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67

2010.12.20

영화상이야? 뻔한 밥상이야?

연말 한국의 3대 영화상 재미도 의미도 없는 행사 되풀이

  • 박혜림 기자 yiyi@donga.com

    입력2010-12-20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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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상이야? 뻔한 밥상이야?

    대종상 축하무대에 오른 소녀시대. 객석의 반응은 썰렁했다.



    매년 연말이면 지상파 방송 3사에서 빼놓지 않고 생중계하는 행사가 있다. 바로 가요, 방송연예, 영화 분야의 한 해 업적을 기리는 각종 시상식이다. 특히 국내 3대 영화상 시상식인 대종상영화제(이하 대종상), 청룡영화상(이하 청룡상), 대한민국영화대상(이하 영화대상)은 평소 TV에서 만나기 어려웠던 영화배우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관심을 얻는다. 배우들이 특정 캐릭터를 연기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데다 누군가는 상을 받고 누군가는 받지 못하는 경쟁의 자리이므로 여기에서 오는 긴장감도 묘미다.

    3대 영화상 시상식 중 가장 먼저 막을 올린 것은 10월 29일 열린 제47회 대종상(주최 한국영화인협회)이다. 그 뒤를 이어 11월 18일에는 제8회 영화대상(주최 MBC)이, 26일에는 제31회 청룡상(주최 스포츠조선)이 열렸다. 시청률 조사기관 TNS미디어코리아가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세 시상식 모두 10%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동일 시간대 타 방송사 프로그램과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수치. 하지만 3대 시상식을 지켜보면 ‘어쩌면 이렇게 비슷하고 지루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예년의 시상식과 비교해도 느낌은 매한가지. 그래서 올해 열린 3대 영화상 시상식을 분석해봤다.

    무표정한 배우들의 얼굴

    “어, 외국 시상식에서는 가수가 축하공연을 오면 어깨춤도 추고 즐기던데, (배우들이 가수에) 너무 몰입해서 한 곳만 뚫어지게 쳐다보네요. 허허.”



    대종상에서 소녀시대가 축하무대를 선보인 직후 사회자 신동엽이 던진 말이다. 윙크 하나로 삼촌팬 수십 명은 거뜬히 쓰러뜨린다는 소녀시대지만 영화배우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과 미동 한 번 않는 자세로 무대를 지켜봤던 것이다. SBS를 통해 생중계된 이 광경을 본 누리꾼들은 각종 인터넷 게시판과 트위터에 “영화배우라고 가수를 무시하는 것 같다” “외국 시상식과 비교된다”와 같은 글을 올리며 배우들의 태도를 비판했다. 그래서일까. 20여 일 후 열린 영화대상 역시 축하무대에 소녀시대가 올랐는데, 주최 측이 장내 스크린에 “소녀들의 무대는 방긋 웃는 얼굴로 봐주세요”라는 자막을 미리 띄웠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지나치게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우리 사회의 문화와 경쟁에 대한 압박감에서 온다고 설명한다. 그러다 보니 시상식을 다 같이 즐기는 축제의 장이 아닌 경쟁의 결과를 알아보러 오는 곳으로 여긴다는 것. 서울대 곽금주 심리학과 교수는 “마치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학생처럼 수상 결과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시상식 전 과정을 마음 편히 즐기기가 어렵다”고 분석했다. 최창호 사회심리학 박사의 설명은 더 흥미롭다. 최 박사는 “한국인은 웃는 얼굴 근육 자체가 덜 발달했다. 시상식에서 배우들은 상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타인과 경쟁하느라 잔뜩 긴장한 상태다. 그런 감정을 숨기고 페르소나(가면)를 보여야 하는데, 한국인은 대체로 그 부분이 잘 안 된다”고 설명했다.

    하느님과 스태프에 감사

    영화상이야? 뻔한 밥상이야?

    영화 ‘아저씨’로 제47회 대종상에서 생애 첫 남우주연상을 받은 원빈.

    “저는 스태프들이 차려놓은 밥상에서 맛있게 밥만 먹었을 뿐입니다.”

    2005년 청룡상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황정민이 밝힌 수상소감이다. 이 겸손하면서도 쉽고 재미있는 수상소감은 그 후 개그 프로그램, 시상식, CF 등에서 수십 번 패러디됐다. 황정민은 이 소감으로 평소 겸손하고 수더분한 이미지가 더욱 공고해져 대중의 더 큰 사랑을 받았다.

    대중이 시상식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배우들의 진솔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 해 동안 열심히 뛰어 ‘최고’로 인정받는 순간 수상자가 밝히는 소감은 그 사람의 인성, 품위, 가치관, 말투 등을 담아낸다고 믿는다. 하지만 대개는 ‘하느님, 함께 노력한 스태프, 집에서 지켜보고 있을 가족에게 감사를 돌린다’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소감을 읊는다.

    “감독님, 새론 양, 스태프 여러분, 배우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중략) 더 고민하고 열심히 하는 배우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대종상 남우주연상 원빈)

    “제가 ‘심야의 FM’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대표님, 스태프들, 상대 배우 유지태 씨, 가족에게 감사드립니다. 좋은 배우로 사랑받을 수 있게 열심히 하겠습니다.”(청룡상 여우주연상 수애)

    거의 흡사한 내용의 이런 소감은 겸손하게 보일 순 있지만 좌중과 시청자는 쉬이 지루해진다. 위트가 넘치고, 자신에게 축하를 보내는 당당한 수상소감을 들을 순 없는 걸까.

    2009년 제81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밀크’로 남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숀 펜의 수상소감은 우리 배우들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밀크’에서 연기한 동성애자 정치가 하비 밀크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동성결혼에 반대하는 이들이 반성해야 할 시간이다. 후손들이 당신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평등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관중은 하비 밀크의 목소리와 몸짓에서 웃음을 터뜨렸고 동성애에 대한 숀 펜의 주장에서 그의 소신을 읽었다.

    곽금주 교수는 이를 성숙한 인간상에 대한 동·서양의 생각 차이로 본다. 서양에서는 유머를 성숙한 인간이 가지는 중요한 자질 중 하나로 보아 긴장된 순간에도 여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청중을 웃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나이가 들고 지위가 높아질수록 근엄하고 가벼워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시상식에서 겸손하고 진지하게 말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본도 어색하게 읽는 시상자

    시상자도 수상자처럼 지루한 멘트를 남발하기는 마찬가지다. 주로 남녀 배우가 쌍을 이루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사전에 시상식 관계자에게서 받은 대본을 주로 읽는다.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멘트가 대본에 있어도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어색하게 읽는 경우도 있다. 영화대상 신인남우상 시상자로 나선 배우 박철민은 시상소감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황정민의 수상소감을 패러디했을 뿐 아니라 시상자의 심정을 재미있게 표현했기 때문. 진지하고 엄숙한 시상식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그의 시상소감이다.

    “스태프 모든 분이 차려놓은 밥상에 저는 숟가락만 들고 이렇게 나왔습니다. 더욱 열심히 해서 앞으로 감독상, 작품상 시상하는 배우가 되겠습니다. 끝으로 집에 계시는 연로하신 우리 어머님, 아버님 많이 헷갈리실 겁니다. 뭐, 시상이나 수상이나 트로피 주고받는 것은 비슷합니다. 언제 탈지 모르는데 마음껏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수상의 법칙…공동수상, 대리수상

    영화상이야? 뻔한 밥상이야?

    (위) 윤정희는 영화 ‘시’로 대종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아래)대종상에서 영화발전공로상을 받은 원로배우 최은희.

    수상자를 보면 매년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먼저 후배와 대선배 배우가 사이좋게 상을 받는 장면이 연출된다는 것. 공동수상일 경우는 신구(新舊)의 조화가 더 두드러진다. 올해 청룡상에서는 여우주연상을 ‘시’의 윤정희와 ‘심야의 FM’의 수애가 공동수상했다. 대종상에서는 남우조연상을 ‘시’의 김희라와 ‘방자전’의 송새벽이 나란히 받았다.

    이런 신구의 안배와 공동수상, 공로상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시상식의 주최 측이나 심사위원단에 영화계와 가까운 인적 네트워크를 가진 이가 많기 때문이라고 본다. 심영섭 씨는 “대종상의 경우 주최 측에 원로 영화인도 많다. 원로들의 안배를 고려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대리 수상자가 무대에 올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수상자가 참석하지 못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광경도 종종 연출된다. 올해 열린 3대 영화상 시상식에서도 수상자로 호명된 영화배우나 스태프가 다른 작품 촬영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경우가 두세 차례 있었다.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모두가 시상식에 참석한 경우가 없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영화상 시상식은 미리 수상자임을 알려주는 경우가 많다. 수상 후보에 올랐더라도 상을 타지 못하면 참석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수상자를 발표하기 전에 보여주는 수상 후보들의 긴장한 모습 대신, 정지된 후보자의 사진을 종종 봐야 했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경우 후보에 오르지 않더라도 시상식에 참석하는 영화계 인사가 많다. 시상식의 권위가 큰 데다 시상식을 영화계 인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거대한 축제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배우들은 ‘후보가 된 것만으로 영광’이라는 말은 자주 하지만 시상식은 상을 받기 위해 참석하는 자리가 돼버린 듯 참석률이 저조하다.

    ‘쇼’가 아닌 ‘연말 이벤트’

    거대한 쇼. 미국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볼 때 떠오르는 단어다. 물론 아카데미 시상식과 국내 3대 영화상 시상식을 나란히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국내 시상식의 구성이나 진행방식을 뜯어보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데 왜 국내 시상식은 수많은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쇼가 아닌, 연말이면 으레 치르는 이벤트처럼 느껴지는 걸까.

    국내 영화상 시상식의 볼거리는 가수들의 축하무대, 배우들의 드레스 정도다. 이 밖에 특별한 무대를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축하무대는 가수들이 평소 가요프로그램에 나와 선보이던 공연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남자 가수가 객석으로 내려와 여배우들에게 꽃을 건네는 퍼포먼스도 상투적이다. 영화 OST를 부른 가수가 무대에서 라이브로 음악을 들려주는 무대 정도가 조금 특별할까. 3대 영화상 시상식에는 인기 아이돌 그룹인 소녀시대, 카라, 2PM 등이 참가해 자신들의 주요 타이틀곡을 열창했다.

    올해 3월에 열린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두드러진다. 배우 닐 패트릭 해리스가 화려한 뮤지컬 무대를 선보이며 시상식을 열었다. 작품상에 오른 영화의 OST에 맞춰 무용수들이 각기 다른 군무를 펼치기도 했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배우 휴 잭맨과 앤 해서웨이가 작품상 후보를 소개하는 뮤지컬을 선보였다.

    아카데미 시상식 축하무대의 특징은 오직 그날만을 위해 준비한 공연을 펼친다는 점이다. 또 영화배우들이 직접 무대에 올라 쇼를 선보이는 경우가 많다. 진행자들 역시 시상식 내내 일종의 쇼에 임하는 자세를 유지한다. 올해의 경우 영화 ‘사랑은 너무 복잡해’에서 메릴 스트립을 두고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스티브 마틴과 알렉 볼드윈이 사회를 봤다. 이들은 티격태격하는 콘셉트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상식을 진행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내 시상식은 ‘쇼’에 대한 마인드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심영섭 씨는 시상식 주최 측이 한국영화를 두고 어떤 재밋거리를 보여줄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다. 1년 내내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쇼를 고민하는 아카데미 시상식과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는 설명.

    물론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기본적으로 미국과 한국은 영화산업 규모가 다를 뿐 아니라 시상식에 투자하는 금액도 큰 차이가 난다. 대중문화평론가 이문원 씨는 “지난해 MBC는 영화대상을 후원해줄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시상식을 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거대한 쇼를 연출하기는 무리”라고 전했다.

    정체성이 모호한 것이 공통된 특징

    3대 영화상 시상식의 ‘최우수작품상-남우주연상-여우주연상’ 수상 결과를 보자. ‘시-원빈-윤정희’ ‘의형제-정재영-윤정희, 수애’ ‘시-원빈-서영희’가 그 결과다. 이것만 보고 어느 시상식의 결과인지 구별해내기란 쉽지 않다. 이처럼 영화상 시상식의 가장 큰 특징은 ‘뚜렷한 자신만의 색깔이 없다는 것’이다. 세 시상식 모두 ‘한 해 최고의 영화를 뽑는다’는 지향점을 가지고는 있다.

    영화는 주관적인 예술작품이므로 이를 두고 점수를 주고 등수를 매기는 것 자체가 어쩌면 아이러니다. 상업적인 결과를 두고 순위를 매길 수는 있지만, 굳이 후보를 고르고 수상할 필요가 없다. 이문원 씨는 “시상식마다 특색이 뚜렷할 때 그 의미와 매력이 생긴다”고 조언했다. 예를 들어 아카데미 시상식은 미국 영화업자와 영화예술 아카데미협회가 수여하는 상으로 미국 영화 제작에 직접 관여하는 사람만이 투표권을 가진다. 주로 매년 1월에 열리는 골든글로브 시상식은 할리우드 외신기자협회에서 수여하는 상이다. 이처럼 심사하는 주최가 명확하게 다르니 시상식의 색깔도 각기 다르다는 설명. 국내 영화상 시상식은 주최는 다 다르지만, 모두 유사하게 전문가 심사위원과 일반 관객(누리꾼) 심사위원의 의견을 반영하는 심사제도를 택하고 있다. 이문원 씨는 “영화산업이 미국처럼 크지도 않은 상황에서 비슷한 성격의 시상식이 3개나 있어 오히려 소모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영화상 시상식은 영화계의 축제이자 명예의 전당이 돼야 한다. 관객마다 가치 있게 평가하는 영화는 다를 수 있다. 영화상 시상식은 각 시상식 고유의 기준으로 영화의 우열을 가리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쇼가 되고, 이것이 영화계의 사기를 높이고 영화에 권위를 부여하는 기회가 된다. 국내 영화상 시상식도 이런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영화상이야? 뻔한 밥상이야?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를 소개하러 무대에 오른 5명의 동료 배우.(오른쪽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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