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8

2010.01.05

‘찌질한 낙오자’ 코드가 通했다

‘예능력’으로 스타 된 연예인과 시대상의 함수관계

  • 이문원 대중문화평론가 fletch@empal.com

    입력2009-12-29 16: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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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근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로 발돋움한 연예인들의 활약이 눈부시다. 김태원, 서인영, 붐, 한성주 등 ‘의외의’ 인물이 시청자들의 공감과 웃음을 사게 된 데는 시대적 배경이 있다. 이들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시대 대중이 원하는 웃음 코드를 자신의 캐릭터에 녹여 성공했다. ‘예능인’으로 거듭난 이들이 현대인을 웃게 하는, 웃음의 ‘발화’ 지점을 찾아보자.
    ‘찌질한 낙오자’ 코드가 通했다

    ‘예능인’으로 거듭난 요즘 스타들에게는 공통적인 ‘코드’가 있다. ‘낙오자 정서’와 ‘싼 티’ 콘셉트를 자극하는 것. 경제적, 사회적 분위기는 특정 연예인 캐릭터의 인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예능 판도가 변화하고 있다. 2008년까지 MBC ‘무한도전’과 KBS2 ‘해피선데이 1박2일’, SBS ‘패밀리가 떴다’ 등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다면, 2009년부터는 시청자들의 시선이 여러 프로그램으로 분산됐고 시장 자체도 확대되는 추세다. 집단 토크 버라이어티가 다양한 포맷으로 ‘업그레이드’되고, 리얼 버라이어티도 스포츠·음악 등으로 소재를 넓혀가고 있다. 그리고 그만한 시청률을 나눠 갖는다. ‘예능 전성시대’가 허튼 말이 아니다.

    넓어진 ‘시장’만큼 예능 스타도 대폭 양산됐다. 김태원, 서인영, 붐, 이하늘, 길, 한성주 등 뜻밖의 인물이 예능계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MC도 마찬가지다. 유재석, 강호동의 양대산맥 구도에서 박미선, 이휘재 등이 스타급으로 새롭게 가세했다. 한마디로 판이 커진 대가를 골고루 나눠 갖는 모양새다.

    불황기엔 아웃사이더 이미지에 공감대

    이 같은 예능 열풍을 바라보는 시선은 크게 하나로 집중된다. 경제불황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가 힘든 시기, 인기 있는 콘텐츠는 역시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짜증나는 현실을 단번에 날려줄 스피디한 ‘토크 버라이어티’, 반대급부로 따스한 인간 감정을 안겨주는 ‘리얼 버라이어티’ 등이 득세하게 된다.



    물론 우리만의 특수한 현상은 아니다. 미국도 1920~30년대 대공황 시기, 넘어지면서 무작정 웃기는 슬랩스틱 코미디와 삶의 여유, 낭만적인 감수성을 채워주는 ‘스크루볼 코미디’(대사의 감칠맛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가 동시에 득세한 바 있다. ‘잃어버린 10년’ 동안의 일본도 TBS ‘우타방’, 후지TV ‘헤이헤이헤이’ 등 음악 토크 버라이어티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춤추는 대수사선’을 비롯한 코미디 드라마가 시대를 풍미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예능으로 ‘뜬’ 연예인 패널들의 속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한마디로 경제불황기 대중 정서에 적합한 연예인이 떴다는 것이다. 예능 열풍이 일게 된 것 자체가 이런 정서를 정확히 담는 패널을 적절히 활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보자.

    경제불황기 대중 정서에 밑바탕이 되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낙오자 정서’다. 사회에서 뒤처지고 무시당할 법한 인물형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지지 심리가 생긴다. 대표적인 경우가 록그룹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다. 김태원은 딱히 예능 감각이 출중한 인물은 아니다. 타이밍이 좋은 것도 아니고,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선 낙오자 정서를 한껏 느낄 수 있다.

    1965년생, 우리 나이 45세. 이 시대에 가장 고통을 겪고 있는 ‘허리’ 세대다. 거기다 그는 아이돌 열풍 탓에 뒤안길에 놓인 장수 록그룹 리더다. 점차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다. 딸을 해외유학 보낸 기러기 아빠이기도 하다. 현시점 우리 사회가 지니는 고민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인물이 예능에서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거나 리액션을 하면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다르다. 그는 ‘연예인’이 아니라 ‘우리’ 같은 인물이 된다.

    김태원으로 대표되는 현상은 이전에 ‘호통 개그’라는 형식으로 박명수를 띄웠다. 맥락은 같았다. 힘없는 서민 이미지였다. 그런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알맹이 없이 호통만 치는 중장년층 자화상이었다.

    속물근성, ‘싼 티’ 콘셉트, ‘이혼녀’ 코드의 경쟁력

    이 패턴은 여러 형태로 전이된다. 비슷한 나이대이면서 아웃사이더적 이미지를 강화한 캐릭터가 이하늘이다. 그는 탈모 증세까지 겪고 있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 낙오자형 아웃사이더다. 이 패턴이 30대로 내려앉으면 ‘리쌍’의 멤버 길로 이어진다. 잘생기지 않은 외모, 서툰 말솜씨, 즉 ‘예능에 어울리지 않는 예능 스타’다.

    현재 예능은 ‘낙오자’를 다양한 형태와 세대로 나눠 대중에 공급, 여러 계층에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경제불황 콘셉트는 ‘낙오자’의 정반대에 자리한다. 계급갈등 요소를 한껏 부각하는 ‘특권층’ 이미지가 그것이다. 늘 논란이 되지만, 그만큼 관심도도 높아진다. 불황기의 동경 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런 콘셉트는 여성이 떠맡았을 때 효과가 커진다. ‘된장녀 열풍’의 원인이다.

    언뜻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그런 심리가 존재한다. 앞선 미국 대공황 때도 캐리 그랜트 등 ‘왕자님형’ 배우들이 득세했고, 한국에서도 올 초 재벌집 아들이 총출동하는 ‘꽃보다 남자’(KBS2)가 큰 인기를 끌었다. 남성으로 대상을 설정했을 때는 동경의 요소가 되고, 여성으로 설정하면 여성의 동경과 남성의 자괴감, 무력감이 자극돼 ‘논란형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대표적 예가 서인영이다. ‘신상’이라는 단어를 일반화한 주역이다. 구두에 집착하며, 기본적으로 모든 종류의 명품 소비에 열중한다. 자신의 속물근성을 절대 감추지 않는다. 절묘한 부분에서 여성의 공감대를 사는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속물근성을 감추고 사는 경제불황기에 시청자들은 서인영을 통해 일종의 대리만족도 느낀다.

    한편 이처럼 계급갈등 요소에 천착하더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특히 여성이 대상일 때는 절대 ‘사회적 품위’를 집어넣으면 안 된다는 것. 그러면 아예 ‘우리와는 다른’ 계층으로 인식돼 이질감과 거부감을 산다. 연예인이라서 버는 돈은 많지만, 우리와 비슷한 감수성과 행동양식을 보여줘야 한다. 서인영이 정확히 그랬다. 수년 전 큰 인기를 모은 MBC ‘개그야’의 ‘사모님’을 그 초기 모델로 보면 된다. 김미려는 ‘돈은 많지만 품위가 없는’ 사모님 역할을 연기했다.

    한편 이런 콘셉트에서 ‘특권층’ 이미지를 뺀 형태가 이른바 ‘싼 티’ 콘셉트다. 이 같은 콘셉트로 뜬 케이스는 자기 입으로 ‘싼 티’를 외치고 다녔던 붐이 대표적이다. 기본적으로 ‘낙오자 정서’와 유사하지만, 이를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캐릭터로 보면 이해가 쉽다. 이런 콘셉트는 대중에게 좀더 살갑게 다가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하나 짚어야 할 부분이 경제불황이 낳은 사회현상이다. 대표적 사례가 이혼율 급증이다. 경제불황기에는 늘 이혼율 증가가 수반됐다. 그만큼 가정 내 갈등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이런 시기를 거치며 이혼이 일반적인 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도 발생했다.

    한국 예능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MBC ‘세바퀴’를 중심으로 ‘이혼녀 열풍’이 인 것이다. 한성주 등이 이런 콘셉트로 크게 부각돼 스타덤에 올랐다.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던 부분이 일반화화는 현실에서, TV 프로그램이 이에 방점을 찍어주면 효과가 커진다. 사실 한성주에게도 별다른 예능 감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사회적 약점이던 이혼을 부각한 콘셉트가 사회 상황과 맞물려 공감대를 형성했다고 봐야 한다.

    ‘찌질한 낙오자’ 코드가 通했다

    ◀◀◀ MBC ‘세바퀴’는 이휘재, 박미선의 ‘부활’과 중년에 맞는 개그 코드로 각광받고 있다. ◀◀ SBS ‘스타킹’의 붐과 조권. ‘싼 티’ 콘셉트로 승부를 걸었다. ◀ KBS2 ‘개그콘서트’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는 경제불황과 여권 신장에 따른 남성들의 복잡한 심리를 담았다.

    ‘소시민 정서’ 있어야 스타급 MC로 우뚝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제불황기 대중 정서에 기댄 콘셉트는 패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프로그램을 이끄는 MC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두 MC 유재석, 강호동의 ‘국민MC화’도 사실상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먼저 유재석은 프로그램을 유연하게 이끄는 MC로 잘 알려져 있다. 각 패널의 화학작용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그러나 대중이 받아들이는 유재석 이미지는 그런 기능적인 부분이 아니다. 유재석은 프로그램을 이끄는 당당한 리더로 보이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만년계장’ 이미지다. 사회 시스템 내에서 지치고 찌들어 자기 목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는 ‘소극적 회사 인간’ 이미지다. 그리고 그런 ‘얍삽한’ 이미지를 계속해서 강조해왔다. 유재석은 우리와 같은, 경제불황기 자화상이었던 것이다.

    강호동도 타입은 다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한다. 강호동은 프로그램을 역동적으로 이끄는 리더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카리스마적인 리더는 아니다. 사투리를 절대 고치지 않고 ‘촌놈’ 이미지도 버리지 않는다. 말 많고, 목소리 크고, 덩치 크고, 힘센 ‘촌놈’이다. 그래서 위협적이거나 고압적이지 않은 푸근하고 든든한 리더가 된다. 경제불황기에 대중이 바라는 리더상이 바로 이런 것이다. 모자란 부분이 많지만, 그만큼 어딘지 인간적인 면이 돋보이는 인물형이다.

    유재석, 강호동과 함께 스타급 MC로 거듭나는 이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속성을 지녔다. 박미선은 전형적인 우리 시대 중년 기혼여성이다. 젊은 세대와 동세대 남성들에게 치이면서도 자기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내보려고 애쓴다. 사생활 영역으로 들어가면 남편은 잦은 사업실패를 겪고 있고, 자신이 벌어 가정을 이끌어간다. 경제불황기에 꼭 맞는 콘셉트인 것이다.

    이휘재의 부활도 눈여겨볼 만하다. 전성기 때 이휘재는 그저 ‘이 바람’이었다. 훤한 외모를 무기로 여성을 유혹하는 이미지였다. 그러던 그도 어느덧 중년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동안 인기 하락도 겪었고 숱한 스캔들에 시달리기도 했다. 한마디로 ‘세상 무서운 것 알게 된’ 이미지가 형성됐다. 또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바람’이 갖은 고생을 겪고 난 뒤 ‘노총각 이휘재’로 거듭나며, 결혼 상대자를 찾으려 애쓰는 모습에 대중은 공감하고 있다.

    예능은 늘 시대정서와 밀접한 관계

    마지막으로 예능 프로그램의 콘셉트 변화도 짚어볼 만하다. 경제불황기에 화려하게 꽃피워, 이 시기에 꼭 맞는 캐릭터들을 갖게 된 예능 프로그램들은 이 콘셉트에 맞는 콘텐츠 개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리얼 버라이어티 열풍으로 한참 하락세를 겪다 부활한 KBS2 ‘개그콘서트’다. 이 프로그램의 구성 꼭지는 모조리 현재의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다. ‘남보원’으로 알려진 ‘남성인권보장위원회’가 한 예다. 경제불황기 한국에서 가장 크게 부각된 문제가 ‘여성의 위치 변화’에 대한 남성층의 질시와 분노다. 사회 인식은 변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구조가 달라지니 당황감이 앞섰다. 더군다나 경제불황기는 보수적 사고를 부추기는 시기다. ‘남보원’은 이 같은 시대 정서를 대변해 여성에 대한 남성의 분노를 한껏 부추기고, 다시 이를 와해하며 해소시킨다.

    ‘행복전도사’는 한술 더 뜬다. 아예 계급갈등적 요소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부유층과 서민층 간 문화와 사고의 충돌을 묘사하며, 이를 풍자로 비틀어낸다. 불황기에 한껏 고조된 대중의 갈등 심리를 해소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짜증나는 대중심리를 독설로 풀어주는 ‘봉숭아 학당’의 ‘왕비호’ 캐릭터도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다. 독설 캐릭터는 이 밖에도 솔비 등에 의해 한동안 붐을 형성했는데, 가장 생명력이 긴 것이 ‘왕비호’다. 다른 이들이 충격 효과만을 줬다면, ‘왕비호’는 독설을 퍼붓는 대상의 핵심을 찔러주기 때문이다. ‘무작정 독설’ 시대는 끝나고 ‘내용 있는 독설’ 시대로 넘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현재의 예능 프로그램 열풍은 패널과 MC, 프로그램 자체의 콘셉트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경제불황 정서로 대표되는 대중 심리를 정확히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경제불황이 지속되는 한 예능 프로그램 열풍도 지속되고, 또 더욱 거세지리라는 예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예능 프로그램은 늘 시대정서와 밀접한 연관을 맺어왔다. 드라마 장르 등도 물론 시대정서에 기댄 면이 많았지만, 예능 프로그램만큼 투철하진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의 역할 자체가 지치고 힘든 대중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빠르고 날카롭게 일시적으로 지워버린다. 대중을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 천착해 고민을 잊게 만든다.

    그래서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갖은 비판은, 어쩌면 헛된 것일 수 있다.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느니, 너무 저급하다느니 하는 비판까지 모두 그렇다. 현재 대중이 그 정도로 치우치고, 그 정도로 저급한 웃음을 원하기에 그런 예능 프로그램이 범람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경제불황 정서에 철저히 기댄 예능 프로그램 형식과 과도한 예능 프로그램 열풍도 비판할 것은 못 된다는 얘기다. 어쩌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모습을 가장 먼저 포착해 알려주는 것은, 심오한 사회과학 연구보고서가 아니라 주말 저녁에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 한 꼭지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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