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태양이 강원 양양군 하조대 백년송 저편, 아득한 수평선 위로 불끈 치솟았다.
2015년 을미년 한 해가 밝았다. 하지만 새해맞이가 마냥 설레지만은 않는 이유는 뭘까. 지난 한 해 쌓인 후회와 아쉬움을 지는 해와 함께 못 다 삭여서일까. 갑자기 바라보고만 있어도 가슴이 뻥 뚫리는 동해가 그리워졌다. 오래도록 돌덩이처럼 묵직하게 가슴을 짓누르는 이 먹먹함부터 날려버리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닷가 언저리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 묵으며 파도와 바람이 건네는 위로의 말을 듣고 싶었다. 망망한 동해 수평선 위로 치솟는 태양의 힘찬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어느새 내 몸은 유체 이탈하듯 영서 내륙을 가로지르고 눈 내리는 한계령을 넘어 양양 바닷가에 당도해 있었다. 강원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 바닷가에는 울창한 솔숲이 형성돼 있다. ‘송전(松田)’이란 지명도 우리말 ‘솔밭’의 한자어다. 무시로 불어오는 해풍과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오래전 방풍림으로 조성한 솔밭이 지금은 더없이 아름답고 아늑한 휴양지가 됐다.
‘물가에 위치한 솔밭’은 캠프장 으뜸
좋은 캠핑장이 갖춰야 할 덕목과 조건은 참으로 많다. 자연 여건뿐 아니라 법률 조건까지 두루 잘 갖춰야 명품 캠핑장으로 평가받는다. 개인적으로는 ‘물가에 위치한 솔밭’을 캠핑장의 여러 입지 조건 중 최고로 꼽는다.
물은 생명의 기원이다. 사람들도 엄마 배속의 물(양수)에서 열 달가량 성장한 끝에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래선지 몰라도 사람은 대부분 호수, 강, 바다 등 물과 가까이 있을 때 정서적으로 더 안정된다고 한다. 길도 물을 따라 난 길을 걸을 때 더 기분 좋고, 잠자리도 물과 가까우면 더 편안해진다.
소나무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친근하고도 유용한 나무다. 재목으로도 훌륭하지만, 은은한 솔향기는 어떤 향수보다 매력적으로 후각을 자극한다. 시각적인 즐거움도 빼놓을 수 없다. 도시 빌딩숲 사이에서 홀로 서 있는 소나무만 봐도 마음이 절로 밝아진다. 그러니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솔숲에서의 하룻밤은 5성급 호텔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운치 좋고 낭만적이다.
송전리 솔밭에는 솔밭가족캠프촌, 바다캠프, 양양오토캠핑장이 들어서 있다. 모두 해안도로를 사이에 두고 오산해수욕장과 300~400m쯤 떨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3곳 모두 자연 조건과 분위기뿐 아니라 전체 규모와 시설 수준이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가족이 가끔씩 찾는 솔밭가족캠프촌도 다른 2곳보다 딱히 나을 건 없어 보였다. 물론 다른 두 캠핑장이 솔밭가족캠프촌에 비해 안 좋아 보이는 점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마음과 발길은 늘 그곳으로 향했다.
드넓은 솔숲 캠핑장에 이미 대형 텐트 몇 동이 드문드문 설치돼 있다. 노루꼬리처럼 짧은 겨울 해가 지기 전 우리도 서둘러 텐트를 설치했다. 첫날은 캠핑장에서 유유자적하며 눈 구경이나 실컷 하기로 작정했다. 눈은 내리고 바람은 차가운데, 텐트 안은 더없이 푸근하고 따뜻했다. 텐트의 투명 우레탄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소나무의 기상과 자태는 역시 눈 속에서 더 도드라져 보인다.
솔밭가족캠프촌 솔숲에서 모닥불을 쬐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왼쪽). 영화 ‘고래사냥’ 촬영지였던 강원 양양군 남애항의 겨울 풍경.
멍하니 앉아 눈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저물었다. 저절로 몸서리가 처질 만큼 기온이 내려갔다. 소나무에 열기가 닿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두고 화롯대에 장작불을 피웠다. 여기저기 흩어졌던 가족도 자연스레 모닥불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따뜻한 불꽃이 피어오르는 화롯가에서 가족은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가득 피웠다. 숯불에 구운 고구마와 소시지를 안주 삼아 맥주 두어 캔을 마시자 모든 시름이 눈 녹듯 사라졌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우리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사람은 없을 성싶었다.
동해 바닷가를 찾은 김에 망망한 수평선 위로 해가 뜨는 광경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캠핑장에서 자동차로 약 20분 거리에 있는 하조대로 달려갔다. 동해안의 대표적인 일출 명소 중 하나인 낙산사가 약 7km 거리에 위치한다. 그런데도 굳이 하조대를 찾은 건 겨울철이 아니면 백년송 너머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떠오르는 광경을 감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철 하조대 해돋이는 숨 막힐 듯 장엄하고도 아름답다. 수평선 위로 솟아오르는 태양이 새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처럼 크고 또렷하다.
캠핑장으로 돌아와 아침식사와 짐 정리를 마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동해안 1박 2일 해돋이 캠핑의 둘째 날 일정은 강릉을 거쳐 귀경길에 오르는 것으로 계획했다. 양양 송정리 캠핑장에서 강릉 경포까지는 50km 내외다. 작심하고 달리면 1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가깝다. 그러니 조바심 내며 서두를 필요가 없다. 넓고 정신없는 고속도로나 7번 국도보다 왕복 2차선 해안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한결 여유롭다.
송전리와 이웃한 오산리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석기 유적 중 하나가 있다. 1977년부터 81년까지 6차례에 걸친 발굴작업 결과, 원형집터 14기를 비롯해 다양한 석기와 토기들이 발굴된 곳이다.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박물관’에는 당시 발굴한 각종 유물이 전시돼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 얼굴을 투박하게 빚은 인면상이 눈길을 끈다. 유물 외에도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실감 나게 재현한 디오라마도 있어 오가는 길에 잠시 들러볼 만하다.
양양과 강릉 사이 해안도로변에는 수산항, 동산항, 기사문항, 죽도항, 남애항, 주문진항, 사천항 등 크고 작은 어항이 숨겨져 있다. 눈 내리는 날 어항의 설경도 볼만하지만, 북풍한설 속에서도 치열한 삶을 이어가는 어민들 모습이 무엇보다 인상적이다. 게다가 운이 좋으면 방금 잡아온 대게나 횟감용 활어를 비교적 저렴하게 구매할 수도 있다.
폭설이 내리는 날 강원 강릉 선교장 활래정의 풍경(위). 백두 대간 산등성이 위 저녁노을이 경포호에도 내려앉았다.
죽도항을 뒤로하고 7번 국도를 따라 남애항으로 향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꽁꽁 얼어붙은 석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흔히 ‘매호’라고도 부르는 포매호다. 강릉 경포호나 속초 영랑호, 고성 송지호 같은 석호다. 호숫가에 갈대와 소나무가 무성해 사시사철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한때는 민물조개인 재첩이 적잖게 서식할 정도로 깨끗한 호수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이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때는 요즘 같은 겨울철이다. 어른들은 얼음에 구멍을 뚫어 빙어 낚시를 즐기고, 아이들은 앉은뱅이썰매를 타고 얼음을 지친다.
강릉 최대 어항인 주문진항부터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인 경포까지는 바다와 맞닿은 해안도로를 14km쯤 달린다. 커피 명가로 소문난 보헤미안(033-662-5365), 풍운아 허균(1569~1618)이 태어난 사천 교산, 강릉 바우길 5구간인 ‘바다호수길’, 5개의 달이 뜬다는 경포호, 우리나라 대표 양반가옥 중 하나인 강릉 선교장(중요민속문화재 제5호), 세계 최고의 에디슨 컬렉션을 자랑하는 참소리축음기·에디슨과학박물관(033-655-1130) 등이 모두 이 해안도로변이나 인근에 있다.
경포호는 해 뜨는 동해안에 위치한 호수인데도 이따금씩 환상적인 해질 녘 풍경을 보여준다. 겨울철새들이 한가로이 헤엄치는 경포호 서쪽에는 백두대간의 육중한 산봉우리들이 장성처럼 우뚝하다. 풍력발전기가 늘어선 백두대간 산등성이 위로 오렌지색 노을이 드리워지면, 경포호의 잔잔한 수면에도 똑같은 빛깔의 노을이 고스란히 내려앉는다. 흔치 않은 진풍경을 마주한 사람들은 저마다 신음 같은 탄성을 연발하게 마련이다.
여행정보
● 양양 해돋이 캠핑 안내
솔밭가족캠프촌(033-672-8782/ www.solbatcamp.com)은 새해 연휴가 끝나는 1월 첫 휴일까지만 문을 열 계획이라고 한다. 이웃한 바다캠프(033-672-3386/ www.badacamp.com)도 1월 8일까지만 예약이 가능하다. 양양오토캠핑장(033-672-3702/ www.camping.kr)은 1월 5일까지만 운영하고 그 후부터 3월 말까지 휴업할 예정이다. 새해 연휴 원하는 곳에서 캠핑하려면 서둘러 예약하는 것이 좋다. 3곳 모두 방갈로나 원룸 같은 숙소를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텐트가 없는 사람도 이용하기 좋다.
● 숙식
‘해성횟집’의 삼숙이탕.
송전리 캠핑장 근처 옛뜰(033-672-7009)과 송전메밀국수(033-672-3711)는 양양을 대표하는 맛집 가운데 하나다. 옛뜰은 직접 만든 손두부와 자연산 홍합을 넣어 끓인 섭죽이 맛있고, 송전메밀국수는 막국수뿐 아니라 초계탕, 손두부를 잘하는 집으로 소문났다. 강릉 선교장 내 가승(家乘) 음식점인 연(033-648-5307)에서는 집안 대대로 전해오는 음식을 한 상 푸짐하게 차려준다. 강릉시내 중앙시장 상가 건물에 위치한 해성횟집(033-648-4313)은 강릉의 별미 중 하나인 삼숙이탕을 제대로 끓이는 집이다. 아귀 사촌처럼 생긴 삼숙이(삼세기)는 삼식이, 탱수, 멍텅구리 등으로도 불린다. 살이 연하고 국물맛이 시원해 주로 매운탕이나 해장국으로 끓여 먹는다.
● 가는 길
동해고속도로 하조대IC(7번 국도 양양 방면)→송현 삼거리(우회전)→손양면 송전리(솔밭가족캠프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