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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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 조종사’ 안찾았나 못찾았나

스파이커 소령 91년 걸프전서 추락…美정부 사망 발표 후 최근까지 생존설 잇따라

  • 입력2005-12-20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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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종 조종사’ 안찾았나 못찾았나
    1991년 1월 17일 걸프전이 시작되자마자 미군에서 첫 사상자가 나왔다. 그는 해군 F/A-18 호넷 전투기의 조종사 마이클 스콧 스파이커 소령이었다. 전쟁이 시작된 첫날, 홍해에 떠 있는 항공모함 새러토가호에서 발진한 그는 바그다드 상공에서 대공포에 맞아 격추되었다. 그가 추락한 뒤 교신이 두절되었으나, 동료들은 귀환 즉시 스파이커 소령의 추락지점을 보고했다. 미 해군 통계엔 F/A-18에서 탈출한 조종사의 90%가 살아 남는다는 조사보고가 있고, 그가 죽었다는 증거는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나 미 해군은 수색에 나서지 않았다.

    미군에는 적지에 고립된 아군을 수색하고 구조하는 특수작전단(SOS)이란 비밀부대가 있지만, 미군은 그를 찾으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전사자로 발표했다. 스파이커 소령은 걸프전 최초의 미군 전사자로 기록된 것이다.

    미국 CBS-TV의 시사 프로그램인 ‘식스티 미니츠’(60 Minutes) 취재팀은 1999년부터 이 사건을 추적하고 있었다. ‘식스티 미니츠’ 팀이 밝혀낸 사건의 내막은 다음과 같다.

    쿠웨이트 해방을 위한 ‘사막의 폭풍’ 작전이 시작된 1991년 1월17일 새벽, 그날 비번인 스파이커 소령은 출격을 자원했다. 새벽 1시30분 스파이커 소령은 동료들과 함께 F/A-18기를 몰고 바그다드로 날아갔다. 그들은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포가 밀집된 지역을 폭격해 적의 방공망을 제압하는 가장 위험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이 바그다드의 목표지점으로 접근하자 이라크군의 대공포는 맹렬한 불을 뿜으며 사격해왔다. 해군 전투기들은 탄막을 뚫고 접근해 마지막 폭탄을 투하하고 전속력으로 빠져나왔다. 바그다드를 빠져나온 그들은 즉시 사령부와 교신을 시도했지만 스파이커 소령은 잠잠했다.

    “스파이커 들리는가? 스파이커 들리면 응답하라!”



    동료들이 반복해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비행중대는 한 대를 잃은 채 새러토가호로 돌아왔고, 파일럿 한 사람이 ‘공중에서 전투기가 폭발하는 섬광을 보았다’며 지도에 지점을 표시해 보고했다. 걸프전 해군 총사령관 스탠 아서 제독에게는 ‘전투기가 폭발해 파일럿과 통신 두절이며,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합니다’는 내용이 보고됐다.

    호넷 전투기들이 귀환한 지 불과 몇 시간 후, 체이니 국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오늘 아침 9시 현재 해군 F/A-18기 한대가 실종되고, 조종사는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국방장관은 공중 폭발과 통신이 두절되었다는 근거만으로 스파이커 소령이 죽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그의 구조를 위해 수색한 적이 있습니까?”

    식스티 미니츠의 취재팀이 아서 제독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물었다.

    “통신이 두절되어 있어 구조를 명령하진 않았소. 구조신호 없이는 효과적인 수색이 어렵기 때문이오.”

    그러나 아서 제독의 이 말은 미 해군이 스파이커 소령의 아내에게 한 설명과는 전혀 달랐다. 1991년 2월2일 새러토가호의 비행단장은 스파이커 소령의 아내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실종현장에서 모든 수색과 구조작전을 실시했습니다.’

    걸프전이 종전된 1991년 3월 스파이커 소령의 아내는 해군이 사망확인서에 서명해줄 것을 요구하자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서명했다. 해군은 스파이커 소령을 전사자로 공식 발표했다. 전쟁이 승리로 끝나자 워싱턴에선 참전 병사들의 퍼레이드가 있었고, 부시 대통령은 “월남전에서 무너진 자존심을 마침내 회복해냈다”며 기쁨에 겨워했다. 이처럼 전 미국이 들떠있을 때, 엘링턴 국립묘지에선 쓸쓸한 장례식이 열렸다. 시신도 없는 빈 무덤의 묘비엔 이렇게 쓰였다.

    ‘마이클 스콧 스파이커 해군 소령, 1957년 7월12일생, 1991년 1월17일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전사.’

    스파이커 사건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93년 12월, 이라크 사막으로 사냥을 나간 카타르군 고위 장교들이 미군 전투기의 잔해를 발견했다. 그들은 기념 사진을 찍었으며, 멀쩡한 기체의 앞부분을 세워놓고도 찍었다. 그리곤 잔해에서 레이더 장비를 찾아내 사진과 함께 미대사관에 갖다주었다. 워싱턴으로 보내진 장비의 일련번호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스파이커의 전투기였다. 사진을 분석한 결과 항공기는 공중에서 폭발한 게 아니었다.

    사진을 본 아서 제독은 식스티 미니츠 취재팀에게 털어놓았다.

    “사진에서 가장 주의를 끈 건 조종석 덮개인 캐노피가 기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였소. 그건… 파일럿이 탈출했다는 뜻이오.”

    기자가 아서 제독에게 물었다. “조종사의 탈출을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그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썩 좋지 않았소….”

    그때서야 국방부는 걸프전 당시 스파이 위성이 촬영한 사진을 재검토했고, 사막에 추락한 전투기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추락지점, 이라크, 1991년 2월’이라고 쓰인 위성사진에는 호넷 전투기의 잔해가 선명하게 나타나 있다. 스파이커 소령의 전투기는 동료들이 보고한 추락지점에 있었음에도 그를 찾아내려는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은 채 3년 간 방치되었던 것이다.

    1994년 4월 아서 제독은 특수작전단에 수색작전을 명령했다. 그러나 신속해야 할 수색작업은 몇 달이나 지연되었다. 그 해 12월 합참의장 샬리캐시빌리는 수색작업을 금지시켰다. 수색 작전은 무산되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게 정식으로 허락받은 뒤 다시 수색작전을 펴기로 했다.

    이듬해인 1995년 3월, 사담 후세인은 미군측의 수색작업을 허락했다. 그러나 실종자 조사반은 9개월이 지나서야 그곳에 도착했다. 가보니 이라크인들이 다녀간 다음이라 조종석은 사라졌고, 현장은 샅샅이 파헤쳐져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그곳에서도 조사반은 기체가 공중폭발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타다 남은 조명탄과 낙하산의 일부를 발견했다. 수색 마지막 날에는 놀랍게도 조종복을 찾아냈다. 누더기가 된 조종복엔 피를 흘린 흔적이 없었다. 그것은 파일럿이 탈출할 때 살아남았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그러나 국방성은 엉뚱한 내용을 발표했다. ‘추락한 파일럿이 살아 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식스티 미니츠 팀이 조종복을 스파이커 소령의 룸메이트였던 토니 알베이노에게 보여주자 그는 “왼쪽 어깨의 기장이나 오른쪽 가슴 기장도 같다. 이건 스파이커의 조종복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스파이커 소령이 출격하던 날, 파일럿들에게는 신형 무전기가 지급됐다. 무전기 담당자인 테드 페이건은 걱정이 많았다. “평소 쓰던 것보다 훨씬 커 조종복 주머니에 맞지 않았고 2인치나 튀어 나왔어요. 주머니의 플랩으로도 무전기를 고정시킬 수 없어서, 파일럿에게 충격을 받으면 무전기가 튀어나갈 거라고 말해줬지요.”

    그는 스파이커 소령이 실종된 뒤 상관에게 그가 탈출했더라도 무전기를 잃어버려 사막에서 통신이 두절된 채로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지휘관은 무전기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은 채 페이건의 말을 묵살했다.

    최근 CIA(미중앙정보국)는 요르단으로 망명한 한 이라크인을 조사했다. 그는 걸프전이 시작된 직후 사막에 추락한 미군 파일럿 한 사람을 바그다드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거짓말 탐지기를 두번이나 통과한 그에게 여덟 명의 해군 파일럿이 실린 사진 한 장을 보여주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스파이커 소령을 가리켰다. 그 이라크인은 스파이커 소령을 만났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부시 대통령은 의회에서 이렇게 연설한 적이 있다. “스파이커 소령의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편지에서 아이들이 자라면 아빠가 옳은 일을 하다 장렬히 전사했다고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가 옳은 일을 했다면 무덤이 필요 없을지도 모를 용감한 군인을 위해 그의 조국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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