). 해미읍성 내 울창한 솔숲.

    조선 천주교의 한 서린 곳

    솔바람길의 개심사 입구부터 개심사까지 산길을 오르내리기가 부담스럽다면, 개심사는 귀로에 따로 들러도 된다. 개심사에서 약 8km 거리에는 지난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했던 해미읍성이 있다. 높이 4m, 둘레 2km의 이 읍성은 조선 태종 때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해 성종 때인 1491년 완공됐다. 그 뒤로 해미현의 현청과 충청병마절도사의 병영(兵營·사령부)이 이곳에 자리 잡았다. 이순신 장군도 한때 이곳에서 잠시 군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해미읍성은 오늘날의 아름다운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 말기인 1866년부터 1871년까지 계속된 ‘병인박해’ 당시 수많은 천주교인이 해미읍성과 인근 해미천 여숫골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에 앞서 독일인 오페르트와 조선인 천주교도가 결탁해 가야산 기슭의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던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분노한 흥선대원군은 양이(洋夷)와 내통했다는 죄목을 내세워 내포 땅의 천주교인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명했다.

    해미읍성으로 끌려온 수천 명은 옥사 옆의 호야(회화)나무에 효수되거나, 해미천 냇가에 산 채로 매장되거나, 뒷짐결박을 지은 채로 ‘진둠벙(죄인둠벙)’에 처박히는 등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됐다. 당시 교인들을 매달았던 호야나무는 아직도 그 자리에 홀로 서 있다. 그런 내막을 알게 된 여행자들은 무거운 돌덩이 하나씩을 가슴에 담고 성문을 나서게 마련이다.

    ‘백제의 미소’는 솔바람을 타고

    흰 눈으로 뒤덮인 해미읍성의 겨울.

    여행정보

    ● 용현자연휴양림 캠핑 안내

    용현자연휴양림(041-664-1971)에는 총 25개 캠핑사이트가 있다. 그중 20개는 나무데크고, 나머지 5개는 우리나라 유일의 황토온열데크다. 가로세로 길이가 각각 310cm인 황토데크 바닥에 열선이 깔려 있어 따뜻한 잠자리를 만들어준다. 몇 개 안 되는 데다 워낙 인기가 많아 예약하기 쉽지 않다. 반면 참나무숲에 듬성듬성 자리 잡은 나무데크는 주말에도 빈자리가 적잖다. 전기를 사용할 수 없고, 거실형의 대형 텐트를 설치하기가 어려운 탓이다. 데크 크기는 360×360cm로 2~3인용 알파인텐트를 이용한 미니멀캠핑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국립자연휴양림관리소 홈페이지(www.huyang.go.kr)를 통한 인터넷 예약만 가능하다.

    ‘백제의 미소’는 솔바람을 타고

    개심사 입구 고목나무가든의 더덕구이 산채정식.

    ● 숙식

    서산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 주변에 황토펜션(041-662-0129), 이슬펜션(041-664-6336), 숲속의펜션(010-3737-9290) 등이 있다. 서산마애삼존불 입구의 용현집(041-663-4090)은 잘게 간 미꾸라지와 밥, 소면을 함께 넣고 얼큰하게 끓여낸 어죽이 맛있는 집이다. 개심사 입구의 고목나무가든(041-688-7787)은 직접 채취한 산나물로 맛깔스럽고 푸짐한 산채정식을 차려준다. 해미읍성 앞의 시장순대(순대국밥/ 041-688-4370), 읍성뚝배기(곰탕/ 041-688-2101), 영성각(중화요리/ 041-688-2047) 등은 외지인도 일부러 찾는 맛집이다.

    ●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산IC→운산 운곡삼거리(647번 지방도)→숙용벌교차로(618번 지방도, 고풍저수지 방면)→고풍저수지 앞 삼거리(우회전)→서산마애삼존불 입구→보원사지→용현자연휴양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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