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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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시민운동가’ 왜 자살 택했나

계명대 신현직 교수, 각종 단체 실무 도맡아…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번민

  • < 최영철 기자 > ftdog@donga.com

    입력2005-02-11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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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 시민운동가’ 왜 자살 택했나
    지난 6월13일 대구지역 시민학계는 계명대학교 법학과 신현직 교수(46)의 투신자살 소식이 알려진 뒤 심한 충격에 휩싸였다. 지난 20여 년간 그가 대학 민주화와 시민운동을 주도하며 보여준 철저함과 강인함을 아는 모든 사람은 ‘투신자살’이라는 경찰 수사발표를 의심했다. 그와 시민운동을 함께 하던 사람이 그를 떠나 보내는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왜 그는 죽어야만 했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시민운동권 내부 책임론을 제기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2000년 시민단체 실무자가 뽑은 올해 최고의 시민운동가’ ‘다시 나오기 힘든 천재적 지역 운동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중앙위원’ ‘대구경북 민주화 교수협의회 회장’ ‘대구남부지역 새교육시민모임 공동대표’ ‘주민과 선거 공동대표’ ‘새대구경북시민회의 운영위원장’. 신교수가 대구지역 후배들에게서 얻은 별명과 공식 직함들을 보면 그가 이 지역 시민운동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공식직함에 거론된 단체 모두가 ‘이름 부조’만 하는 단체들이 아니라 그가 없으면 조직 자체가 움직이지 않는 점을 감안하면 이 지역 시민운동권의 그에 대한 의존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특히 지난해 전국 총선연대 상임공동대표를 맡으면서 그가 보여준 치밀함은 전국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각 지역 총선연대 중 대구총선연대는 공명선거 감시법 위반 재판에서 유일하게 무죄판결을 이끌어 낸 것.

    하지만 이런 지역·시민·학계의 화려한 수식어를 뒤로 하고 지난 6월13일 새벽 그는 자신의 집필실에서 3층 아래로 돌연 몸을 던졌다.

    “미안해 정리해 줘” “정말 끝낼까? 그것만이 답이다. 이게 쭛쭛일보 마지막 글이다. 안녕 안녕 미정아” 투신 몇 시간 전 그가 부인(최미정, 46, 계명대학교 국문학과 교수)에게 한 마지막 전화 통화와 메모는 그의 자살에 간단치 않은 동기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무엇이 그리 복잡해 부인에게 정리를 부탁해야만 했고, 스스로에게 삶을 끝내야 하는 것이냐고 물어야 한 것이었을까. 극심한 가뭄을 달래는 단비가 간간이 내리던 지난 6월14일 밤, 이런 의문과 관련한 답을 얻기 위해 계명대 동산의료원 영안실에 마련된 신교수의 빈소를 찾았다. 나흘간의 장례일정 중 이틀째 였지만 한 지식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행렬은 밤을 새우며 계속되고 있었다.



    ‘천재 시민운동가’ 왜 자살 택했나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었어요. 짐을 지우고는 짐을 잘 드니 못 드니 욕만 하고… 우리가 죽인 거나 다름 없습니다” “쉬고 싶다고 이야기할 때 쉬게 해줬어야 하는데 맡을 사람은 별로 없고….” 빈소에 모인 사람은 저마다 신교수가 자살한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시민운동권 선후배와 동료교수, 친구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그의 사인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오는 ‘자괴감’ 바로 그것이었다.

    시민의 양심과 정의가 바로 서는 세상을 만들자는 시민운동가로서의 이상과 그것을 실천해 가는 현실의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차이가 있었고,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그런 상황을 견뎌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대구사회연구소의 창설 멤버로 반독재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던 학술운동가에서 직접 몸으로 뛰는 시민운동가로 변신한 그는 지역 시민운동권 내부의 극심한 인재 부족현상 때문에 각종 단체들의 실무를 책임졌고, 항상 4~5단체의 대표 또는 실무 책임자를 겸임하면서 시민운동의 한계를 절감했다.

    대구지역 시민운동권의 한 원로는 “지난해 말 신교수가 찾아와 ‘모든 시민단체 활동을 1년간 쉬고 싶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는데, 결국 사람이 없어 일을 계속하게 되었다”며 “말만 많고 실질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는 시민운동의 한계가 빚은 비극”이라고 그의 죽음을 정의했다. 더욱이 최근에는 신임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시민단체 내부에서 그를 교육감 후보로 지목했으나 그가 이를 거절하면서 전교조와 시민운동권 지지 후보가 나뉘자 그의 실망은 한층 더했다고 한다. 그의 한 고교 동창생은 “그가 교육감 선거에 나가지 않은 것은 다른 후보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이후 시민단체 교육감 후보 일원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책임론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신현직이 아니면 안 된다”라는 후배들의 기대를 그는 “역량이 안 된다”며 고사했으나 후배들은 그의 뜻을 곡해한 것이다.

    대구지역 시민운동단체의 연합체 성격을 가진 새대구경북시민회의의 한 관계자는 신교수가 시민운동에서 한계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가 맡은 단체들은 환경운동연합이나 경실련, 참여연대처럼 성과가 보이는 단체들이 아니다. 발(회원)은 없고, 재정은 부족한 상태에서 1인 3역을 하다 보니 자기 한계에 봉착했고, 시민운동권은 그런 그를 끌어안기보다는 ‘왜 못하느냐’고 다그치기에 바빴다.”

    신교수의 감성적 동지임을 자처하는 한 후배는 그의 죽음은 오히려 완벽주의에 기초한 그의 철저함과 강인함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자신과 일에는 냉혹하리만큼 엄격하고, 철저하지만 남에겐 관대하고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는 것. 그는 신교수에 대해 시인 윤동주만큼이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같은 대학의 한 동료교수는 “신교수가 민주교수협의회 활동을 하면서 90년대 함께 총장 퇴진운동을 벌이던 9명의 동료교수가 최근 해직된 것에 엄청난 부담감을 느꼈다”며 “항상 내가 나갔어야 할 자리를 동료들이 대신 채워 괴롭다”고 전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못내 한이 된 것이다.

    “최근 신교수를 만나 지역신문에 연재하는 칼럼이 초점이 흐트러지고 산만하다는 말을 했더니 죽기 직전에 쓴 메모에도 그 내용을 써놓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지나친 친구였다”(신교수의 또 다른 고등학교 동창) 신교수는 친구의 한마디 말에도 아파했다. 시간은 없고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지만 그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다.

    몸이 백 개라도 모자라는 형편이지만 거절을 못하는 그의 성격은 오해도 불렀다. 그의 죽음이 가정문제에서 불거진 것이라는 소문이 바로 그것. 하지만 취재 결과 이는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모임이면 모임, 회의면 회의, 술자리면 술자리, 거절하는 법이 없는 그는 자연히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졌고 이 때문에 이사하는 과정에서 집 근처에 집필실을 따로 마련한 것이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른 것뿐이었다.

    회원·재정 부족한 상황서 ‘나홀로 총대’

    “나는 곧 너보다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신교수가 자살을 선택하기 일주일 전 가까운 후배에게 보낸 e-메일에는 고단한 시민운동가의 쓸쓸함이 묻어난다. 경찰 조사결과 그는 죽기 전 3시간 동안 후배들에게 5차례나 전화를 건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전화를 받은 후배는 없었다. 강인한 시민운동가는 지쳐 있었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투철한 엘리트 시민운동가가 죽음을 앞에 두고 후배들에게 하고 싶던 말은 무엇일까. 그의 죽음으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진 이 지역 시민운동권이 사태를 수습하고 그의 죽음의 참의미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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