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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을 위한 리뷰

하드보일드의 진가를 곱씹게 만드는 뮤지컬

30년 만에 국내 초연 뮤지컬 ‘시티 오브 엔젤’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하드보일드의 진가를 곱씹게 만드는 뮤지컬

[사진 제공 · 샘컴퍼니]

[사진 제공 · 샘컴퍼니]

1920~40년대 미국에서 독특한 추리극 장르가 탄생한다. 부정부패가 만연한 금주법 시대(1920~33)를 배경으로 세상만사에 냉소적인 사립 탐정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여성 의뢰인이 등장해 치밀한 두뇌게임은 물론, 미묘한 심리게임까지 펼치는 범죄소설. ‘삶은 달걀’이라는 뜻에서 잔혹한 폭력 앞에서도 무감각하다는 것을 넘어 비정하고 냉혹하다는 의미로까지 파생된 ‘하드보일드(hardboiled)’로 불리게 된 장르다. 한국에선 2000년대 들어서야 각광받은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일군의 작가로 대표된다. 

이런 장르 문학이 1940~50년대 스크린으로 옮겨지면서 ‘필름 누아르’라는 영화 장르로 불리게 된다. 그런 할리우드 영화에 심취한 프랑스 영화 평론가들이 ‘검은 영화’ 또는 ‘어두운 영화’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명명한 것이다. 물론 필름 누아르는 하드보일드 소설 외에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영화까지 포괄한다. 

하지만 그 원형이 담긴 대표작으로 거명되는 험프리 보가트 주연의 ‘말타의 매’(1941)와 ‘빅 슬립’(1946)은 모두 하드보일드 소설이 원작이다. 전자는 대실 해밋의 연작소설 주인공인 사립 탐정 샘 스페이드, 후자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사립 탐정 필립 말로가 주인공이다. 중절모와 트렌치코트 차림에 한순간도 냉정함을 잃지 않는 고독한 사나이. 험프리 보가트 하면 떠오르는 그 이미지를 구축한 영화들이다. 특히 ‘빅 슬립’에서 그런 보가트를 흔들리게 만드는 미스터리 가득한 여인을 연기한 로렌 바콜(당시 보가트의 아내)은 ‘필름 누아르의 아이콘’으로 떠오른다. 

하드보일드 형식의 필름 누아르는 스크린에서 끊임없이 변주된다. 실사와 만화를 결합한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1988), 러셀 크로와 킴 베이신저 주연의 ‘LA 컨피덴셜’(1997), 프랭크 밀러 감독의 ‘씬 시티’(2005)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같은 장르의 뮤지컬 작품을 국내에서는 접할 수 없었다. 필름 누아르에 해당하는 뮤지컬은 제법 있다. 1920년대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한 ‘시카고’와 ‘쓰릴 미’ 같은 작품이 대표적이다. 19세기 영국을 무대로 했지만 범죄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지킬 앤 하이드’와 ‘스위니토드’ 역시 같은 장르로 분류할 수 있다. 하지만 하드보일드로 분류할 만한 뮤지컬은 없었다. 창작뮤지컬 ‘셜록홈즈’ 시리즈는 추리극일 뿐, 하드보일드라고 할 수는 없다.




하드보일드와 필름 누아르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차림으로 세상만사에 냉소적인 사립 탐정 스톤(테이 분·왼쪽 사진 가운데)과 팜파탈 분위기가 물씬한, 미스터리한 의뢰인 어로라(가희 분).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코드의 캐릭터들이다. [사진 제공 · 샘컴퍼니]

트렌치코트와 중절모 차림으로 세상만사에 냉소적인 사립 탐정 스톤(테이 분·왼쪽 사진 가운데)과 팜파탈 분위기가 물씬한, 미스터리한 의뢰인 어로라(가희 분).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코드의 캐릭터들이다. [사진 제공 · 샘컴퍼니]

8월 8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센터 대극장에서 막이 오른 ‘시티 오브 엔젤’은 하드보일드에 해당하는 필름 누아르 스타일을 만끽할 수 있는 뮤지컬이다. 니컬러스 케이지와 맥 라이언 주연의 동명 영화(1998)를 떠올릴 수 있지만 로스앤젤레스(LA)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할 뿐 전혀 다른 작품이다. 영화가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1987)를 멜로드라마로 개작한 작품이라면, 뮤지컬은 그보다 9년 앞선 198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돼 1990년 토니상 작품상, 대본상, 작사·작곡상 등 5관왕에 오른 별개의 작품이다. 

뮤지컬은 1940년대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시나리오 작가 스타인(최재림·강홍석 분)이 영화업계에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치는 이야기와 그가 써내려가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시나리오 속 주인공 스톤(이지훈·테이 분)의 이야기가 병렬 구조로 펼쳐진다. 스톤이 주인공인 극중극은 하드보일드 필름 누아르의 전형적인 장면들로 구성된다.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응급실에 실려 온 사립 탐정 스톤의 냉소적 독백이 깔리면서 플래시백 회상으로 시작되는 첫 장면부터 그렇다. 트렌치코트와 중절모가 잘 어울리지만 비밀을 간직한 전직 경찰 출신의 탐정 스톤, 그를 짝사랑하는 수다스러운 여비서 도나(김경선·박혜나 분), 거액을 제시하며 의문의 사건을 의뢰하는, 팜파탈 분위기가 물씬한 어로라(백주희·가희 분), 스톤에게 적대적인 형사 무노즈(송형은 분), 스톤의 첫사랑 바비(리사·방진의 분)와 되바라진 10대 소녀 에이브릴(김소정 분)까지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들이 얽히고설키며 실종, 납치, 살인, 그리고 서로의 뒤통수를 치는 음모가 재즈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사이 콜먼(1929~2004)의 재즈 선율의 넘버들 속에서 펼쳐진다. 

하지만 ‘LA 컨피덴셜’의 긴장감보다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에서처럼 웃음기가 가득하다. 극중극 속 등장인물이 시나리오 작가 스타인 주변 인물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타인과 스톤을 제외한 인물은 대부분 이중 배역을 소화하는데, 현실과 시나리오 속 캐릭터의 오묘한 싱크로율이 웃음을 자아낸다.
 
게다가 스타인의 보스인 영화제작자 겸 감독인 버디(정준하·임기홍 분)의 속물적 취향과 변덕에 맞춰 이야기를 계속 고쳐 쓰면서 점점 배가 산으로 가는 지경에 이른다. 급기야는 스톤이 현실로 뛰쳐나와 스타인의 멱살을 부여잡는 만화적 상상력으로 치닫는다. 

오랜 세월 이 작품에 눈독을 들여온 김미혜 샘컴퍼니 대표가 CJ ENM과 손잡고 초연 후 30년 만에 국내 무대에 선보이는 이 작품은 논-레플리카(Non-Replica)로 계약을 맺은 작품이다. 대본과 음악을 제외하곤 한국적 현실에 맞춰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는 이야기. 그래서 화려한 볼거리를 좋아하는 한국 관객의 입맛에 맞춰 무대 효과에도 많은 공을 들였다.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뮤지컬

하드보일드의 진가를 곱씹게 만드는 뮤지컬
세련된 무대연출로 정평이 난 연출가 오경택 씨는 이 작품의 재미를 배가하기 위해 영화적 카메라 기법을 무대언어로 녹여냈다. 첫 번째는 컬러다. 스톤이 주인공인 시나리오 속 세계는 철저히 흑백의 세계다. 무대세트와 의상도 무채색 계열로 채워 흑백 영화를 보는 듯한 착시 현상을 불러일으킨다. 반대로 스타인이 주인공인 현실은 화려한 보라색 톤을 전면에 내세운 컬러 영화의 세계다. 두 개의 공간에서 이야기가 나란히 진행될 때 세트의 절반은 흑백, 다른 절반은 컬러로 선명한 대비를 이루게 했다. 

두 번째는 카메라조리개 효과다. 무대 가림막을 조리개처럼 활용해 줌인과 줌아웃 효과를 시각화했다. 끈적끈적한 재즈 선율의 전주에 맞춰 스캣송을 부르는 4명의 에인절이 무대 중앙에 등장할 때 한껏 좁혀졌던 무대 가림막이 점점 벌어지면서 영화 스틸 사진을 연상케 하는 영상이 흐른다. 또 1막 마지막 스타인과 스톤이 이야기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장면에서도 플라잉 기술과 접목한 줌인으로 영화 속 ‘클로즈업 효과’를 무대화해냈다. 디즈니 뮤지컬 ‘아이다’에서 엿볼 수 있었던 영화적 연출 기법을 과감히 접목한 결과다. 

세 번째는 턴테이블을 연상케 하는 회전무대다. 가운데가 뻥 뚫린 도넛 형태의 회전무대를 활용해 장면마다 필요한 소품과 등장인물을 이동시킨다. 이를 통해 현실 공간과 시나리오 속 공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빠져나오는 효과도 창출해냈다. 

사실 이 점만 놓고 보면 ‘시티 오브 엔젤’은 그보다 1년 빨리 영화화된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의 만화적이고 풍자적 상상력에 빚을 많이 진 작품이다. 그러나 내용을 곰곰이 뜯어보면 그 2년 뒤인 1991년 칸영화제 황금야자상을 거머쥐게 되는 조엘·에단 코엔 형제 감독의 영화 ‘바톤 핑크’(1991)의 성취를 선취한 작품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극중 극작가 이름을 딴 ‘바톤 핑크’는 1940년대 극작가로서 이름을 막 알리기 시작한 젊은이가 할리우드 대형 제작사의 시나리오 작가로 스카우트된 뒤 벌어진 심리적 갈등을 스릴러가 가미된 블랙 코미디로 풀어낸 작품이다. 물론 그에게 맡겨진 대본은 하드보일드가 아니라 레슬링 소재 B급 영화라는 차이는 존재하지만, 철저히 상업 논리에 지배되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을 풍자하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같은 파장을 지닌다. 

‘바톤 핑크’에서 진짜 레슬링은 각각 엄청난 체중을 자랑하는 메이저 영화사 대표 잭 립닉(마이클 러너 분)과 핑크가 묵는 호텔방 옆방에 사는 보험판매원 찰리 미도즈(존 굿맨 분)의 눈에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로 펼쳐진다. 잭이 ‘돈 되는 시나리오’만 좇는 상업 논리로 중무장한 채 창조성을 압살하는 도살자라면 찰리는 핑크가 추구하는 일상의 뒤에 숨어 있는 ‘섬뜩한 광기’를 상징하는 살인마다. 타자기 하나 달랑 들고 그 사이에 낀 핑크는 언제 짓눌릴지 모르는 모기로 형상화되지만 두 헤비급 레슬러 사이에서 짓눌리며 인생 최고 걸작을 탄생시킨다. 

‘시티 오브 엔젤’에서는 그 대결이 좀 더 직접적이고 희극적으로 그려진다. 시나리오 속 등장인물의 생사여탈권을 쥔 전지전능한 존재지만 현실에선 아무 힘도 없는 작가 스타인과 그의 ‘알터에고’이면서 음모와 범죄로 점철된 세계의 더러운 실체를 폭로하려는 사립 탐정 스톤의 대결이다. 작품 초반 자신의 작품으로 성공하리라는 단꿈을 꾸며 패기만만하던 스타인은 현실을 상징하는 감독 버디에게 주눅 들어 왜소해지는 반면, 인생만사에 냉소적이던 스톤은 진실의 등불을 밝히려 고군분투하는 존재로 변신한다.


‘바톤 핑크’의 희극적 쌍둥이

흑백 톤의 세계에 사는 사립 탐정 스톤
(테이 분)과 컬러풀한 세계에 사는 작가 스타인(강홍석 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병렬구조로 전개될 때 그 대조성을 강조한 ‘시티 오브 엔젤’의 무대(왼쪽부터). [사진 제공 · 샘컴퍼니]

흑백 톤의 세계에 사는 사립 탐정 스톤 (테이 분)과 컬러풀한 세계에 사는 작가 스타인(강홍석 분).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병렬구조로 전개될 때 그 대조성을 강조한 ‘시티 오브 엔젤’의 무대(왼쪽부터). [사진 제공 · 샘컴퍼니]

그렇게 양극과 음극이 서로 만나면서 전류가 흐르고 스파크가 생기는 법. 스타인은 스톤의 영향으로 용감해지고, 스톤은 스타인의 영향으로 진지해진다. 하지만 잊지 마시라. 이 뮤지컬이 하드보일드 필름 누아르를 패러디한 작품임을. 스타인과 스톤은 똑같이 금지된 죄를 저지른 뒤 회개하는 탕자의 길을 겪게 된다. 

스타인에겐 그것이 버디의 비서 도나와 동침이라면, 스톤에겐 어로라와 동침이다. 이는 영화 ‘바톤 핑크’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핑크가 존경하던 극작가의 여비서이자 애인인 오드리(주디 데이비스 분)와 하룻밤을 보낸 뒤 선혈 낭자한 시체가 된 오드리를 마주하는 장면이다. 

죄는 반드시 벌을 동반하는 법. 스톤은 진범을 잡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고, 스타인은 독재자 버디에 맞서 성공의 사닥다리를 과감히 발로 걷어차게 된다. 핑크에겐 좀 더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지니, 인생 최고작이 영원히 사장되는 벌이 기다리고 있다. 

뮤지컬은 흥겨운 재즈 선율로 이런 파국을 ‘해피엔딩’으로 위장한다. 하지만 첫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치명적인 총상을 입고 응급실로 실려 온 스톤 위로 나지막하게 흐르던 대사를 기억하라. “죽음에 대해 불평해봤자 소용없죠. 신과 싸워봐야 이길 수 없으니까.”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 비극이 있었다면 20세기 미국엔 하드보일드가 있었다고 말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정해진 플롯, 정해진 캐릭터를 연기하되 저마다의 개성을 가미하고 살짝 비트는 풍자를 보여주는 배우들, 특히 고대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에 해당하는 엔젤들이 내뱉는 무의미한 스캣송을 들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주간동아 2019.08.16 1202호 (p62~65)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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