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25

2012.02.20

돈 주고 본 경기…‘검은돈’에 놀아났다

프로배구 승부 조작 일파만파 충격…‘불법 베팅 사이트’ 개입 선수들 매수

  • 이승건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why@donga.com

    입력2012-02-20 13: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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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주고 본 경기…‘검은돈’에 놀아났다

    2월 13일 오후 ‘프로배구 부정방지 교육 및 자정결의대회’가 서울올림픽파크텔 올림피아홀에서 열렸다. 선수 대표들과 감독들이 자정 결의를 마친 후 팬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2005년 프로배구 출범 이후 이렇게 많은 관심을 받아본 적이 있을까요.”

    한 남자 프로배구팀 사무국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2월 초 승부 조작이 사실로 드러난 뒤 구단 전체가 뒤숭숭한 분위기라고 전했다. 설령 자기 팀에선 그런 일이 없었어도 검찰의 최종 수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덧붙였다.

    상무-KEPCO ‘약한 고리’ 노려

    남자 프로배구에서 시작된 승부 조작 파문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여자 팀은 물론 프로야구도 수사선상에 올랐다. 모두 사실로 밝혀질 경우 지난해 프로축구 승부 조작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한국 프로스포츠 전체가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프로축구 승부 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관계자들이 “종목 특성상 조작이 불가능하다”고 했던 프로배구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프로배구 승부 조작 제보를 받고 1월 중순부터 수사에 착수한 대구지방검찰청(이하 대구지검)이 이번 사건과 관련해 가장 먼저 구속한 사람은 전직 배구선수 염순호와 브로커 강모 씨였다. 조사 결과 KEPCO(한국전력)에서 뛰었던 염씨는 강씨의 부탁을 받고 2010년 2월 23일 충남 천안시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현대캐피탈과의 경기 등 3~4경기에서 승부를 조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전에 범행을 모의해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에 거액을 베팅한 뒤 배당 수익금을 나눠 가진 것. 이들의 진술을 통해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이후 KEPCO 소속이었던 정평호와 현직 선수인 김상기가 구속됐다. 2월 8일에는 역시 KEPCO 현역 선수인 임시형과 박준범이 경기를 앞두고 긴급 체포되면서 충격을 줬다.



    수사 초반 KEPCO에 집중됐던 수사의 칼끝은 곧바로 상무신협(이하 상무)을 향했다. 대구지검 강력부는 2월 10일 혐의가 있는 상무 선수들에 대한 수사 자료를 국방부 검찰단에 인계했다. 이 자료에서는 상무 선수 2명이 승부 조작에 가담한 정황이 포함됐는데, 국방부 검찰단 자체 조사 결과 더 많은 현역 선수가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를 보고받은 김관진 국방부 장관은 “상무 배구단 해체를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한국배구연맹(KOVO)은 2월 11일 긴급 단장 간담회를 열어 14일 LIG손해보험전을 시작으로 상무의 남은 10경기를 모두 부전패 처리하기로 했다. 상무는 3승33패 성적으로 이번 시즌을 마친다.

    2월 16일 현재까지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은 전·현직 선수는 모두 KEPCO와 상무 소속이다. 왜 하필 KEPCO와 상무일까.

    KEPCO는 2007~2008시즌까지 아마추어 팀이었다. 선수들은 성적에 따라 연봉 계약을 한 게 아니라 KEPCO 직원 신분으로 월급을 받다 은퇴하면 일반 사원으로 돌아갔다. 열심히 뛴다고 보상받는 구조가 아니었다. 프로팀과 달리 신인 드래프트나 트레이드도 할 수 없어 기량이 뛰어난 전력을 보강하지도 못했다. 다른 팀과 전력 차이가 워낙 컸기에 고의적으로 실수한다고 해도 여간해선 눈치 채기 힘들었다.

    반면 추가로 체포된 임시형과 박준범의 경우는 다른 시각에서 봐야 한다. 둘은 리그 신인왕까지 차지한 유망주다. 앞서 소환된 KEPCO 전·현직 선수와 달리 성적에 따라 연봉도 더 받을 수 있는 100% 프로선수다. 이에 대해 구단 관계자는 “함께 뛰는 선배의 제의를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무도 마찬가지다. KEPCO와 함께 2005년 프로 출범 때 아마추어 초청 팀으로 참가했다. 처음 6시즌 동안 상무와 KEPCO는 각각 세 번씩 꼴찌를 했다. KEPCO가 프로팀이 된 뒤에는 이번 시즌을 포함해 상무가 3시즌 연속 최하위였다. 게다가 상무 선수는 군인 신분이기에 입대한 뒤에는 수입이 크게 줄어든다. 프로팀 선수에 비해 돈의 유혹에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래저래 상무와 KEPCO 선수들은 브로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대구지검이 중간 수사 결과를 발표했을 때 팬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점은 당시(2009~2010시즌)만 해도 최약체였던 KEPCO가 어떻게 일부러 져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프로 출범 이후 그 시즌까지 KEPCO는 현대캐피탈을 상대로 고작 2승(35패)만 거둔 팀이었기 때문이다. 웬만해선 이기려 해도 이길 수 없는 팀이 어떻게 승부를 조작했을까.

    엄밀히 말해 이번 사건은 승부 조작이 아니라 경기 조작 혹은 점수 차 조작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다. 그리고 이는 불법 베팅 사이트의 특성 때문에 가능했다. 합법인 스포츠토토는 최종 세트 스코어와 점수 차까지 맞혀야 한다. 선수가 대부분 가담하지 않는 이상 승부 조작이 불가능하다.

    10조 원 규모의 불법 베팅 사이트

    반면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는 다양한 게임으로 베팅을 유인한다. 대표적인 것이 언더오버 게임이다. 듀스까지 가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한 세트에서 두 팀의 점수는 25대 23이 최고다. 만약 불법 사이트 관리자가 합산 점수 언더오버를 40점으로 지정하면 베팅에 참가한 사람은 언더(40점 미만)나 오버(40점 이상) 중 한쪽에 돈을 건다. 약한 팀이라도 15점을 못 얻기는 쉽지 않다. 베팅은 오버 쪽으로 몰릴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약한 팀 선수를 매수한 브로커는 언더에 베팅하고 해당 선수는 고의로 실책을 남발해 상대가 25점을 얻을 때 자기 팀은 14점 이하로 머물게 할 수 있다. 대구지검이 조작 사례로 제시한 2010년 경기에서 KEPCO는 30대 28로 3세트를 따낸 뒤 4세트를 12대 25로 내주며 패했다. 브로커들이 3세트는 오버, 4세트는 언더에 베팅했을 개연성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지난해 6월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는 1000여 개나 된다. 사이트 1개당 125억 원가량의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조사됐는데 이를 토대로 계산하면 관련 시장 규모는 10조 원을 훌쩍 넘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최근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를 통해 베팅만 해도 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을 수 있도록 국민체육진흥법을 개정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불법 사이트를 대대적으로 단속해 선수들이 승부 조작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국의 단속 의지에도 불법 사이트 근절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성업 중인 한 불법 스포츠 도박 사이트 게시판에는 ‘브로커나 선수들이 수사 과정에서 밝힌 사이트 외에는 단속이 불가능하다. 해외 서버를 수사하려면 보통 4~6개월이 걸리는데 그동안 고객 데이터를 삭제할 수 있다. 우리는 3개국 서버를 빌려 운영하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는 관리자의 글이 버젓이 올라와 있다. 전문가들이 불법 사이트 근절보다 가담 선수에 대한 단호한 처벌과 상설 기구 등을 통한 체계적인 관리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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