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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한국의 ‘신귀족’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고만을 꿈꾼다

부와 사회적 지위 겸비, 배타적 특권의식… 유아 때부터 수입명품, 커서는 최고급차 좇는 소비행태

  •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고만을 꿈꾼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고만을 꿈꾼다
중앙일간지 계열 케이블 TV의 PD P씨(34·서울 옥수동)는 최근 자신의 아파트(29평)를 1억8000만원에 팔아치웠다. 경력 8년차인 그의 연봉은 4800만원. 대학 동기들에 비해 훨씬 많은 편이지만 그에겐 ‘급전’이 필요했다. 큰 아들(5)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인 3년 뒤 가족 모두 호주로 1년간 영어 연수를 떠날 계획이기 때문. 최대한 현금을 확보하기 위해 음대 출신인 그의 아내(34) 역시 피아노 레슨 부업에 나섰다.

“IMF 사태를 거치며 월급쟁이의 끝은 뻔하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는가. 내 자식까지 나의 전철을 밟도록 방치할 순 없다.” P씨는 “무한경쟁사회에서 ‘로열 패밀리’에 편입하기 위해선 마땅히 투자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P씨의 경우는 사실 하나의 사례에 지나지 않는다. 갈수록 커지는 계층간 격차에 위기를 느껴 자신의 처지를 2세에게 대물림 하지 않으려는 시도들은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중세 귀족사회로 회귀하는가. ‘네오 노블레스’(neo noblesse). 이른바 ‘신(新)귀족’이 21세기 한국 상류사회를 급격히 재편하고 있다. 소득 양극화가 심화하면서 전문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경제력을 쌓은 억대 연봉자와 전문직 종사자들이 부동산과 금융자산 등 비근로소득에 의존해 온 고전적 부유층을 대체하며 신계급사회 계층분화의 주역으로 떠오른 것.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고만을 꿈꾼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지난해 통계청의 도시가계조사 결과를 분석해 내놓은 ‘빈부격차 확대요인의 분석과 빈곤 서민생활 대책 연구’는 이런 경향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연구자료에 따르면 국내 인구의 1.6%가 전체 소비 지출의 25%를 차지했다는 것(1999년 기준). 또 도시근로자 가구 중 상위 20%의 소득 점유율이 37%(97년)에서 40%(99년)로 높아졌고, 특히 최상위 5%의 소득 점유율은 13%에서 16%로 늘어나는 등 부의 극소수층 편중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사회비평지 ‘아웃사이더’(2호)에서 작가 홍세화씨가 한국을 ‘기득권이란 견고한 성채에 자리한 사회 귀족들의 공화국’으로 정의했듯이, 폐쇄적인 ‘귀족사회’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다만 이들의 독특한 소비행태를 엿보면 ‘격조’를 추구하는 ‘귀족성’은 쉽게 두드러진다.

지난 1월 오픈한 ‘노블베이비N닷컴’(www.noblebabyn.com)은 국내 최초의 100% 유료 멤버십 육아 사이트. ‘루이지닷컴’ ‘노블리안’ 등 익히 알려진 성인 대상 ‘귀족 사이트’처럼 고품격을 표방한 만큼 회원 700여 명 중 30%가 서울 강남의 부유층이다. 가입비 2만원, 연회비 6만원이란 가입조건만 따진다면 그리 고급스러울 것 같지 않지만, 가입을 ‘왕후(엄마)와 왕후의 아기가 성(城)에 입주하는 것’으로 표현하듯 이 사이트는 철저히 상류층 2세의 육아에 초점을 맞췄다.

20여 종의 토털서비스 중엔 6세 이하 유아를 위한 수입명품 의류 판매를 비롯, 아로마테라피를 활용한 유아 출장 마사지, 미국식 ‘샤워 파티’ 프로그램(선물 받는 사람이 선물을 사줄 사람을 초청해 구매하도록 하는 쇼핑몰) 등 갖가지 유료 서비스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사이트상에서 동영상을 보고 신체치수를 입력한 뒤 디자이너에게 주문하는 맞춤 임산복은 한 세트가 100만원이 넘는 고가임에도 인기를 끌고 있다. 사이트 운영업체 ㈜엔비&컴퍼니의 박영화 상품기획팀 차장은 “전문직과 고소득 지식층을 타깃으로 한 만큼 성과는 만족스럽다”며 “평범을 지양한 더욱 차별화한 고급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고만을 꿈꾼다
조기 영어교육을 위해 수업료가 월 100만원대인 최고급 영어유치원에 자녀를 보내려는 상류층의 교육방식 또한 ‘적게 낳되 최상급으로 키운다’는 신귀족 라이프 스타일의 일면을 드러낸다. 유아에게 음악 미술 영어 등을 동시에 가르치는 ‘하바 놀이학교’의 경우 한 달 수업료가 32만~38만원이지만 대기자가 넘친다. 강남구 수서지역 대기자만 300명선. 이는 소득격차에 따라 불거진 교육의 빈부차를 방증한다.

이뿐 아니다. 자녀의 미래 건강을 지키려 신생아의 탯줄혈액을 보관하는 부유층 부모도 급증 추세다. 탯줄 속 혈액(제대혈)엔 백혈병과 재생불량성 빈혈, 각종 암 치료에 필요한 조혈모세포(다양한 혈액세포를 만들어 낸다)가 풍부하게 들어 있어 출산 때 이 혈액을 채취해 특수냉동 보관하면 유사시 조혈모세포 이식수술을 통해 골수이식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 지난 1월부터 ‘제대혈 가족은행’을 운영중인 의료벤처 ‘메디포스트’(www.medi-post.co.kr)엔 월 100~300명이 제대혈 보관을 의뢰한다. 비용은 15년에 95만원으로 만만치 않은 편. 이 회사 양윤선 이사(37)는 “경제적 여력이 있는 고객이 대다수지만 선진국에선 활성화한 서비스인 만큼 사치성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보험’ 개념으로 이해해달라”면서도 “전체 회원 수는 밝힐 수 없다”고 덧붙였다.

사실 신귀족의 외면을 귀족답게 하는 것은 ‘배타적 특권의식’의 형성을 조장하는 기업들의 공격적 리치(rich) 마케팅과 신분적 우월감을 느끼려는 부유층의 욕구가 교묘히 맞물린 접점에서 비롯한다. 수입차 판촉이 대표적 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올 1·4분기에 판매한 수입차는 1621대. 지난해 같은 기간 877대에 비해 84%나 늘었다. 그럼에도 한성자동차㈜는 최근까지 국내 최고가였던 BMW L7(2억4900만원)을 제치고 지난 3월 세계 최고급 쿠페(뒷문이 없는 스포츠카)인 ‘벤츠 CL600’의 판매를 시작했다. 대당 가격은 2억7000만원. 현재 1대만 팔렸지만 문의가 꾸준히 이어져 새 수요를 창출하려는 심리적 마케팅 전술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귀족은 비록 소비를 즐기는 성향은 있지만 부에 대해 냉철한 의식구조를 갖고 있어 과거 사회적 물의를 빚은 ‘오렌지족’ 과는 완전히 다른 부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오히려 세속적 성공과 자유정신의 균형을 꾀하는 미국의 신상류층인 ‘보보스’(bobos: 부르주아와 보헤미안의 합성어로 자유분방한 유산계급을 지칭)에 가깝다는 것이다.

연회비 12만원인 플래티넘카드 회원을 자사 전체 회원의 0.16%(3만 명)로 제한관리하는 BC 카드의 한 관계자는 “신귀족은 질을 중시해 명품을 선호하면서도 금전에 매몰되진 않는다. 예술지향적이고 고상함을 추구하는 경향을 보인다”며 “이들이 ‘귀족적’인 대접을 받고자 하는 이유 또한 경제결정론을 최고 가치로 섬긴 이전 재력가들과의 확연한 ‘성분’ 차이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

이는 신귀족의 부가 상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합법적 경제활동으로 일군 정당한 것이라는 사실과도 통한다. 보건사회연구원 박순일 박사(재정학)는 “부의 창출 원천이 자본과 노동력에서 지식과 정보로 중심이동이 이뤄지는 격변기에서 디지털 시대에 적합한 지식정보력을 갖춘 이들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결과 ‘골드 칼라’로 떠오를 수 있었다”고 진단한다. 때문에 당대엔 ‘귀족화’하지 못했더라도 2세만큼은 언제든 ‘귀족’의 반열에 편입할 능력을 갖춘 ‘귀족 예비군’으로 길러내려는 차상위계층과 중산층의 노력은 당연해 보인다는 것. 강남구 역삼동의 주부 L씨(35)는 “돈 앞에 굴복하다가도 뒤돌아서면 부자들의 편법상속과 세금탈루를 비난하던 행태는 옛 이야기 아니냐”며 “귀족계층에 속할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아이들을 ‘만드는’ 경향은 다소 여유 있는 층에선 보편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2세를 위해 자신을 허무는 이런 노력들이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워 올리는’ 계층 상승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학력과 재산, 경쟁력을 겸비한 신귀족들간 폐쇄적 교류는 그렇지 못한 다른 계층의 진입을 더욱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최고만을 꿈꾼다
‘특권층’의 만남을 주선하는 결혼정보클럽 ‘노블커플닷컴’(www.noblecouple.com)은 지난해 6월 오픈 이후 300여 명의 VIP 회원을 두고 있다. 이 업체의 직원 중 이사급은 모두 해외유학파. 대표 전상용씨는 “남성회원은 변호사, CPA, 고소득 연봉자 등을, 여성회원의 경우 직업 외에도 명문대 출신이나 미인대회 경력자를 우선시한다”며 “능력과 교양을 두루 갖추지 못하면 재산만 많다고 회원이 될 수는 없다”고 밝힌다.

㈜좋은만남 선우는 아예 ‘명문가팀’을 별도 운영중이다. △가족재산 50억원 이상 △부모와 당사자 모두 명문대 출신 △부모 직업 2급 공무원 또는 대기업체 사장 이상 △당사자가 전문직이거나 1억원 이상 연봉자 △당사자 외모가 준수할 것 등 5가지 요건 중 서너 가지는 충족해야 회원자격이 주어진다. 가입비는 100만원. 일반회원의 58만원에 비해 훨씬 높다. 전선애 명문가 팀장은 “현재 회원은 600명선”이라며 “상류층끼리는 공통분모가 많아 성혼율이 일반회원보다 10% 가량 높은 40%에 이른다”고 귀띔한다.

이래저래 귀족일 수 있는 여건은 충분히 갖춰진 셈이다. ‘귀족들의 천국’이랄 수 있는 이런 신계급사회는 지속될 것인가. 그리고 대안은 없는 것일까.

“자본주의 고도화에 따른 빈부격차는 필연적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부유층의 연령 또한 점점 낮아지고 있다.” LG경제연구원 김성식 연구위원은 “부의 재분배를 위해 선진복지국가에서처럼 극부층과 중산층, 극빈층에 대한 차별적 조세정책 등이 이뤄지지 않으면 빈부격차 심화는 사회 안정성을 크게 해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부를 성취했다는 이유만으로 상류층에 비판의 칼날을 세우거나 백안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부가 증대하지 않는 절박한 상황에서 ‘저 높은 곳’을 그저 올려다봐야만 하는 절대 다수의 좌절감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책임있는 부’(responsible wealth)가 요청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주간동아 2001.04.26 281호 (p34~36)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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