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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리포트

‘흙수저’들의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안녕들하십니까’ 이후 3년 써서 붙이고, 찍어 공유하는 新대자보 풍속도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김무연·김완진·박세준·유설희·유수빈·이규원 인턴기자

‘흙수저’들의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흙수저’들의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2014년 서울 성균관대에서 열린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백일장에서 참가자가 손글씨로 대자보를 쓰고 있다. 동아일보

1월 중순, 서울 경희대 청운관 앞 대자보판에는 ‘대자보가 너무 많아 게시물을 추가로 붙이기 어렵다. 게시물 부착 기간을 최대 2주로 제한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다른 대학들의 상황도 마찬가지. 서울시내 대학마다 나붙은 크고 작은 대자보가 오가는 학생의 이목을 끌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합의, 기말시험 집단 부정행위, 근로장학생 고용 불안, 학과 통폐합 등 주제도 다양했다. 1990년대 말 인터넷 문화 확산과 더불어 자취를 감춘 듯했던 대자보가 대학 내 소통 도구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나치 독일의 교육강령을 인용해 정부를 비판한 서울대 대자보,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패러디한 경희대 대자보, 북한의 선전 전단 말투를 흉내 낸 연세대 대자보 등이 캠퍼스 경계를 넘어 사회에서까지 널리 화제가 되며 새로운 대자보 문화의 시작을 알렸다.
권순민(23·고려대 사회학과) 씨는 그 계기를 2013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에서 찾았다. 그해 12월 주현우(당시 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씨는 이 제목의 대자보를 통해 당시 사회적 이슈였던 철도 민영화, 밀양송전탑 건설,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논란 등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이 글은 여러 언론에 보도되며 대학가는 물론 사회 전반에 널리 알려졌고, 수많은 유사 대자보를 낳았다.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이 새누리당 당사에 ‘안녕들하십니까’란 제목의 대자보를 붙일 만큼 정치적 파장도 컸다. 권씨는 “이 대자보 이후 대학가에 스스로 대자보를 써서 붙이는 이른바 ‘안녕들하십니까 세대’가 나타났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최근 고려대가 근로장학생의 인권을 ‘착취’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내용의 대자보 ‘꼰대들에게 바칩니다’를 교내 정경대 후문에 붙였다.



SNS에 실려 대학 담 넘는 대자보

오규민 한양대 총학생회장도 권씨와 같은 생각이다. 그는 “‘안녕들하십니까’ 이후 대자보가 눈에 띄게 늘었고, 특히 개인이 붙이는 대자보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이하준 서강대 부총학생회장도 “‘안녕들하십니까’ 이후 학생들의 사회 참여 의식이 높아지고 학내 자치단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며 “최근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나 위안부 문제 등 사회 문제에 대해 학생 개인이 써 붙이는 대자보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눈에 띄는 건 이런 대자보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해 전파되면서 사회적으로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청주대를 졸업한 박수연 씨는 “최근 사람들이 대자보를 보게 되는 창구는 주로 SNS”라며 “대자보 내용이 SNS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대자보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고, 이로 인해 대자보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것 같다”고 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원도 이러한 ‘온라인-오프라인 상호작용’을 최근 대자보 문화의 특징으로 꼽았다. SNS에서 논의 및 소비되는 이슈가 대자보라는 형식을 통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이것이 다시 SNS를 통해 확산되는 구조가 생겨났다는 의견이다. 전국대학생종교단체 회장으로 활동했던 허승규(27·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씨도 자신이 입학했던 2007년과 최근의 대자보 양상이 변한 것을 실감한다며 “당시 대자보는 오프라인 미디어의 성격이 강했는데, 최근에는 대자보 자체를 PDF 파일 등의 형태로 만들어 페이스북 등에 업로드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고 밝혔다.


‘흙수저’들의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2013년 고려대에 붙어 화제를 모은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동아일보

실제로 2015년 정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을 발표했을 때 ‘전국 대학생 대자보 쓰기 운동’을 제안한 대학생단체 ‘세상에 도전하는 대학 희망’은 페이스북 계정(univhope20)을 통해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대자보를 공유했다. 대자보 문화가 활성화된 고려대에는 자체적으로 관련 자료를 아카이빙(archiving)하고 공유하는 ‘정대후문 게시판’이라는 이름의 페이스북 계정(kuboardrecord)이 있다. 고려대 생활도서관이 운영하는 이 페이지에 공유된 대자보 수는 1월 17일 현재 379개. 이 페이스북 이용자들은 등록된 대자보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댓글을 달면서 또 다른 방식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해당 계정 관리자는 이에 대해 “오프라인 대자보는 온라인에서라면 흘러가고 말았을 논의를 자진 철거를 약속한 기간만큼 게시판에 고정해둘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 길을 지나는 사람, 그중에서도 벽보에 관심을 가진 사람만 내용을 읽을 수 있다는 한계도 있다. 이를 온라인에서 공유하는 행위를 통해 다른 사회 구성원까지 논의의 장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대자보 온라인 아카이빙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또 “대자보를 모아두는 일은 다음 세대의 사고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오늘의 자료를 남긴다는 점에서도 의미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대자보기록관’(daejabolog.blogspot.kr)처럼 e메일을 통해 전국 각지의 대자보 정보를 모으고 내용과 사진을 대학별로 분류해 모아두는 인터넷 블로그도 생겼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직접 온라인에 글을 쓰는 대신 오프라인에 붙인 글을 촬영해 공유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걸까. 이에 대해 김성진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불특정 다수의 동시 접근이 가능한 인터넷 공간이 획기적인 소통의 장인 건 맞지만 한계도 많다”며 “인터넷을 기반 삼아 논의해본 사람들은 진지한 대화가 힘들고, 다중이 모이는 곳에서는 곧잘 논의가 진영 싸움으로 변질돼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온라인 공간에서의 의사소통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대자보의 재림이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는 “요즘 청년들에게는 직접 손글씨를 쓰고 그것을 게시판에 붙이는 행위 자체가 자기 발언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라는 의견이다. 그는 또 “SNS상에서 대자보는 구체성을 가진 하나의 이미지로 차별화되기 때문에 일반 텍스트보다 좀 더 많은 이용자의 눈길을 끄는 효과를 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강대 사회학과 13학번 전모 씨도 ‘안녕들하십니까’가 열풍을 끈 까닭에 대해 “당시만 해도 대학 내 대자보가 대부분 컴퓨터를 이용해 작성한 것이었기에 손글씨의 인간미와 진정성이 눈길을 끈 것”이라고 평했다. 대학생 이새나(25·성균관대 국문과) 씨는 “대자보에는 글쓴이의 필체가 담겨 있고 가로쓰기, 세로쓰기 등의 형식과 여백 활용 등을 통해서도 쓴 사람의 정체성을 짐작할 수 있어 글 내용을 SNS보다 훨씬 무겁게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 있다”고 밝혔다.


‘흙수저’들의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2015년 12월 고려대에 붙은 ‘김일성 만세’ 등의 대자보. 최근 대학가에는 눈길을 끄는 제목과 형식으로 화제를 모으는 대자보가 크게 늘고 있다. 동아일보

형식은 고전적으로, 내용은 톡톡 튀게

이 때문에 최근에는 대학별로 독특한 대자보 형식이 유행하기도 한다. 권예하 경희대 총학생회 집행위원장은 “경희대에는 학생들이 대자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A4 용지 또는 포스트잇 같은 작은 종이에 적어 댓글 형태로 게시하는 문화가 있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는 학생들의 포스트잇 추모 대자보가 이어졌다”며 오프라인 대자보만 가질 수 있는 ‘형식미’가 더 많은 학생을 대자보로 끌어들이는 요소임을 확인했다. 대학생 한원섭(24·서울대 기계공학과) 씨도 “최근 한 학생 단체가 교내에 성소수자들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인 적이 있는데, 며칠 뒤 해당 대자보의 비문과 논리적 오류 등을 지적하는 ‘첨삭문’ 형식의 반박 대자보가 붙어 많은 학생이 ‘참신하다’고 평가했다”고 소개했다.  
이러한 젊은 세대의 감수성은 대자보의 콘텐츠에도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1980년대 대학 생활을 했던 이들에게 대자보가 기성언론에 잘 보도되지 않는 사건을 사회에 알리는 창구 구실을 했다면, 이제는 좀 더 개인적이고 소소한 문제들이 대자보에 등장하는 것이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86학번 김모 씨는 “내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 대자보에는 주로 신군부에 대한 비판이나 민주화에 대한 갈망 등이 담겨 있었다. 흰 전지에 붉은 매직으로 ‘직선제 개헌해 친미독재 현정권 분쇄하자’ 같은 투쟁구호들을 써놓았던 대자보가 기억난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근엔 양상이 다르다. 아주대 사회과학동아리 ‘세아’ 회원 차모(25) 씨는 “총학생회나 단과대 학생회 대자보는 학내 구조조정, 학과 통폐합 등 교내 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의 개인이나 동아리, 소모임 등이 오히려 대자보를 통해 정치·사회적 발언을 한다”고 밝혔다. 좀 더 일반적으로 보이는 건 생활밀착형 주제의 대자보다. 고려대 조교 신희정(26) 씨는 “최근에는 사회 현안에 대한 의견을 내기보다 개인적인 부당함을 호소하는 글이 많아졌다”며 “그들이 겪는 부조리도 사회 구조적 문제인 경우가 많은데 그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처럼 보여 아쉬울 때가 있다”고 평했다.
글투도 달라지고 있다. 최강토(성균관대 신방과 4학년 수료) 씨는 “열심히 대자보를 써도 사람들이 읽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나”라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면서 ‘재미있는 글’의 힘을 알게 된 요즘 세대는 사람들 이목을 집중시키려면 신선한 제목과 글 양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충남대를 졸업한 취업준비생 박재연(27) 씨는 “일부 대자보는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것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데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며 “과거에 비해 너무 가볍고 단순하게 비꼬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김종진 연구원은 이에 대해 “과거에는 학생들이 ‘민주화’ 같은 거대 담론을 논의했다면, 이제는 주로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제기하는 사회가 됐다. 사회가 양극화 또는 계층화되면서 학생들의 자기 고민이 깊어진 결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사회 변화의 출발점 돼야”

‘흙수저’들의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인터넷 대자보 아카이빙 블로그 ‘대자보기록관’에 올라와 있는 최근 대학가 대자보들. 사진 출처 · 대자보기록관

이런 현상은 학생회의 성격 변화와도 관련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학생회 관계자들 사이에는 정치·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면 학생들에게 외면받는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지역 한 대학 총학생회 관계자는 “총학생회가 정치적 의견을 드러내거나 사회 문제에 대해 발언하면 학생들의 반응이 엇갈린다. 가급적 중립적인 관점에서 학생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데 초점을 맞추려 한다”고 밝혔다.
한편 청년들의 취업난이 극심해진 현실에서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 때문에 몸을 사리는 대학생이 늘어났다는 의견도 있다. 2015년 총장 선임 과정에서의 종단 개입 문제로 시끄러웠던 동국대에서는 학생 단체 ‘미래를 여는 동국 공동추진위원회’가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대자보 대신 전해드립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해 화제를 끌었다. 동국대 학내 문제에 대한 논평이나 소감 등을 보내면 대자보를 만들어 제보자가 원하는 장소에 붙여주는 방식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동국대 대학원생 최장훈(30) 씨는 “학내 문제에 제 나름의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의견 표현하기를 망설이는 학생들이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대신해 대자보를 써 붙여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현재의 대자보 열기가 계속 이어지려면 대학생들의 좀 더 적극적인 의식과 참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김종진 연구원은 “과거 대자보는 다수의 시선을 끌지는 못해도 구조를 변화시킬 만한 힘을 갖고 있었다. 체계적인 움직임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대자보는 시의적인 이슈에 관심을 두다 보니 다수를 선동하기는 하지만 사회를 바꿀 동력은 떨어진다. 시의성이 사라지면 사회의 관심도 사라지고, 결국 변화를 이끌 추진력도 잃고 만다”며 “독일에서는 헌법상 의무교육이 명시돼 있는데도 대학이 등록금을 걷자 학생들이 저항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그 결과로 등록금제도가 폐지되는 실질적·사회적 변화가 나타났다. 우리 학생들도 이렇게 실질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주간동아 2016.01.27 1023호 (p32~35)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김무연·김완진·박세준·유설희·유수빈·이규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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