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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지식 자주성·문화 다양성 종결”

[조경란의 21세기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어떻게 죽을까” 궁리한 中 지식인

  •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지식 자주성·문화 다양성 종결”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 후 중국공산당은 체제에 자신감을 갖고 문화대혁명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모습. [뉴시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최 후 중국공산당은 체제에 자신감을 갖고 문화대혁명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 사진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모습. [뉴시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중국 지식인은 어떻게 존재했는가. 중국공산당과 지식인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그 답을 얻기 위해선 마오쩌둥(毛澤東) 시기 30년 동안 중국 지식인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당시 체험은 지금도 지식인에겐 트라우마의 저수지와 같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문혁)으로 이어진 극심한 혼란은 지식인뿐 아니라 중국 사회 전반에 심대한 상처를 남겼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 소련공산당 서기장의 사망은 중국 지식인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 ‘부용진’ ‘푸른 연’ 등을 보면 스탈린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등장인물인 학교 교사가 결혼식을 미루는 등 자숙 분위기가 조성된다.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쇼프 제1서기의 스탈린 비판은 마오쩌둥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중국공산당이 백화제방(百花齊放), 백가쟁명(百家爭鳴), 즉 ‘쌍백(雙百)’ 방침을 추진한 것은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모두 숙청한 스탈린과 차별화하기 위해서였다. 당원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국정 방향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당 외부 인사는 좀 더 대담하게 당의 결점을 폭로해달라. 당은 당 외부 인사 숙청 같은 것은 결코 생각지 않는다”(‘런민(人民)일보’ 1957년 5월 17일자)며 지식인들의 발언 욕구를 자극했다. 그 덕에 ‘쌍백’ 분위기가 단기간에 고조됐다.

“사회주의 반대자 1200만 명 진압”

그러나 이내 중국 사회는 반(反)우파 투쟁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마오는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시작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연설을 한다.

“현재 전국에 사회주의를 찬성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6억 인구 중 10%인 6000만 명이다. 이 가운데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부류는 사회주의를 단순히 찬성하지 않는 자들로, 교육이 필요하다. 다른 한 부류인 약 1200만 명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압해야 한다.”

여기서 1200만 명이라는 숫자는 마오의 주관적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마오는 1949년 중국을 군사적으로 통일한 것에 이어 1957년 반우파 투쟁을 통해 사상을 통일하려 한 것이다. 두 번째 중국 통일은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1200만 명을 직접 타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신중국 성립 초기 마오가 가장 걱정한 부분은 저항적 청년 지식인과 농민이 연합하는 것이었다. 마오가 반우파 투쟁을 시작한 이유 중 하나는 청년 학생들이 이미 농촌으로 들어가 불만의 불을 지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우파 투쟁으로 중국공산당 독재는 강화됐다. 그 과정에서 마오의 독특한 이론인 계속혁명이론이 탄생했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중 하나인 ‘광밍(光明)일보’ 편집장 추안핑(储安平)은 1957년 5월 “최고위직에 공산당원을 배치했기에 그들 안색을 살피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며 ‘당천하’를 비판했다. 같은 해 6월 2일에는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는 1949년 이전에는 당 외부 지도자가 정부 정책 결정에 항상 참여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어기고 있다”며 날을 세웠다. 반우파 투쟁 당시 부모가 ‘우파 두목’으로 몰려 고초를 겪은 장이허(章詒和) 중국예술연구원 희곡연구소 연구원이 쓴 ‘나의 중국 현대사’에 따르면 공산당을 향해 할 말을 한 지식인은 이후 대부분 실종되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자살했다.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 우파(右派)로 지목된 인사를 조리돌림하는 홍위병. [동아DB]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 우파(右派)로 지목된 인사를 조리돌림하는 홍위병. [동아DB]

반우파 투쟁은 문혁의 기원이기도 하다. 문혁은 이념과 현실, 의도와 결과가 현저히 괴리된 정치운동이었다. 그렇다면 문혁 시기 지식인은 어땠을까. 중국의 비판적 유학자 량수밍(梁漱溟)의 경험이 당시 지식인이 겪은 고초를 잘 보여준다. 문혁이 시작된 후인 1966년 8월 24일 그의 집에 홍위병이 들이닥쳤다. 홍위병은 족자, 그림, 골동품을 모두 꺼내 찢어버리고 엄청난 양의 책을 불태웠다. 집안 3대에 걸쳐 모은 진귀한 고서와 명·청나라 명사의 서예 작품이 모두 타 없어지는 데 며칠이 걸렸다고 한다. 량수밍 집안은 지식인 사회에서 대대로 존경받았으나 홍위병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었다.

문혁의 참상은 문화재 파괴에 그치지 않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식인이 받은 모욕과 위협이었다. 당대 많은 지식인이 “어떻게 자살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하며 그 방법을 궁리할 정도였다. 문혁 시기 지식인의 사망 경위를 연구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문혁의 참상을 캐내 알리는 것이 역사화 작업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2000년대 홍콩의 한 연구자가 문혁 당시 지식인 약 600명의 사망 경위를 밝히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인들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상황이 이렇기에 아직 문혁에 대한 진상규명은커녕 연구조차 자유롭지 않다. “문혁은 중국에 있고, 문혁학은 외국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중국 내부에서 문혁 연구가 이뤄지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는 것이다. 학술 연구의 빈자리를 다양한 회고록이 채우고 있으나 그마저 대부분 홍콩에서 출판되고 있다.

문혁은 1981년 중국공산당의 ‘역사결의’로 공식적인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이후 공산당의 태도가 또 한 번 바뀐다. 민주화운동 강경 진압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덩샤오핑(鄧少平) 정권은 1992년 자본주의 강화를 재천명(이른바 남순강화)하며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다. 이때 중국공산당은 자본주의 강화와 더불어 사회주의 상품화 전략을 구사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문혁은 철저히 공산당의 상품화 대상이 됐다. 국가권력과 시장이 합세해 문혁을 탈정치화, 탈이데올로기화했다.

덩샤오핑 시기 중국은 자본주의화, 사회주의 상품화를 시작했다. 사진은 중국 선전시에 설치된 덩샤오핑 초상화 입간판. [동아DB]

덩샤오핑 시기 중국은 자본주의화, 사회주의 상품화를 시작했다. 사진은 중국 선전시에 설치된 덩샤오핑 초상화 입간판. [동아DB]

‘지식 장’ 없는 중국

이런 분위기에서 문혁의 경험과 증거물품들은 본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이탈해 오락적 소장품이 되거나 우상 숭배 대상이 됐다. 당시 중국 골동품 가게 어디에서나 문혁 시기 대자보와 팸플릿을 본뜬 ‘홍색물품’을 살 수 있었다. 21세기 들어서도 문혁 탈맥락화는 강화됐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문혁은 중국 모델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 경제성장의 중요한 원인이 문혁에 있다는 논리다. 중국에서 문혁은 19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쭉 소비 대상이 됐을 뿐, 반성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류칭(劉擎) 중국 화동사범대 정치학과 교수는 1949년 이후 30년 동안 중국 지식인의 존재 방식에 대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지식의 자주성과 문화의 다양성은 종결됐다. 지식인은 국가의 한 구성 부분이었으나, 국가는 지식인에게 지식 생산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국가권력이 직접 지식을 생산했고 지식인은 그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이데올로기의 한 구성 요소였을 뿐이라는 것.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표현을 빌리자면 학문의 자주성을 지닌 ‘지식 장(intellectual field)’이 중국에선 등장하지 않았다. 이 같은 지식인의 자주성 상실은 권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뤄졌다. 지식인 당사자들이 자발적으로 원한 결과는 아니었다. 미국의 중국 연구자 메를 골드먼(Merle Goldman) 보스턴대 역사학과 교수는 중국 지식인의 양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식인의 자주성 상실은 결코 지식인 개개인에게 독립적 사고와 견해가 전혀 없다거나 진정한 학술적 노력과 성과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그들이 공공에 대해 비판할 도덕적 용기를 잃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현재 시진핑(習近平) 정부는 ‘공동부유(共同富裕)’를 명분으로 플랫폼 기업, 부동산, 엔터테인먼트산업, 사교육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인 목표가 현실 정치의 표어가 될 때 그 진의를 의심해봐야 한다. 반우파 투쟁과 문혁의 목표도 각각 사상통일과 평등한 유토피아 건설이었지만 실상은 반대파 제거였다. 정당성의 빛 뒤에 무엇이 가려져 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 중국현대사상 · 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 · 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 신좌파·자유주의 · 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 전통 · 근대 · 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





주간동아 1313호 (p54~56)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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