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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세기말 은거자들 감싸주던 따뜻한 위로

벨 앤 세바스찬, 그날의 바람과 맥주

세기말 은거자들 감싸주던 따뜻한 위로

세기말 은거자들 감싸주던 따뜻한 위로

인디 팝 밴드 ‘벨 앤 세바스찬’. [사진 제공 · 강앤뮤직]

그날의 바람과 맥주 맛을 기억한다. 2010년 여름 지산밸리록페스티벌.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쯤 벨 앤 세바스찬이 무대에 올랐다. 첫 내한이었다. 공연이 무르익자 기다리던 노래가 연주됐다. 1998년 작품인 ‘The Boy with the Arab Strap’의 수록곡, ‘Sleep the Clock Around’였다. 밴드도 팬도 모두 풋풋하던 시절의 노래다. 밴드는 그 후 넉 장의 앨범을 더 내놨고 팬들도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결혼한 사람도, 결혼을 앞둔 사람도 있을 터. 옆 커플은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껴안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노래가 보슬비처럼 지산리조트를 촉촉히 적실 무렵, 남자는 주머니 속에서 반짝이는 뭔가를 꺼내 여자의 손가락에 끼워주며 속삭였다.

“결혼해줄래?”

이미 그들과 돗자리에 앉아 벨 앤 세바스찬을 기다리며 연신 맥주를 마신 터였다. 취하진 않았어도 얼큰했다. 그 말 한 마디에 술이 확 깨고 말았다. 이런 프러포즈를 생각할 수 있다니, 내가 그의 ‘여친’이었다면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눈가가 축축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그들은 함께 벨 앤 세바스찬을 들으며 많은 데이트를 했을 것이다. 오랜 연애 끝에 마침 벨 앤 세바스찬이 내한했고, 여자친구보다 동성 친구들과 페스티벌을 누비곤 하던 그가 여친을 데리고 여기에 왔을 것이다. 결국 이토록 낭만적인 프러포즈를 해내고야 말았다. 남아 있던 맥주를 한 방에 들이켰다. 아름다워서, 부러워서.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서울 홍대 앞 음악 술집은 신촌과 사뭇 달랐다. 신촌은 우드스탁, 레드 제플린, 도어스 등 1960~70년대 록 아이콘을 간판에 걸고 그때 음악만을 LP반으로 틀었다. 신촌 변방에서 자기 색깔을 갖기 시작한 90년대 중반 이후 홍대 앞 음악 술집들은 동시대 음악을 틀었다. 스미스, U2 같은 가게를 시작으로 드럭, 헤븐 같은 전설적 가게들이 하나 둘 생겨났다. 모던록, 펑크, 레게 등 이전 세대는 받아들이지 않던 음악과 수입 맥주가 그곳의 주류였다. 벨 앤 세바스찬도 그중 하나였다. 지금은 서울 명동 수준으로 바글거리지만 그때는 황량하던 홍대 앞 골목 2층에 있던. 물론 앞서 말한 밴드, 그 벨 앤 세바스찬에서 따온 이름이다.

1998년을 기억한다. 당시 최고 음악잡지 ‘서브’의 앨범 리뷰 코너에 그들의 두 번째 앨범 ‘If You’re Feeling Sinister’가 소개됐다. 만점이었다. 문제는, 벨 앤 세바스찬이 한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팀이었다는 거다. MP3? 그런 게 없던 시절이다. 도대체 어떤 음악이기에 만점이냐, PC통신 음악동호회에서는 추측만 오갔다. 결국 뒤늦게 수입으로나마 그 앨범이 소개됐을 때 모두 무릎을 꿇었다.



수줍은 소년처럼 나긋하게 떨리는 목소리, 어쿠스틱 기타와 현악기가 이끄는 사운드, 때로는 우울하고 때로는 설레는 포근한 멜로디가 어우러진 벨 앤 세바스찬의 음악을 세상은 체임버 팝(chamber pop)이라 불렀다. 그들은 일렉트릭 기타가 지배하던 세기말의 홍대 앞에서 말없이 방구석에 은거해 있던 이들의 지지자가 됐다. 엘리엇 스미스와 더불어 벨 엔 세바스찬은, 어떤 취향의 작은 공동체를 대표하는 이름이었다. 홍대 앞 그 가게에도 그런 소년 소녀가 몰려들었다. 음악 술집의 왁자지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리 큰 볼륨으로 들어도 시끄러울 수 없는 음악이 깔리곤 했다. 작은 언사에도 상처받기 일쑤였던 아이들이 섬세한 대화를 나누며 맥주병을 홀짝거렸다.

꼭 10년이 지났다. 오랜 연인에서 막 예비부부가 되는 의식을 치른 커플이 옆에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벨 앤 세바스찬이 연주하고 있었다. 또 한 잔의 맥주를 집었다. 누군가 테킬라를 마시려고 가져온 레몬을, 나는 오래전 코로나를 생각하며 맥주가 담긴 플라스틱 컵에 퐁당 빠뜨렸다. 탄산이 순식간에 레몬을 감싸고 올라왔다. 레몬껍질의 쓴맛이 혀를 감쌌다. 깊어지는 가을, 문득 벨 앤 세바스찬을 들으며 그날의 바람과 맥주 맛을 떠올린다. 그 아름다웠던 프러포즈를 떠올린다.






주간동아 2016.10.19 1059호 (p77~77)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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