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83

2001.05.10

구기자 + 약재 듬뿍 ‘최고의 약술’

  • < 여행칼럼니스트 storyf@yahoo.co.kr >

    입력2005-01-25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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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기자 + 약재 듬뿍 ‘최고의 약술’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 낯선 나를 바라다보는 일이야말로, 여행의 참 묘미다. 그 자리에 술이 끼여들면 세상은 더욱 낯설어진다. 그녀의 인생을 들여다보다 내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그저 술을 빚는 이가 아니었다. 녿부였고, 장인(匠人)이었고, 사회봉사자였다. 혼자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을 한껏 짊어지고 부지런히 걸었다.

    나를 마주하자마자 그녀는 술도가를 시작하느라 빚을 많이 졌다고 했다. 은행 융자와 정부 보조금을 합하여 2억원 가까운 돈을 투자하였단다. 살던 집 마당에 단층짜리 철근 구조물 두 동을 세우고, 여과기와 살균기를 구입하느라 평생 헤아려보지 못한 큰돈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의 안타까움은 빚을 졌다는 사실에 있지 않았고, 그 빚 때문에 자신의 꿈을 실현하지 못할까 하는 데 있었다. 그녀의 꿈은 아파트라도 지어서 불쌍한 노인들을 편안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라와 공공단체도 하기 어려운 일을, 당차게도 제 몫이라고 여겼다.

    그녀에게는 아들 하나에 딸이 셋 있다. 딸 셋은 모두 제 자식이 아니다. 큰딸은 군에서 전사한 시동생의 딸이고, 둘째딸과 셋째딸은 친정 동네에서 데려다 키운 고아였다. 그녀는 부지런히 벌어서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도, 불쌍한 아이들을 키워 덕을 쌓는 것이 자식의 앞날에 훨씬 좋을 것이라 믿었다. 행려병자를 데려다 간병하고, 김치를 담가 이고 노인들 찾아다니고….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내내 부끄러웠다. 한 생명을 보살피는 것은 또 한 생명의 헌신 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넉넉한 살림이 아닌데도 그녀는 부모 잃은 아이를 거둬 키우고 불쌍한 이들을 돌봤다. 그래서 그녀는 “남들 마냥 마실 가고 놀러다니면서 입방아 찧지 못해봤시유”라고 말한다.

    구기자 + 약재 듬뿍 ‘최고의 약술’
    그녀는 올해 65세인 임영순씨다. 충남 청양군 운곡면 광암리에서 청양 둔송 구기주(041-942-8138)를 빚는 장인이다.



    얼굴 선이 고와서 젊어서 참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겠다. 평생 산과 들로 나다니며 농사를 지었는데도 얼굴은 여전히 맑고 곱다. 혹시 구기자 덕이 아닐까 궁금증이 일었다. 1996년에 농림부에서 전통술 명인 지정을 받았고, 2000년에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녀가 술을 잘 빚게 된 것은 순전히 시집을 ‘잘못 온’ 탓이다.

    그녀는 21세에 시집을 왔다. 청양 지방으로 갈래를 친 하동 정씨 종갓집이었다. 일도 많았지만, 20대에 혼자가 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가 혹심했다. 새벽 3시에 눈을 뜨면 혹시나 다시 잠이 들까 봐 물을 데우고 밥할 준비를 하면서 아궁이 곁에 쪼그리고 앉아 졸았다. 시어머니는 조금만 몸이 아파도 아들을 곁에 두고 자야 했다. 아들을 빼앗아간 며느리가 미웠던가 보다. 그래서 그녀는 시어머니가 잠들기 전까지는 남편과 한마디도 나눌 수 없었다. 도란도란 남편과 얘기라도 나누면 이튿날 시어머니 심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시집살이를 시키려고 큰손녀에게 젓가락 한짝 밥상에 놓지 못하게 했다. 소낙비가 내려도 마당에 널어놓은 보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 시어머니가 술을 좋아했다. 시집을 오자마자 그녀에게 술을 빚으라고 했다. 그녀는 지청구 안 들으려고, 친정에서 어깨너머로 본 눈썰미로 술을 빚었다. 술은 남편도 좋아했다. 남편은 술을 등에 지고는 못 가도 뱃속에는 넣고 가는 사람이었다. 아침부터 한두 대접 마시기 시작해 점심 때면 남이 되어 버렸다. 시어머니는 술에 취하면 밭에 가 드러눕거나 길에 드러누웠다. 집에서 술을 마시면 하다못해 마당에다가 밥그릇 하나라도 엎어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이 모자(母子)의 술을 끊이지 않고 대느라 보름에 한 번씩은 술을 빚었다. 그러다 세무서 직원이라도 들이닥치는 날이면, 술잔은 내버려두고 술병을 들고 뒤안으로 달아났다. 세무서 직원이 구둣발로 안방에 들어와 술병을 내놓으라고 소리치면, 그녀는 “그래 나는 벌금 안 내려고 술병을 감췄다. 그렇지만 너희는 남의 집 안방에 구두 신고 들어오는 법이 어딨냐”며 맞받아 소리쳤다. 동네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뒷배가 얼마나 좋으면 저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며 수군댔다. 그런 감시를 받으면서도, 술을 끊이지 않고 빚은 덕에 그녀의 술 빚는 실력은 나날이 늘었다. 그 소문이 인근에 퍼져, 그녀는 잔칫집에 초대를 받았다. 술밥을 다 쪄놓고, 구기자를 준비하면 그녀가 가서 누룩과 물을 잡아서 술밥과 함께 비비는 일을 했다. 그녀는 술독이 크든 작든, 한번 휘휘 저어보면 술이 잘 될 것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자정이 될 때까지 그녀가 사는 집 거실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구기주가 내 앞에 있었다. 술은 노르짱하면서도 맑은데, 붉은 빛이 돌 정도로 진했다. 약재 냄새가 강하며, 새큼하고 달착지근했다. 전혀 감미를 하지 않은, 구기자와 약재로 우려낸 맛이다. 그녀는 며느리와 함께 술을 빚는데, 젊은 며느리가 약재 향이 강해서 젊은 사람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약재를 줄이면, 임씨는 며느리 몰래 약재를 한주먹씩 더 집어넣는다고 한다.

    구기자술이라 하지 않고 구기주라고 한 것은 청양에 다른 구기자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학자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나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구기주(枸杞酒)라고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임씨가 빚는 술은 누룩으로 빚는 전통 구기자술이다. 찹쌀과 멥쌀로 술밥을 찌는데 쌀은 방앗간에서 1등급 쌀로 직접 찧어온다. 수입쌀도 정부미도 아니고 2등급 쌀도 아니라고 한다. 1등급짜리라야 16。 술 도수가 제대로 나온다고 한다. 약재로는 두충잎, 두충피, 감초, 구기자뿌리를 달여서 넣고, 구기자는 따로 달여서 구기자와 함께 넣는다.

    구기자 + 약재 듬뿍 ‘최고의 약술’
    임영순씨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그렇게 술을 많이 먹고도 술국을 한 번도 찾지 않은 것이 신통했다고 한다. 땅의 신선(地仙)이라는 구기자의 효험 때문이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그녀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요새 술을 먹었다면 아마 술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집에서 농사 지은 곡식으로 약재를 듬뿍 담아서 빚은 술을 드셨기에, 사는 동안 건강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임씨는 예전에 시집살이하면서 빚던 방식대로, 술을 하기 때문에 말 그대로 약술이 되어 나온다. 백세주가 보약 반 첩이라면, 구기주는 보약 한 첩이라 할 만하다. 물론 약재 향도 진하다. 그런데 마시고 나면 입안이 끈적이지 않고, 누룩의 잔 맛도 남지 않으며, 감칠맛이 돌아서 한잔 더 마시고 싶은 생각이 절로 인다. 가히 우리 나라 최고의 약술이라는 찬사를 보낼 만하다.

    돌아오는 길에 우산성에 올라 청양 읍내를 내려다보고, 칠갑산 산마루의 휴게소를 거쳐 정산과 유구를 지나 마곡사에 들렀다. 계곡물이 맑게 흐르고 봄이 한창이었다. 진달래와 벚꽃만이 화사한 게 아니라, 새로 움트는 모든 이파리들이 꽃잎처럼 햇살에 빛났다. 춘마곡 추갑사(봄에 마곡사가, 가을에 갑사가 으뜸)라더니, 가슴이 찡했다. 2층 목조건물 대웅보전에 들어서자 높다란 천장의 무늬와 장식들이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대웅보전에 취해 돌아나오는데, 탁자 한쪽엔 춘원 이광수의 시가 적힌 손수건이 걸려 있다.

    “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이 무엇이나 바치고 싶은 이 마음 거기서 나는 보시를 배웠노라. 임에게 보이고자 애써 깨끗이 단장하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지계를 배웠노라. 임이 주시는 것이면 때림이나 꾸지람이나 기쁘게 받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인욕을 배웠노라. 자나깨나 쉴 사이 없이 임을 그리워하고 임 곁으로만 도는 이 마음 거기서 나는 정진을 배웠노라….”

    내게는 이광수의 시가 아니라, 임영순씨의 목소리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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