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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이형석의 영화 읽기

사랑을 베팅하면 거덜이 난다

허진호 감독의 ‘위험한 관계’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사랑을 베팅하면 거덜이 난다

사랑을 베팅하면 거덜이 난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 가운데 ‘밀당’이라는 게 있다. ‘밀고 당기기’의 줄임말이다. 연애에서 상대 마음을 얻으려는 감정 줄다리기는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은 위험하다. 위험하기 때문에 재미있다. 밀고 당기다 줄이 끊어지면 상대를 향한 애타는 진심과 달리 관계가 끝장날 수도 있다. 사랑은 판돈 대신 속마음을 걸고 하는 ‘내기’이기도 하다. 승부가 날 때까지 상대 패를 짐작하며 베팅해야 하는 ‘도박’이다. 그래서일까. 거덜이 난 도박사가 그러하듯 실연한 많은 연인이 결국 ‘본전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사랑이 먼저일까 도박이 먼저일까. 상대를 사랑할 수밖에 없어 위험한 내기에 빠져든 걸까, 아니면 도박을 좋아해 사랑을 ‘판돈’으로 걸었을까. “내가 알코올 중독이 돼서 아내가 떠났는지, 아내가 떠나서 알코올 중독에 빠졌는지 모르겠다”며 병나발을 불던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니컬러스 케이지 말처럼 선후가 모호하다.

파리 사교계 이야기가 원작

뇌를 연구하는 생물학자들에 따르면 사랑은 대략 ‘끌림’ ‘집착’ ‘애착’ 등 3단계를 거친다. 남성적 매력의 근원인 테스토스테론과 여성호르몬 에스트로겐의 화학작용으로 남녀가 서로 호감을 갖는 시기가 ‘끌림’ 단계다. 2단계는 본격적인 ‘열병과 중독’ 시기다. 이때 뇌에서는 신경전달물질인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도파민 등이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중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보상으로 인한 도취감과 행복감을 자아내는 물질로 도박이나 마약 중독에도 작용한다. 그렇다면 도박이나 게임이 사랑의 본질적인 속성 아닐까.

‘사랑의 게임’에 관한 한 독보적인 바이블은 1782년 피에르 앙브루아즈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프랑스 소설 ‘위험한 관계’다. 파리 사교계 인사 10여 명 사이에 오고간 편지 175통을 엮어서 얽히고설킨 관계를 보여주는 서간 소설이다. 발몽 자작과 메르퇴이 후작 부인이 중심 인물이다. 잘생기고 부유하며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발몽은 상류층 여인들을 농락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는 인물이다. 메르퇴이는 신분에 걸맞은 기품 있는 겉모습과 달리 실제로는 성적 방종과 악마적 유희에 빠진 여인으로, 발몽을 부추겨 무수한 여인을 무너뜨린 뒤 절망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소설은 이미 몇 차례 영화화했다. 동명 영화로는 로제 바딤 감독과 잔 모로, 제라르 필리프 주연의 프랑스 영화,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과 글렌 클로스, 존 말코비치, 미셸 파이퍼 주연의 미국 영화가 유명하다. 밀로시 포르만 감독과 애넷 베닝, 콜린 퍼스 주연의 영화는 소설 남자 주인공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발몽’이었으며, 현대 젊은이의 이야기로 각색한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이라는 작품도 있다. 이미숙, 배용준, 전도연 주연의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도 이 소설이 원작이다.

가장 최근 작품은 중국 영화 ‘위험한 관계’다. 재미있는 사실은 전액 중국 자본으로 제작했으나, 한국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한국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는 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 ‘행복’의 허진호 감독이 연출하고, 장동건이 중국 톱스타 장바이즈, 장쯔이와 호흡을 맞췄다. 무대는 1930년대 상하이 상류사회로 옮겼다.

당시 상하이는 일본을 비롯해 프랑스, 영국 등 열강이 세력을 확대하려고 서로 다투던 곳이다. 상류사회에선 서구 근대문명과 퇴폐적인 향락문화, 전통 가치가 마구 혼재했다. 상류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도덕과 풍속이 급속도로 자유화, 서구화하면서 상하이는 ‘동양의 파리’라고까지 불렸다. 허진호 감독은 한국 촬영감독을 기용해 상하이의 넘실대는 풍요로움과 화려한 원색의 향연, 동서양이 뒤섞인 국적 없는 근대도시, 사치스럽고 퇴폐적인 사교계를 스크린에 담았다.

사랑을 베팅하면 거덜이 난다
데칼코마니 같은 두 남녀

영화는 한 남자와 두 여자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상하이 최고급 호텔을 소유한 갑부이자 외모까지 출중한 셰이판(장동건 분)은 모든 것을 가진 완벽한 남자다. 뭇 여성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사랑은 단지 게임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냉소주의자다. 상류사회 여성을 희롱하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내버리는 당대 최고의 바람둥이기도 하다. 데칼코마니처럼 셰이판과 똑같지만 정반대편에 선 여인이 모지에위(장바이즈 분)다. 사교계와 정·재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하이 큰손으로 미모와 야심, 배포, 관능미를 두루 갖추고 웬만한 남성은 손아귀에서 갖고 노는 ‘팜파탈’이다.

원하기만 하면 세상 모든 여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바람둥이와 어떤 남자에게도 정복당하지 않는 치명적 매력의 여인. 영화는 모순 같은 이 두 존재로부터 시작한다. 서로에 대한 승부욕이 발동한 그들은 내기를 건다. 애꿎은 희생양은 또 한명의 여인 뚜펀위(장쯔이 분).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남편과 사별하고 자선사업에 전념해온 정숙하기로 정평이 난 대쪽 같은 여성이다. 셰이판이 과연 뚜펀위를 유혹해 무너뜨릴 수 있을까. 셰이판이 이기면 그는 모지에위를 취하고, 반대의 경우엔 모지에위가 원하는 것을 셰이판이 들어줘야 한다.

우연을 가장한 ‘작업’과 운명을 빙자한 ‘미끼’, 여인의 닫힌 마음의 문을 살며시 두드리는 달콤한 속삭임. 절정에 달한 셰이판의 ‘유혹의 기술’은 마침내 뚜펀위를 무장해제시킨다. 하지만 한 순간 빠진 감상 때문에 모든 일을 그르치는 킬러의 운명처럼, 셰이판이 ‘사냥감’에 마음이 흔들리면서 ‘사랑의 도박’에 휘말린 세 남녀의 운명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도박사의 정리’를 혹시 아는지. 판을 거듭할수록 모든 도박사는 돈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 말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사랑을 시험에 빠뜨리지 말길.



주간동아 858호 (p64~65)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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