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10

1999.11.25

가도가도 은빛길, 끝없는 갈대밭

3km물길 따라 빼곡한 갈대숲… 금빛 해거름·뽀얀 물안개 ‘가슴이 두근두근’

  • 양영훈 여행칼럼니스트

    입력2007-03-09 14:3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가도가도 은빛길, 끝없는 갈대밭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 밤새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서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까? ….”60년대 당시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찬사를 받았던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霧津紀行)의 일부다. 물론 소설 속의 무진은 가상의 공간이다. 하지만 늦은 가을철의 동틀 무렵에 순천만의 대대포(大垈浦)에서 무성한 갈대밭 위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바라보노라면 그 소설 속의 풍경이 머리 속에 또렷하게 그려진다.

    은빛으로 일렁거리는 드넓은 갈대밭, 그 갈대밭 사이로 뱀처럼 구불거리는 물길, 물길과 갈대밭 위로 스멀거리는 물안개 등의 환상적인 어울림이 소설보다 더욱 소설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실제로 순천에서 성장한 작가도 이곳 동천 하류의 갈대밭과 대대포를 ‘무진기행’의 배경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무진의 명산물은 안개가 아니라 갈대밭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개는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지만 이처럼 풍치 좋은 갈대밭은 달리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순천시 교량동과 대대동, 해룡면의 중흥리 해창리 선학리 등에 걸쳐 있는 순천만 갈대밭의 총 면적은 약 15만평. 순천시내를 관통하는 동천과 순천시 상사면에서 흘러온 이사천의 합수 지점부터 하구에 이르는 3km쯤의 물길 양쪽이 죄다 갈대밭으로 뒤덮여 있다. 그것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거나 성기게 군락을 이룬 여느 갈대밭과는 달리, 사람의 키보다 훨씬 더 웃자란 갈대들이 빈틈없이 밀생(密生)한 갈대밭이다. 갈대 군락지로는 국내 최대 규모라고 한다.

    갈대는 억새와 마찬가지로 볏과에 속하는 식물로 8~9월에 꽃을 피웠다가 10~11월경에 씨앗을 맺는다. 그러므로 이맘때쯤의 늦가을에 갈대 줄기의 끄트머리마다 솜털뭉치처럼 매달려 있는 것은 꽃이 아니라 씨앗이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꽃을 매달고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지만 억새와 갈대는 씨가 한창 여물어 가는 이즈음에 가장 볼 만하다. 북슬북슬한 씨앗의 뭉치가 햇살의 기운에 따라 은빛 잿빛 금빛 등으로 채색되는 모습도 장관이고, 한 줄기 가녀린 바람에도 일제히 흐느적거리는 풍경도 망망한 바다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장엄하고 아름답다.

    가도가도 은빛길, 끝없는 갈대밭
    순천시내에서 대대동으로 가다가 교량교를 건너자마자 일부러 둑길로 들어섰다. 승용차로 한참을 달렸는데도 차창 밖에 펼쳐진 갈대밭의 끝은 쉬이 드러나지 않았다. 둑길을 찬찬히 걸으며 구불거리는 물길과 광활한 갈대밭이 연출하는 풍정(風情)을 느긋하게 즐기고픈 마음도 없지는 않았으나 길이 하도 멀다 보니 엄두조차 내기가 어려웠다. 이 일대에는 갈대밭만 무성한 게 아니다. 멀리서 보면 갈대밭 일색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물억새 쑥부쟁이 등이 곳곳마다 크고 작은 무리를 이루어 자리잡고 있다. 하구의 갈대밭 저편에는 불그스레한 칠면초 군락지도 들어서 있다.

    1년초인 칠면초는 주로 중부지방 이남의 갯벌에서 자라는 염습지(鹽濕地) 식물인데,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차츰 자홍(紫紅)이나 붉은빛으로 바뀌어간다. 칠면초라는 이름도 색이 일곱가지로 바뀐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흔히 들국화라 일컫는 쑥부쟁이였다. 대대포구에서 하구쪽으로 이어지는 둑길에서 만난 보랏빛 쑥부쟁이 무리는 바쁜 걸음을 한동안 붙잡아둘 만큼 꽃빛이 선명하고 꽃부리도 탐스러웠다.

    둑길을 서성이며 곱게 핀 쑥부쟁이를 넋놓고 바라보는데 요란한 새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니 수십마리의 흑두루미가 우아한 자태를 한껏 드러내며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50마리는 족히 될 성싶은 흑두루미떼는 대대동 일대의 평야 위를 잠깐 동안 선회하다가 남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곳에는 흑두루미 이외에도 재두루미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등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희귀조류가 간혹 발견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희귀조류 이외에도 도요새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기러기 등을 포함해 약 140종의 새들이 이곳 순천만 일대에서 월동하거나 번식한다고 한다.

    순천만의 갈대밭을 금빛으로 물들이는 일몰과 대대포의 환상적인 새벽 안개를 모두 감상하려면 천상 그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한다. 그럴 때에는 번잡한 순천시내보다는 한적한 소읍인 보성군 벌교읍내에서 묵는 게 좋다. 벌교에서 대대포까지는 차로 20여분만에 다다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귀로에는 낙안읍성 민속마을과 선암사를 들러볼 만하다.

    이집 이맛

    순천 떡갈비 맛 보셨나요


    가도가도 은빛길, 끝없는 갈대밭
    어느 도시나 맛집으로 소문난 음식점들은 대개 시청 같은 관공서 주변에 몰려 있다. 순천 시내도 마찬가지다. 순천에서 맛과 전통에서 내로라하는 집들이 대부분 시청에서 걸어서 10분 안팎의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떡갈비와 양곱창구이로 소문난 금빈회관(0661-744-5554)도 순천시청 바로 앞쪽의 골목에 들어앉아 있다.

    떡갈비는 쇠고기의 갈비살만을 다져서 갖은 양념을 한 다음에 숯불에다 구워낸 음식이다. 그런데 금빈회관의 떡갈비는 여느 맛집의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먼저 갈비뼈에다 다진 살코기를 붙여서 구워내지 않고 살코기만을 납작하게 다져서 굽는다는 점이 다르다. 주인 김금숙씨의 말로는 다진 고기를 뼈에다 둘러서 구우면 안팎이 골고루 익지 않기 때문이란다. 아무려나 이 집의 떡갈비는 그야말로 시루떡처럼 납작하고 두툼해서 먹기도 수월하거니와 입안에서 씹히는 고기맛이 아주 좋다. 그리고 또다른 하나는 돼지고기로도 떡갈비를 구워낸다는 점인데, 웬만한 미식가가 아니면 쇠고기로 만든 떡갈비와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맛이 일품이다. 돼지떡갈비 정식은 1인분에 6000원, 소떡갈비 정식은 1만원이다. 떡갈비만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질 정도로 양(1인분에 200g)도 푸짐한 편이다. 게다가 무엇을 시키든간에 파전 북어머리찜 돈배젓(전어밤젓) 황석어젓 쇠고기장조림 등 전라도 특유의 푸짐하고도 맛깔스런 밑반찬이 딸려 나온다. 양곱창구이(1인분에 7000원)도 20여년 경력의 주인 김씨가 자신있게 내놓는 메뉴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