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4

2005.03.01

“북간도의 별 헤던 동주 오빠…”

시드니 거주 윤동주 시인 여동생 혜원씨 … “늘 과묵했지만 나에겐 짓궂은 장난 좋아해”

  • 시드니=윤필립 통신원 philipsyd@hanmail.net

    입력2005-02-24 11: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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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간도의 별 헤던 동주 오빠…”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씨(왼쪽).

    해마다 2월이 오면 뚜렷한 병명도 없이 시름시름 ‘앓았던’ 사람이 있다. 반세기가 훌쩍 넘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차마 떨쳐버릴 수 없는 트라우마(trauma·정신적 외상)에 시달리며 남모르게 눈물을 ‘훔쳐냈던’ 사람이 있다.

    시 원고와 사진 챙겨온 주인공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으로 태어난, 젊은 나이에 순절한 오빠의 고결한 이미지에 단 한 점이라도 흠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며 숨죽여야 했던 윤혜원씨(82)가 바로 그 사람이다. 윤씨의 아픔과 눈물을 굳이 과거형으로 쓴 까닭은 언제부터인가 그 눈물자국에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기 때문이다. 슬퍼하고 있기보다는 오빠의 비극적인 생애를 그의 고고한 시편들을 통해 ‘영원한 생명’으로 승화시키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2월16일 윤동주 시인 순절 60주기를 맞아 해외 여러 나라에서 추모행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호주 시드니에서도 어느 곳보다 뜻 깊은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다. 윤동주를 포함한 3남1녀의 형제자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윤혜원씨가 시드니한인회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했다. 호주한인문인협회와 시드니우리교회, 호주동아일보사가 공동 주관한 이 행사에서 윤씨는 “아버지 권유로 동주 오빠 방 책꽂이에 꽂힌 노트 3권을 가져왔는데 당시엔 노트에 담긴 시들이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다”고 말했다.

    윤씨는 북간도 룽징(龍井)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역임하던 1948년 12월, 기독교를 탄압하는 중국 공산주의를 피해 한국으로 내려오면서 고향집에 남아 있던 윤동주 시인의 시 원고와 사진을 챙겨온 주인공이다. 거기엔 윤동주 시인의 초기와 중기 작품 대부분이 들어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시 원고를 가져온 여동생 덕분에 후손들이 더욱 풍성한 윤동주의 시 세계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48년 발간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31편의 시밖에 실리지 않았지만, 현재 증보판에는 116편이 실려 있다. 그중 85편이 여동생의 품에 안긴 채 월남한 작품들이다.



    추모행사를 준비하면서 윤혜원씨는 더 이상 우울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오빠와의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하면서 오빠와 함께 불렀던 흑인영가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오’를 흥얼거렸다.

    “북간도의 별 헤던 동주 오빠…”

    윤동주 시인이 다닌 일본 교토 도시샤 대학에 설립된 시비(왼쪽)과 그의 자필 원고와 문집.

    이 노래는 오랫동안 유학생활을 하느라 타지를 떠돌던 윤동주 시인이 고향 북간도와 부모형제를 그리며 자주 불렀던 노래다. 또 방학 때마다 고향에 와서 동생들에게 가르쳐주며 함께 불렀던 노래이기도 하다. 윤동주 시인은 이 노래뿐만 아니라 한국 민요가 잘 불려지지 않는 북간도에서 동생들과 동네 아이들에게 ‘아리랑’ ‘도라지’ 등을 가르치고, 한국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윤혜원씨 기억에 남아 있는 오빠 윤동주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문 식민지 청년이 아니다.

    “북간도의 별 헤던 동주 오빠…”

    윤혜원씨와 홍장학씨, 그리고 윤씨의 남편 오형범씨(왼쪽 사진 왼쪽부터). 60주년 추모행사를 주관한 호주한인문인협회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윤씨는 지난 세월 오빠 이야기만 나오면 말머리를 돌리며 입을 꼭 다물곤 했다. 그동안 언론과의 인터뷰도 적극 피했다. “동주 오빠는 내 오빠이기도 하지만, 그의 시와 꼿꼿한 정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형이요 오빠이기 때문에 공연한 말로 그의 ‘티 없는 초상’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윤혜원의 신념이었다.

    “앞으로 재미있는 일화들 공개”

    그러나 60주기를 맞이하면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살아서 오빠의 추모행사를 지켜보는 것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만이 알고 있는 오빠와 관련한 비화를 털어놓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중 하나가 ‘오빠의 장난기’다. 늘 과묵했던 그가 유일한 여동생인 윤혜원씨에게만은 무척 짓궂은 장난을 치곤 했다. 생애 처음으로 오빠의 대표시인 ‘서시’를 공개 낭송하면서 윤씨는 “앞으로 동주 오빠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들을 공개하겠다”면서 “그것은 밝은 내용을 담은 오빠의 시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남의 나라 땅 북간도에서 태어나 역시 남의 나라 땅 일본 후쿠오카의 차디찬 감옥에서 27년 2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 윤동주 시인. 갑작스런 죽음과 비극적 생애는 그의 고고한 시편들과 함께 순교자적 이미지를 깊게 각인시켰다. 그는 시인으로 데뷔한 적도 없고 생전에 시집 한 권 남기지도 않았지만, 한국에서 가장 널리 사랑받는 시인이 됐다.

    시드니 추모행사에 ‘정본 윤동주 전집’의 저자 홍장학 선생(동성고 교사)이 초청됐다. 그는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윤동주 시인의 육필원고를 담아 99년 출간된 ‘사진판 윤동주 시고 전집’(민음사)을 읽고 새로운 윤동주 연구에 돌입한 사람이다. 홍 선생은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실린 텍스트와 육필원고 사진본에서 많은 차이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지난 5년간 각고의 노력 끝에 ‘정본 윤동주 전집’과 ‘정본 윤동주 전집 원전연구’(문학과 지성사)를 펴냈다. 홍 선생은 강연에서 “그동안 윤동주 삶의 비극성에 얽매여서 정작 그의 시 읽기에는 소홀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면서 “이제는 그의 시가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또 “윤혜원씨가 목숨 걸고 가져온 윤동주 초기 작품들에서는 무수한 퇴고, 옮겨 적은 흔적들이 발견되는데 이를 통해 윤동주 텍스트의 발생과정과 텍스트 간의 상호 관련성에 대한 풍부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홍 선생은 시를 가져온 주인공을 만나고자 북간도의 윤동주 생가가 있는 명촌동까지 찾아간 적이 있다. 거기서는 만나지 못했던 윤씨를 이번 행사에서 마침내 만나게 돼 무척 감격스러워했다.

    윤동주 시인이 숨졌던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칼바람과 달리 남국의 훈풍이 부는 시드니에서 열린 추모행사에 참석한 김창수 주 시드니 대한민국총영사가 추모사를 낭독하는 동안 윤혜원씨는 여러 차례 손등을 눈가로 가져갔다.

    “삼가 옷깃을 여미고 우리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윤동주 시인이 남겨주신 참된 인간의 표상, 생명에의 경외,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우리의 삶을 통해 구현해나갈 것임을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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