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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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으면 자식도 외면하는 세상

고령사회의 가족관계

  • 김동엽 미래에셋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 dy.kim@miraeasset.com

    입력2012-05-21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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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없으면 자식도 외면하는 세상
    “그때 내가 연금으로 받는다고 할 걸 그랬어요.”

    얼마 전 20년 넘게 교편을 잡다 퇴직한 부부와 상담할 때 남편 되는 분이 한 말이다. 부부 둘 다 20년 넘는 교직 생활로 사학연금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췄지만, 5년 전 퇴직할 때 남편 퇴직금은 일시불로 받아 썼다. 당시 큰아이가 결혼을 앞둔 데다 작은아이도 대학원에 다녀 목돈이 절실한 형편이었다. 부부는 의논 끝에 남편 퇴직금은 자녀 결혼 비용과 교육비로 쓰고, 아내 퇴직금은 연금으로 받아 은퇴 후 생활비로 쓰기로 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결정을 남편이 후회하는 것이다. 매달 아내에게 용돈을 받아 쓰며 눈치를 봐야 하는 게 영 불편해서다.

    40대 초반 공무원 생활을 접고 사업에 나섰다가 실패한 김이남(65) 씨 사정에 비하면 이들 부부는 나은 편이다. 김씨는 13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연금은 받지 못한다. 20년 이상 공무원 생활을 해야 연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김씨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하면 노후가 보장되는 건 알았지만, 공무원 월급만으로는 생활비에 아이들 사교육비까지 감당하기 버거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사업에 실패한 뒤 생활비와 자녀 학비를 대느라 슈퍼마켓, 제지대리점, 우유대리점 등 안 해본 일이 없다는 그는 “요새 옛 동료들이 연금 받아 생활한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가장 부럽다”고 털어놓는다. 더욱이 그때 자식 때문에 공무원 생활을 포기했는데, 이제 와서 자식들이 돈이 없다고 무시하니 울화가 치민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을 이어주는 연금

    돈 없으면 자식도 외면하는 세상
    연금은 노후 생활비를 대줄 뿐 아니라 부모와 자식 사이를 이어주는 안전판 구실도 한다. 일본 가족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는 “현 시대에 고령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받고 안 받고는 돈이 있는지 없는지에 달렸다”면서 부모와 자식 관계를 고령자 재산 정도에 다라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첫째 유형은 ‘사랑받는 노인’이다. 부모와 자식 모두 재산이 많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부모로선 연금과 저축으로 노후에 대비해왔으니 여차하면 유료 노인부양시설에 들어가면 된다. 자식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다. 자식도 부모를 부양할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있어 부모와 자식 관계가 돈독하다.

    둘째는 ‘연금패러사이트’ 유형이다. 패러사이트(parasite)는 ‘기생충’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연금패러사이트라고 하면 부모가 받는 연금에 기생해 사는 자식을 가리킨다. 부모는 돈이 많은데 자식이 돈이 없는 경우가 이에 속한다. 다 큰 자식이 부모에게 의존해 사는 형태다.

    셋째 유형은 ‘홀몸노인’이다. 부모는 돈이 없고 자식은 돈이 많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돈 있는 자식은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 되는 부모를 성가셔 한다. 그래서 자식과 떨어져 살던 노부부 가운데 한 사람이 먼저 죽으면 남은 한 사람은 홀몸노인이 된다.

    마지막으로 부모와 자식이 모두 궁핍한 유형으로, 부모의 경우 무연사(無緣死)할 가능성이 높다. 경제적으로 쪼들리다 보니 부모 자식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연락이 두절되기도 한다. 자식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행방을 감춘 부모는 ‘무연사 예비군’이 된다. 일본에서는 한 해 3만2000명 정도가 혼자 지내다 죽고, 죽고 나서 한참 뒤에야 발견된다고 한다.

    부모 연금에 기생해 지내는 연금패러사이트 중에는 부모가 죽은 뒤에도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연금을 계속 수령하는 몰염치한 자식도 있다. 2010년 7월 말 도쿄의 최고령 남성으로 등록된 111세 할아버지가 실제로는 30년 전 세상을 떠난 것으로 드러났다. 유족이 할아버지의 노령연금을 받으려고 시신을 집 안에 미라 상태로 방치한 채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것이다.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면서 불법으로 연금을 받아온 81세 딸과 53세 손녀가 사기혐의로 구속됐다.

    죽은 부모 ‘유령연금’ 수급자도 급증

    돈 없으면 자식도 외면하는 세상
    일본 후생노동성은 이 사건을 계기로 76세 이상 연금 수급자 가운데 지난 1년간 건강보험 이용 사실이 없는 34만 명을 대상으로 소재 파악에 나섰다. 그 결과 572명이 이미 사망했거나 실종됐다고 발표했다. 대부분은 사망자의 연금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가는 유족이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경우다. 이런 연금을 가리켜 일본에서는 ‘고인(故人)연금’ 또는 ‘유령연금’이라고 한다. 죽은 부모의 연금 소득이 산 자녀의 생활자금으로 변질됐다는 의미다.

    남유럽 경제위기의 중심에 있는 그리스도 유령연금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2011년 인구조사 당시 그리스에서 100세를 넘긴 인구가 1700명이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난 반면, 같은 기간 그리스 최대 공적연금인 사회보장재단(IKA)에서 연금을 수령하는 100세 이상 고령자는 9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지난 10년간 부정 연금 수급자에게 지급된 공적연금이 70억~80억 유로에 이른다. 80억 유로면 그리스 국내총생산(GDP)의 3.5%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그리스가 부도위기에 처하기 전에는 아무도 이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없었다.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니다. 2011년 11월 전남에 사는 임모 씨는 3년 전 사망한 부친의 국민연금을 계속 받아오다 국민연금공단 직원의 현장조사로 적발됐다. 임씨는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둘러댔지만, 마을 주민에게 확인한 결과 2008년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2007년 이후 5년간 연금 수급자가 사망했는데도 신고하지 않고 국민연금을 챙긴 건수가 1만975건에 이른다. 부정 연금수령 금액은 47억 원이 넘는다고 한다.

    자식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부모는 저축이나 연금 같은 일정 소득이 있는 이들이다. 돈 없는 부모는 자식과 친척들로부터 사랑받기 어렵다는 얘기다. 화목한 가정을 유지하는 데 돈이 기여하는 바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기도 하다. 수입이 끊기면 부모 자식 간 연도 끊길 수 있다.

    돈으로 가족관계가 좌우되는 것은 고령사회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돈 없으면 자식도 외면하는 세상
    자식에게 무조건 봉양하라고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 일본에서 고령자를 전문으로 진료하는 와다 히데키 정신과 의사는 “혼자 사니까 불행하고 가족과 함께 있으니 행복하다는 사회 통념이 바뀌고 있다”면서 “앞으로는 부모를 골칫덩이 취급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기보다 자립해 혼자 사는 고령자가 더욱 늘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30, 40대에게 필요한 것은 늙어서 혼자 살 수 있도록 지금부터 철저하게 자산관리를 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으로 일반인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은퇴교육과 퇴직연금 투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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