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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ETY

‘쌈지’ 는 좋아도 제품은 안 샀다

문어발 경영 토종 브랜드 아쉬운 몰락 … 직원들 “CEO 부재, 올 것이 왔다”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쌈지’ 는 좋아도 제품은 안 샀다

‘쌈지’ 는 좋아도 제품은 안 샀다

시민들의 반대로 입장료조차 걷지 못해 적자가 누적된 서울 인사동 ‘쌈지길’.

“공적자금을 들여서라도 쌈지를 살려내야 한다. (정부가) 대기업은 살려내면서 ‘문화 대기업’인 쌈지는 왜 지원하지 않는가.”_김종근 미술평론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메세나 활동을 펼친 기업이 바로 쌈지다. 스튜디오, 전시회를 통해 신예들이 진출할 통로를 터준 독보적인 기업인데 정말 안타깝다.”_윤진섭 미술평론가

“1999년부터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을 주최해 록페스티벌이라는 개념을 정착시키며 인디밴드를 양성한 쌈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 기업이다.”_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쌈지가 만든 ‘딸기’는 인지도를 확보한 몇 안 되는 토종 캐릭터다. 캐릭터산업의 불모지인 한국시장을 키우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_㈜부즈 대표 김부경

4월 7일 최종 부도처리 된 기업, 쌈지에 대해 이렇듯 많은 문화예술인이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쌈지가 그만큼 문화적으로 감동을 준 기업이기 때문이다. 1993년 ‘레더 데코’라는 가죽제품 가방업체로 출발한 쌈지는 ‘쌈지’ 외에 ‘놈’ ‘딸기’ ‘아이삭’ 등의 브랜드를 선보이며 한국 정서가 담긴 개성 있는 디자인으로 인기를 끌었다. 창업 5년 만인 1998년에 544억 원 매출에 순이익 20억 원을 달성해 2001년 코스닥에 등록했고, 인사동에 복합문화 공간인 ‘쌈지길’을 만들고 ‘쌈지스페이스’ ‘쌈지사운드페스티벌’(이하 쌈사페) 등을 운영해 예술가를 발굴했다. 아트마케팅의 선구자로 대한민국 브랜드 경영대상 우수상, 패션협회 주최 패션경영인상 등을 수상한 천호균 전 쌈지 대표이사는 “기업과 예술가가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윈윈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처럼 다양한 문화 활동에 따른 브랜드 가치 상승이 매출로 이어지진 않았다. 직원들은 그런 상황이 개탄스러웠다고 전했다.

“‘쌈사페’에 오는 수많은 사람 중에서 쌈지 물건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없었어요. 페스티벌을 준비하면서 뿌듯했지만 막상 우리 고객이 아니란 걸 깨닫고는 이 일을 왜 계속하나 싶었죠. 물론 기업 인지도는 높아졌다고 봐요. 그렇지만 10년이 지나도 ‘쌈사페’에 오는 사람은 본인이 좋아하는 공연만 보고 갈 뿐 우리 제품의 고객이 되진 않았습니다.”

패션잡화 제조에서 영상 사업까지

쌈지는 문화 활동을 늘리면서 사업 분야도 확장했다. 천 전 대표이사의 추진력과 상상력으로 패션잡화 제조에서 나아가 화장품, 출판, 캐릭터, 테마파크, 영상 사업까지 진출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 디자이너 브랜드도 인수한 것이다. 이렇듯 가방 제조가 아닌 ‘본업 외 업무’에 에너지를 집중한 까닭에 쌈지의 경쟁력은 점차 떨어졌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CEO가 ‘대외 활동’이란 토끼를 잡느라 ‘기업 내부 활동’이라는 토끼를 놓쳤다는 점이다. 내실을 꼼꼼히 챙기기에는 천 전 대표의 몸이 모자랐다. 전 쌈지 디자이너인 A씨는 “사장님이 바쁘셔서 결재를 받으려면 1,2주 기다리는 건 다반사였다”면서 “문제가 생겨도 어물쩍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했다. 기업 이미지는 높아졌지만 운영은 권한위임이 안 돼 천 대표의 결재가 없으면 모든 일이 올스톱 됐다. 청춘을 바치며 20년간 쌈지에서 일했다는 직원 B씨는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 열정적인 천 사장님이 아닌 ‘이해타산을 챙기는 CEO’가 있어 기업의 내실을 키웠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B씨는 지금도 천 전 대표가 문화 활동에만 전념한 이유를 모르겠다며 ‘직원과의 소통 부재’를 주요 실패 원인으로 꼽았다. “사장님은 100m 앞에서 뛰고 있고 저희는 아무것도 모른 채 따라가기만 했습니다.”

‘쌈지’ 는 좋아도 제품은 안 샀다

쌈지는 ‘쌈사페’(쌈지사운드 페스티벌), ‘쌈지스페이스’. ‘딸기가 좋아’(테마파크), 영화 ‘무방비도시’ 제작 등 다양한 문화사업을 벌였다.

그러다 보니 200여 명의 직원은 천 전 대표가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기에 바빴다. 쌈지의 전 디자이너 C씨는 “가방 만들던 사람더러 갑자기 페스티벌을 준비하라, 유기농법을 체험하라 하니 디자이너로서 전문성을 갖추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많은 디자이너가 이런 한계를 느끼고 쌈지를 떠났다. 그래서 가방업계에서는 쌈지를 디자이너 사관학교라고 부른다. 현업에 종사하는 가방 디자이너의 50%가 쌈지 출신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 한편 천 전 대표가 디자이너들의 창의성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다는 지적도 있다. 전직 쌈지 디자이너 D씨는 “창의적인 기업 문화는 좋았지만, 정작 사장님은 본인의 생각과 다른 디자인을 받아들이지 않아 답답해 퇴사했다”고 토로했다.

그 사이 쌈지는 점점 시장에서 외면당했다. 20대를 타깃으로 물건을 제작했지만 실제 소비자는 쌈지란 기업에 향수를 느끼는 40대였다. 소비자 분석에 실패한 것이다. 시장 상황도 급변했다. 쌈지 전 직원 B씨는 “제조업체처럼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에서 생산하다 보니 제품의 질이 떨어졌을 뿐 아니라 다품종 소량생산에도 어려움이 따랐다”고 말했다. 즉 과거 같으면 시장 반응이 좋은 상품은 즉각 생산량을 늘려 공급할 수 있었지만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긴 뒤로는 순발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 게다가 명품 브랜드 선호 현상으로 중저가 브랜드인 쌈지의 입지도 좁아졌다.

국가 브랜드로 재기할 수 있나

그럼에도 천 전 대표는 새로운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다 보니 가방을 팔아 새 사업에서 발생한 적자를 메우는 악순환이 지속됐다. 2005년 1300억 원대에 달하던 매출이 2009년에는 반 토막 수준인 578억 원으로 떨어지고 적자도 129억 원이나 내 감사 의견조차 거부됐다. 쌈지 제품은 소비자에게 외면당하고, 경기도 파주 헤이리에 세운 테마파크 ‘딸기가 좋아’는 입장료 외에는 수익 모델이 없었다. 서울 인사동에 만든 ‘쌈지길’은 시민들의 반대로 입장료조차 걷지 못해 개점 이래 적자만 보았다. 게다가 쌈지가 제작한 영화 ‘무방비도시’ ‘인사동 스캔들’이 연이어 흥행에 참패했다. 결국 경영난에 시달리던 천 전 대표는 2009년 8월 쌈지 경영권을 매각했다.

4월 7일 쌈지가 최종 부도처리 됐을 당시 대표이사는 양진호 씨다. 새 대표이사가 쌈지를 이끄는 상황에서 부도가 났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천 전 대표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천 전 대표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쌈지 경영권을 인수한 대표이사들이 임무를 다하지 않아 부도가 난 것이다. 제2, 제3의 피해자를 없애기 위해 소송을 진행 중이라 당장은 뭐라 말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쌈지 전 직원 E씨는 “새로운 대표이사 덕분에 죽어가던 기업의 수명이 연장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구조적인 원인이 잔재하는 한 부도는 예상했던 결과”라며 “한 우물만 제대로 팠어도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쌈지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서울대 의류학과 김민자 교수는 “기업은 브랜드 인지도 제고뿐 아니라 역량 강화를 통해 정체성을 키워야 하는데, 쌈지는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집중하느라 정체성을 만들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지적하면서도 “그동안 쌈지가 문화적으로 쌓아온 공력이 남다른 만큼 ‘샤트렌’ 브랜드처럼 재기에 성공해 국가의 문화적 자산으로 남길 바란다”고 밝혔다.

현재 쌈지는 법적 소송 중이다. 2009년 11월 퇴사한 200여 명의 직원은 밀린 임금과 퇴직금 31억 원을 받기 위해 노무법인 세종을 통해 현 대표이사를 고소했고, 천 전 대표 또한 현 대표를 고소했다. 출시 이후 만년 적자에 허덕이던 ‘딸기’ 캐릭터사업은 ㈜어린농부를 통해 천 전 대표가 맡았고, 한국의 대표적인 록페스티벌인 쌈사페 또한 쌈지에서 분리, 독립법인으로 운영돼 직접적으로 이번 부도의 영향을 받지는 않을 전망이다.



주간동아 2010.05.04 734호 (p44~45)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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