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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완주하고, 고산 오르는 정신으로 식초 만들어요”

강화 유기농 황매실로 ‘보약’ 식초 만드는 김태순 장원팜 대표

“마라톤 완주하고, 고산 오르는 정신으로 식초 만들어요”



[조영철 기자]

[조영철 기자]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5월 2일, 인천 강화군 길상면에 자리한 매실농장 ‘장원팜’에서는 물기를 흠뻑 머금은 매실나무들이 싱그러운 자태를 뽐냈다. 1만6528㎡(약 5000평) 땅에 빼곡히 들어찬 500여 그루의 매실나무는 잘 가꾼 정원수처럼 일정한 높이와 폭을 유지하며 정갈하게 서 있었다. 한눈에 봐도 주인장의 정성이 느껴졌다. 김태순(67) 장원팜 대표는 5년 전부터 이곳에서 매실식초를 만들며 제2 인생을 살고 있다. 

강화도는 매실나무의 북방한계선으로 혹한의 날씨에는 나무가 얼어 죽기도 하지만, 남쪽지역 매실에 비해 향이 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니나 다를까, 농장에 들어서자마자 상큼한 매실초 향기가 오감을 자극했다. 1t 용량 항아리 15개에는 2~3년 묵은 식초들이 담겨 있었다. 

농장 초입에는 3층 높이 전원주택이 들어서 있다. 처음 매실식초를 담글 때만 해도 김 대표는 날마다 서울 반포에서 강화도를 오가며 허름한 컨테이너박스에서 식초 만드는 작업을 했다. 하지만 2년 전 집을 지은 뒤 아예 이사 와 본격적인 귀농 생활을 시작했다. 


매실식초는 맛과 향이 좋아 음료로도 마시기 좋다. [조영철 기자]

매실식초는 맛과 향이 좋아 음료로도 마시기 좋다. [조영철 기자]


1층에 카페를 만들어 매실식초 음료와 커피를 판매 중이고, 2층은 게스트 룸으로 종종 손님을 받고 있다. 인터뷰는 초록의 매실농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1층 카페에서 진행됐다. 김 대표는 시원한 매실초 음료를 한 잔 내주며 “이곳은 천국이나 다름없어요. 그럼 나는 천사인가”라며 빙긋 웃었다. 



김 대표가 처음 이곳에 매실나무를 심은 건 19년 전이다. 남편과 함께 경북 구미에서 반도체 사업을 하던 김 대표는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나무농사가 노후 준비에 좋다”는 얘기를 듣고 충남 금산으로 나무를 사러 갔다. 

“처음에는 오가피나무를 사려 했는데, 막상 묘목시장에 갔더니 주렁주렁 열매가 달린 매실나무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나무에 대한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매실나무 550그루를 샀어요. 땅은 남편 고향이 강화도라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을 중심으로 주변 땅을 추가로 매입했죠. 나무를 심고 5년 정도 지나니까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더라고요. 강화도는 다른 재배지에 비해 기온이 낮기 때문에 매실이 해마다 열리지 않아요. 한 해 걸러 한 해 열매를 맺는데, 식초를 담기 전에는 전부 매실청으로 만들어 주위 사람들에게 나눠줬어요.”


반도체 사업 접고 귀농

김태순 장원팜 대표는 2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농장 내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1층은 카페로 활용 중이다. [조영철 기자]

김태순 장원팜 대표는 2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농장 내 전원주택으로 이사했다. 1층은 카페로 활용 중이다. [조영철 기자]

김 대표가 매실식초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반도체 사업을 정리한 뒤다. 그 무렵 경북 칠곡에서 유기농 배 농사를 짓는 서도원 씨로부터 매실식초에 대해 처음 들은 김 대표는 “이론 공부부터 해야 한다”는 서씨의 조언에 따라 강화도 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농업대에 다니기 시작했다. 동시에 서울 집 근처에 있는 전통발효아카데미에 등록해 식초부터 장아찌, 누룩 등 모든 수업을 섭렵하며 발효의 원리와 효능에 대해 배웠다. 

“예순 넘은 나이에 공부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꿈꾸던 일이다 보니 하루하루가 즐겁더라고요. 학교와 학원만 다녀서는 잘 모르겠다 싶어 전국을 돌며 식초 공장을 거의 다 둘러봤죠. 현장에 가서 보니 농장 규모에 따라 식초 만드는 법은 물론, 사용하는 기계와 도구도 다 다르더라고요. 그때 쌓은 경험이 식초 사업에 큰 도움이 되고 있어요.” 

식초를 담그려면 먼저 기계 설비부터 갖춰야 했다. 김 대표는 “뭐든 직접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기계도 경기 양평군에 있는 공장들을 몇 번이나 순례한 끝에 결정했다. 식초병 디자인부터 상표 인쇄, 종이 박스 등도 모두 업체를 직접 방문해 선택했다. 현재 장원팜 1층 작업실에는 매실 세척 기계와 유리병 소독 기계, 식초를 병에 정량으로 옮겨 담는 기계 등 다양한 설비가 갖춰져 있다. 작업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식초 저장실에는 50여 개 항아리에 매실식초와 매실청, 매실 장아찌가 각각 담겨 있다. 이곳은 여름에도 온도가 19~20도로 일정하게 유지된다.


매실식초 만들며 더 젊어지는 기분

“한 해 매실 수확량이 15t가량 되는데 대부분 식초로 담가요. 매실식초는 청매실보다 황매실이 맛이 더 좋기 때문에 6월 중순 넘어 매실이 누렇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죠. 수확 시기가 되면 일꾼 50여 명을 써서 그날 딴 매실은 그날 바로 세척하고 설탕에 버무려 항아리에 담아요. 매실청은 설탕과 매실 비율을 동량으로 하지만 식초는 너무 달면 안 되기 때문에 매실 대비 설탕을 10~20%만 넣죠. 그로부터 100일이 지나면 매실을 건지고 남은 물은 그대로 저온에서 숙성시켜요. 6개월가량 지나면 식초가 되는데 최소 2년은 지나야 품질 좋은 식초가 돼요.”
 
매실식초는 곡물식초와 달리 술을 담그는 과정이 생략돼 비교적 수월하게 만들 수 있다. 맛과 향기가 좋아 식초 원액에 물을 탄 뒤 시럽을 살짝 섞으면 음료 대용으로도 손색없다. 매실은 유기산이 풍부해 원기 회복에 좋고 체내 노폐물 배출을 도와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다. 또한 체했거나 설사를 할 때 매실식초를 물에 타서 마시면 금방 효과를 볼 수 있다. 

김 대표는 “매실식초를 희석해 마사지를 하면 피부가 보들보들해진다. 매실식초를 담근 첫해에 이물질이 든 항아리를 잘못 쓰는 바람에 식초맛이 변했는데, 버리기 아까워 요즘도 세안할 때 종종 사용한다”고 말했다. 

매실식초는 담그는 과정이 복잡하지 않지만 투여되는 노동력은 상당하다. 매실 따는 작업이 만만치 않은 데다 매실을 일일이 씻어 설탕에 버무리고 항아리에 옮겨 담는 일도 보통이 아니다. 특히 김 대표는 매실 수확 이외 나머지 과정을 도맡아 하기 때문에 식초를 한 번 담그고 나면 녹초가 되기 일쑤다. 

“집을 짓기 전에는 농장 한켠에 컨테이너 박스를 가져다놓고 일꾼들의 식사와 새참을 일일이 다 만들었어요. 나머지 시간에는 매실을 씻고 설탕에 버무리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죠. 나중에는 손가락이 퉁퉁 붓고 심지어 휘어지기까지 하더라고요. 새벽마다 서울에서 운전해 오는 것도 힘들었죠. 깜빡 졸다 교통사고가 크게 날 뻔한 적도 있고요. 하지만 열흘 정도에 걸쳐 일을 다 끝마치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어요.(웃음) 매실이 가득 들어찬 항아리들을 볼 때마다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말이 절로 나오죠. 내 손으로 직접 농사지은 매실이라 애정이 더 큰 것 같아요. 심지어 매실나무 밑에 핀 민들레도 제 손으로 한 포기 한 포기 옮겨 심은 거예요. 요즘은 저 ‘아이들’ 보는 낙으로 아침에 눈을 떠요.(웃음)” 

매실식초가 맛있으려면 매실 농사부터 잘 지어야 한다. 김 대표는 처음 매실묘목을 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농약을 치지 않고 ‘유기농’을 고수하고 있다. 한번은 나무들이 매실이 제대로 맺히기도 전 땅으로 떨어지는 병에 걸렸는데, 그때도 김 대표는 떨어진 매실을 그냥 버릴 수 없어 일일이 소독해 땅에 묻었다. 김 대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다 자식 같다”고 말했다. 

지난 설에는 처음으로 매실식초 판매에 나섰다. 그 전까지는 취미생활로 식초를 만들었지만 올해부터는 제대로 사업 구색을 갖춰보자는 생각으로 판매에 직접 뛰어들었다. 차에 식초병을 가득 싣고 업체 30여 곳을 돌았는데, 결과는 만족할 만했다. 김 대표는 “반도체 사업을 하면서 알고 지낸 분들 위주로 제품을 선보였는데, 많은 분이 ‘직원들 명절 선물로 좋겠다’면서 사줬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사업하면서 더 비싼 물건도 팔아봤지만, 처음 식초를 팔았을 때만큼 뿌듯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말로는 다 표현하기 힘든 쾌감이 있더라고요. 몇 년 전만 해도 ‘은퇴하면 무슨 재미로 사나’ 걱정했는데 식초 덕분에 다시 청춘으로 돌아간 기분이에요.(웃음)” 

매실 농사를 지으면서 김 대표의 삶은 더욱 활기차졌다. 운동 마니아인 그는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마니산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평소 김 대표는 남편과 함께 마라톤을 즐기고, 전 세계 명산은 거의 다 섭렵했을 정도로 소문난 탐험가다. 18년 전 남편과 함께 처음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등반한 데 이어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유럽 엘부르즈, 북아메리카 매킨리까지, 에베레스트를 빼고는 거의 다 다녀왔다. 지난해 다녀온 매킨리에서는 하산 도중 갑작스러운 폭설로 10시간가량 조난을 당하기도 했다.


고산에서 마시는 식초 한 모금은 생명의 약

농장 저장창고에 보관된 30여 개의 매실초 항아리. 김태순 대표가 옹기 뚜껑을 열고 식초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농장 저장창고에 보관된 30여 개의 매실초 항아리. 김태순 대표가 옹기 뚜껑을 열고 식초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조영철 기자]

“에베레스트에 가려면 매킨리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해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자 다녀왔어요. 그런데 정상에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길을 잃어 하마터면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질 뻔했죠. ‘이제 정말 죽었구나, 남편 말 들을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더라고요.(웃음) 그래도 돌이켜보면 그때가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한 가지 놀라운 건 거의 탈진 상태에 있던 저를 구해준 게 바로 식초라는 사실이에요. 산에 갈 때는 늘 식초를 챙기는데, 에너지가 고갈돼 한 발자국도 내딛기 힘들 때 식초를 한 모금 마시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다시 나요. 또 설산은 워낙 추워 밤에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데, 그때 식초를 함께 타서 먹으면 술에 취하지도 않고 다음 날 숙취 때문에 괴로울 일도 없어요. 매킨리에서도 식초 덕을 톡톡히 봤죠.(웃음)” 

그가 운동을 시작한 건 극심한 우울증 때문이었다. 서울과 경북 구미를 오가며 바쁘게 살던 그는 40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심한 우울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날은 출근해서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회계장부에 도장을 거꾸로 찍는 등 이상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남편과 함께 마라톤을 시작하면서 마음의 병이 낫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마라톤 풀코스를 14번 뛰었어요. 세계 3대 마라톤 가운데 하나인 미국 보스턴마라톤대회에도 다녀왔어요. 마라톤을 하니까 산에도 자연스럽게 가게 되더라고요. 등산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높은 산에 오르고 싶은 욕심이 생겨요. 앞으로도 식초 먹고 건강 관리 잘해서 북극과 남극 정상에도 도전해보고 싶어요.” 

운동 후 마시는 식초 한 잔은 김 대표에게 가장 큰 보약이다. 평소에는 식초를 물에 타지 않고 원액으로 한 모금씩 수시로 마신다고 한다. 합치면 하루에 소주 2잔 정도의 분량이다. 최근에는 등산 동호인들과 함께 농장에서 팜파티를 열었는데 매실 장아찌를 넣은 비빔밥이 가장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김 대표는 “매실을 알고부터 인생이 한결 풍요로워진 기분이다. 좋은 사람들과 내가 만든 좋은 음식을 나눠 먹는 삶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매실식초를 만들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나라마다 유명한 식초가 다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렇다 할 식초가 없잖아요. 우리나라 대표 식초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 남편이나 아이들은 ‘더는 고생하지 말라’고 하지만, 마라톤을 완주하고, 고산에 오르는 정신으로 식초도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어요.(웃음)”


김태순 대표가 매실초 먹는 방법
1 식초 원액을 한 모금씩 수시로 마신다. 하루 소주 2잔 분량.
2 운동 후에는 식초와 물을 1 대 2 비율로 타서 마신다.






주간동아 2018.05.09 1137호 (p12~15)

  •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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