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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의 성탄절, 인종 폭동 상처

사소한 시비로 촉발 욕설과 폭력 난무 호주 ‘침울’ … 각계각층 나서 화해와 자제 촉구

  •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hanmail.net

한여름의 성탄절, 인종 폭동 상처

호주의 12월은 한여름이다.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끼여 있는 달이라 사람들의 표정이 한결 따뜻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2005년 호주의 12월은 영 딴판이다. 뉴 사우스 웨일스(NSW) 주의 켄 몰로니 경찰청장의 말대로 크리스마스의 온정은 사라지고 중동계 호주인들에 대한 난데없는 욕설과 폭력만 난무하다. 심지어 폭력을 당한 사람 중에는 레바논계 아버지와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이도 있었다. 호주 대륙의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애버리진을 향해 겨우 200년 남짓 살아왔을 뿐인 백인계 호주인들이 나가라고 하니, 주객이 전도돼도 이만저만 아니다.

1970년대에 악명 높았던 백호주의를 폐지하고 다민족, 다문화주의를 성공적으로 정착시켜 온 호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사소한 시비가 인종 폭동으로 불거진 과정을 날짜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2월4일 크로눌라 해변의 수상안전 요원 두 명이 백사장에서 축구를 하던 6~7명의 청년들에게 공차기를 중지시켰다. 주말에 공놀이가 금지되는 해변이 여러 곳 있는데, 크로눌라 해변도 그중 하나다. 문제는 중지한 쪽이 백인계, 중지당한 쪽이 중동계 호주인, 정확히 말해 레바논계라는 데 있었다. 청년들이 이런 중지 조치를 인종차별로 받아들였던 것. 이에 레바논계 청년들은 수상안전 요원에게 몇 차례 폭행을 가했던 게 현재 호주를 들썩이게 한 인종 폭동의 시작이다.

되살아난 백호주의 망령에 충격

그런데 높은 청취율을 기록하고 있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인 ‘토크 백’의 진행자 앨런 존스가 “백인 수상안전 요원이 레바논 갱에게 구타당한 사건은 용납할 수 없다. 그들을 응징하자”는 선동적인 방송을 내보내자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인종 문제에 대해 극우 성향을 보이던 방송에서 앨런 존스는 “레바논 갱들에게 복수해야 한다. 이 지역 호주인들은 이번 주말에 크로눌라 해변으로 모여서 중동 놈들을 패주자”는 이야기를 한 것.



12월11일 백인계 호주인 5000여명이 실제로 크로눌라 해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호주 국기를 흔들고 노래를 부르며 “레바니스(레바논계를 지칭하는 말)는 호주를 떠나라”는 과격한 구호를 외쳤다. 그러면서 영문도 모른 채 해변을 찾은 중동계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마구 폭행했고,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응급구호 요원들에게도 폭력을 가했다. 가해 백인들 중에는 호주 내 극우 단체의 단원들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호주 사랑’을 외쳤지만, 이는 비뚤어진 애국이었고 오히려 호주가 아직도 백호주의의 망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전 세계에 알린 결과를 낳았다.

이에 대해 피터 가렛 노동당 의원은 “불과 한 달 전 모든 호주인들은 한목소리로 호주 축구팀의 독일월드컵 본선 진출을 축하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호주는 10년 이상 후퇴했다”며 개탄했다.

중동 지역에서 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건 함무라비법전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조항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무슬림들은 피해를 당하면 그대로 복수를 다짐하고 실행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시드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폭동도 그런 측면이 강하다.

백인계 호주인들에게 공격을 당한 레바논계 청년들은 12월11일 마루브라 해변으로 몰려가 100여 대의 차량을 파괴했다. 13일 밤에는 시드니 서부 지역에 위치한 어번 연합교회가 전소됐는데, 언론에서는 레바논계의 방화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밤마다 라켐바에 위치한 무슬림 사원에 모이는 수많은 중동계 청년들이 “무슬림 형제들이여, 이번 주말 모이자”라고 외쳤고, 휴대전화를 통해 집결을 독려하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이에 백인계 청년들도 “12월11일의 성공적인 응징을 축하한다. 우리도 다시 모여 레바니스들의 숨통을 조여놓자”라는 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특수부대 SAS 동원도 고려

호주의 최대 일간지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12월12일자 톱기사 ‘호주의 불명예’에서 “똑같은 호주인들끼리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백인계가 중동계를 공격하는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고 개탄했다. 또 “1970년대 초에 사라진 백호주의의 망령이 다시 살아난 것 같은 공포감을 느끼며 이는 다민족, 다문화주의를 표방하고 관용을 옹호하는 호주의 가치를 더럽힌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존 하워드 호주 총리는 “인종이나 외모, 민족성을 이유로 공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면서도 “이번 폭동은 인종차별적인 사안이라기보다는 불량배들이 법과 질서를 어긴 범죄행위”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물론 지역사회, 종교계 대다수 인사들과 일반 시민들은 크로눌라 해변에서 일어난 폭력 사태를 인종차별적인 폭거라고 일제히 비난했다.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하워드 총리와 다른 관점에서 비판한 것인데, 이는 인종 문제에 관해 수구적 태도를 고수하는 총리에게 모종의 항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한편 백인계와 중동계 지도자들은 12월12일 밤 긴급 회동을 갖고 이번 사태가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했다. 이날 회동에는 경찰도 참석했다. 켄 몰로니 경찰청장은 NSW 정부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줄 것을 강하게 요청했고, 이에 모리스 예마 NSW 주 총리는 “당국은 여야 합의 아래 신속하게 법 개정을 해 처벌을 강화할 계획”이라며 “사건 발생 지역의 봉쇄, 검문 강화, 주류 판매시간 제한 등의 조치를 강구하고 있으며 2000년 시드니올림픽 당시에 활약했던 특수부대 SAS의 동원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의 공권력 강화 법안은 12월15일 NSW 주 의회에서 여야 모두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일부에서는 호주의 인종 폭동 사태를 프랑스의 소요 사태와 비교하는 경우가 많은데, 본질은 조금 다르다. 프랑스는 사회적으로 소외당해온 소수 그룹인 중동계가 폭동을 일으킨 것이지만, 호주의 경우는 반대로 다수 그룹이 소수 그룹에게 가한 폭력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 크다 할 수 있다. 강자로서의 관용을 잃은 것이기 때문.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 차원의 각종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기독교와 무슬림 지도자들의 회동이 잦아지고 있다. 12월15일 28개 소수민족 지도자들과 종교계 인사들이 인종 폭동이 발생했던 크로눌라 해변에 모여 화해의 의식을 가졌다. 한 무슬림 지도자는 “오는 18일이 ‘피의 일요일’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호소했다. 스포츠 스타와 영화배우들도 “이제 화해하고 서로 껴안는 크리스마스를 맞자”고 촉구했다.

한편 호주 한인들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아직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창수 주 시드니 총영사는 “지금까지 보고된 한국인의 피해 상황은 없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당사자인 레바논 교민 사회가 한인 밀집 거주지역인 캠시와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교민의 신변안전을 위해서 여러 가지로 대책을 강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주간동아 2005.12.27 516호 (p62~63)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lipsy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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