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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박정희 살아 있었다면 지금 감방에 있을 것”

“미래 내다본 판단, 현재 잣대로 재단할 수 있나…박근혜는 소통 안 한 罪”

인터뷰 |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 “박정희 살아 있었다면 지금 감방에 있을 것”

[지호영 기자]

[지호영 기자]

 ‘첫눈’ 예보가 있던 11월 15일, 서울양양고속도로는 새파란 하늘을 이고 달렸다. 설악IC를 나와 만나기로 한 장소는 시골에서 비교적 큰 마트였다. 약속시간보다 10분여 일렀지만, 김종신(87·사진) 전 청와대 비서관은 주차장 입구에서 기자를 기다렸다. 취재차량을 본 그가 알은체를 했다. 허연 구레나룻에 검은색 빵떡모자를 쓴 모습이 날씨와 잘 어울렸다. 

“모처럼 마트 나온 김에 깡통 맥주와 먹을거리를 좀 샀어요. 여기서 우리 집은 20분은 더 가야 해요.” 

부산에서 올라와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는 그의 목소리에 가족에 대한 애정이 묻어났다. 

“우리 ‘할망구’는 서울에 살고, 딸은 부산에 있어. 부산, 서울 왔다 갔다 해. 나이 들어 도시에 살면 뭐해. 여기서 책이나 읽고 살아야지.(웃음)” 

‘아들은 소를 키우고, 아버지는 소를 판다’는 간판이 있는 고깃집에 마주 앉아 갈비탕을 시켰다. ‘초고추장’을 ‘쪼꼬쭈짱’이라고 발음하는 베트남 출신 여성 종업원에게 한 자 한 자 발음을 알려주며 우리는 함께 웃었다. 



“저 종업원을 보니 며칠 전 네팔에서 온 교수가 생각나. 우리 집에 찾아왔더라고.” 

▼왜요?
“서울 연세대에서 공부했다면서,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을 연구하고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들려달라고 하더라고. 하루 종일 떠들었지.(웃음)” 

그의 말은 청산유수였다. 5시간 동안 이어진 인터뷰는 쉼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도 기자에게 자신의 차에 타라고 했다. 자신이 존경하는 전직 대통령 얘기를 하나라도 더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아, 나도 저렇게 전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와대 출입기자와 사회·언론 비서관을 지내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각별한 인연을 맺은 그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박정희를 지켜본 인물이다. 

1966년 출간한 ‘영시의 횃불’은 ‘박정희 대통령 수행기자 7년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달렸다. 97년에 낸 ‘박정희 대통령과 주변 사람들’은 물론, 어린이 대상의 박정희 전기를 낼 정도로 그는 ‘박정희 마니아’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말이 ‘박정희 미화’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신문기자로서 그가 기록한 박정희 관련 ‘기억’은 여론조사에서 ‘최고 대통령’으로 뽑히던 박정희에 대해 알 수 있는 작은 비망록이기도 하다.


1968년 3월 공보비서관실 사회·언론 비서관에 임명된 뒤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오른쪽).

1968년 3월 공보비서관실 사회·언론 비서관에 임명된 뒤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는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오른쪽).

“까무잡잡한 촌놈이 왔구나”

경남 사천시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상고 졸업 후 군에 입대해 6·25전쟁에 참전했다. 수도사단 기갑연대 소대장으로 금화지구 전투에 참전해 총상을 입고 후송돼 헌병으로 근무하다 1958년 대위로 제대했다. 그리곤 군 복무 시절 꿈꾸던 신문기자가 됐다. 부산일보에 입사해 군 취재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와 인연도 60년 1월 박정희가 부산에 있는 군수기지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됐다. 

“얼굴빛이 까무잡잡한 게 촌놈이 하나 왔구나 싶었다. 아, 그런데 예의가 있고 야무지더라고. 걸음걸이와 말 매무새도 반듯했지. 손님이 오면 항상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주는 예의가 있었고. 우리 집이 군수기지사령부 바로 옆이라 자주 가서 만났는데, 그 양반이 처음엔 기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처음엔 기자를 ‘공갈쟁이’라고 생각하더라고.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특무대나 경찰 정보원 하던 애들이 지역 신문기자 행세를 한 시절이었으니….” 

군수기지사령관으로서 박정희는 어땠나.
“자유당 시절 말기 군내 부패가 극에 달했다. 미제 군용트럭으로 동해에서 명태를 실어다 팔거나, 산의 나무를 베어다 팔아먹던 시절이다. 부식비나 유류비 등을 횡령하는 장성도 비일비재했다. (사령관이) 전출할 때 보면 보통 트럭 2대에 군용물품을 잔뜩 실어서 떠난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사령관 시절 ‘제닉스 라디오’로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군수기지사령부를 떠날 때 라디오를 놓고 가더라. 그래서 내가 ‘왜 안 가져가나’라고 했더니 ‘그게 내 건가. 부대 것이지’ 하고는 안 갖고 가더라. 박 사령관이 취임하고 나선 군수비리가 없었다. 당시 박 사령관 주변 사람들도 쟁쟁했다. 이후 수도경비사령관이 된 윤필용이 비서실장, 포철 회장과 국무총리를 한 박태준이 인사참모, 상공부 장관을 한 이낙선이 공보참모를 했다.” 

그는 뭔가 생각난다는 듯 한참을 웃었다. 혼잣말로 “그러니 윗사람들은 싫어하고, 아랫사람들은 좋아할 수밖에”라며 또 웃었다. 

“허정 과도내각 때 국방부 차관이 부산에 왔다. 예전 같으면 군악대 팡파르 울리고 지휘관이 따라다니면서 예하부대 시찰 도와주고, 밥 사주고, 술 사주고, 선물 주고…. 그런데 박 사령관은 환영식만 참석하고 따라가지 않더라.” 

▼이유는 뭔가.
“내가 물어보니 ‘내 할 일도 바쁜데 그런데 왜 따라다니냐’며 핀잔을 주더라. 부정부패와 ‘상납’이 만연하던 시절 참 독특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러니 윗사람이 좋아하겠나.” 

5·16 군사정변 이후 그는 부산일보 서울지사로 발령이 났다. 최고회의 출입기자를 거쳐 청와대 출입기자를 지내며 박정희와 주변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1966년 10월) 베트남 참전 7개국 정상회의가 있어 출입기자로 동행취재를 했는데, 기내에서 대통령이 갑자기 나를 찾았다. 당시 ‘영시의 횃불’ 인세를 받은 것도 있고 해서 450달러를 주고 롤렉스 시계를 하나 장만했는데, 반팔 드레스셔츠에 ‘금딱지 시계’를 차고 가니 대통령 시선이 손목에 꽂히더라.”


“금딱지 시계면 최고인가”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기념 테이프를 끊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1979년 6월 30일 한국에서 만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1970년 포항제철 착공식(왼쪽부터).[동아DB]

1970년 7월 7일 경부고속도로 개통식에서 기념 테이프를 끊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 1979년 6월 30일 한국에서 만난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1970년 포항제철 착공식(왼쪽부터).[동아DB]


▼대통령이 찬 시계와 같은 모델이었나.
“그 반대다. 대통령 시계를 보니 군용시계로, 잔금이 가 바늘을 간신히 볼 수 있었다. 무안하기도 해서 ‘각하, 시계 바꿀까요?’라고 했더니, ‘금딱지 시계 차면 최고인가, 시간만 잘 맞으면 되지’ 하고 화를 팍 내더라. 부끄럽기도 하고…. 검소함이 몸에 밴 분이다. 기억나는 건 필리핀 마닐라 상공에서 내려다보면서 사통팔달 도로망을 부러워했다는 점이다. ‘도로망이 참 잘돼 있어’라고 혼잣말을 하더라.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그 연장선상이 아닌가 싶다.” 

앞서 박 전 대통령이 동남아 순방길에 올랐을 때도 그는 동행취재를 했다.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인 시절 말레이시아는 323달러로 1차 산품 수출액만 연 20억 달러가 넘는 나라였다. 우리나라 총 수출액이 1억7000여만 달러였으니 그럴 수밖에. 

“현지 교민들을 취재한 내용과 대통령 도착 소식을 본국에 타전하려고 했는데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당시는 통신 사정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황급히 당시 대사의 숙소로 가 전화로 기사를 타전했다. 당시 최규하 주말레이사아 한국대사가 90도로 절을 하며 ‘큰일하신다’고 격려해줬다.” 

이후 1975년 말 무렵 최 외무부 장관이 국무총리 서리에 임명됐을 때 부산문화방송 사장이자 방송협회 부회장이던 그는 최규하의 평판을 묻는 박 전 대통령에게 이 일화를 들려줬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對)말레이시아 주요 수출품이 오징어였는데, 중국계 현지인이 수출입 업무를 하다 보니 교민들 불만이 크다는 기사를 한국으로 보냈다. 이후 박 대통령이 관련 소식을 접하고 ‘밥이라도 잘 먹을 수 있도록 교민들을 도와주라’며 현지 대사관 측에 지시했다.” 

경부고속도로가 착공(1968년 2월 2일)되고 얼마 뒤 3월 28일 ‘동아일보’ 1면에 그의 인사가 실렸다. ‘공보비서관실 사회·언론 비서관 김종신.’ 

“인사 나기 6개월 전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이 제안을 하기에 ‘부산일보 부국장을 하며 잘 지내는데 비서관 하면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정중히 거절했다. 물론 박 대통령의 뜻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제안해올 때는 차마 거절하지 못하겠더라.” 

비서관 시절 그의 임무는 언론계, 학계 등과 소통하는 것이었다. 최문환 서울대 총장이 참여한 근대화문제연구회 인사들과 ‘화요회’를 만들어 매주 화요일 모임을 가졌다. 정재각 고려대 문과대학장(동국대 총장), 구범모 서울대 문리대 교수(9·10대 국회의원), 박진환 서울대 농대 교수(대통령경제특보) 등이 참여해 ‘박정희 멘토단’ 구실을 했다. 남재희 조선일보 논설위원(11~13대 국회의원), 임방현 한국일보 논설위원(11~12대 국회의원) 등 언론인과는 ‘목요회’를 만들어 세상 소식을 청와대에 전달했다. 

어느 날 박 대통령이 송건호(한겨레신문 회장), 임홍빈(문학사상사 회장) 등 몇몇 언론인에게 저녁을 샀다. 김종신 비서관이 제안한 자리였다. 

“식사 중에 대통령과 송건호 기자가 보이지 않아 나가 보니 두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더라. 당시 송 기자는 박 대통령 비판 기사를 많이 썼는데도 말이다.” 

그다음 날 송 기자와 해장국으로 해장을 하던 중 그는 파안대소했다고 한다. 그가 기억하는 송 기자의 말은 이렇다. 

“어제 화장실에 소변을 보고 있는데 박 대통령이 목을 쭉~ 빼서 내 ‘물건’을 보더니 ‘물건도 시원찮은 놈이…, 떼끼!’ 하는 거야. 그렇게 재밌는 사람인 줄 처음 알았네. 앞으로 대통령 비판 기사 자제해야겠어.”


“소를 키워야 하는데 뿔도 나기 전에…”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오른쪽)이 사회·언론 비서관 시절 운영한 ‘근대화문제연구회’ 멤버 이름들을 적어놓은 메모.[지호영 기자]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오른쪽)이 사회·언론 비서관 시절 운영한 ‘근대화문제연구회’ 멤버 이름들을 적어놓은 메모.[지호영 기자]

청와대에 있으면서 그는 어린이를 위한 박정희 대통령 전기도 냈다. 1970년 11월 24일 ‘경향신문’ 기사는 이렇다. ‘어린이들을 위한 박정희 대통령 일생을 엮은 전기물이 ‘가난을 물리친 박정희 대통령’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한 출판사의 제안으로 책을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전기(傳記)이다 보니 대통령의 구술이 필요했다. 대통령 얼굴 한 번 못 본 비서관이 수두룩한데 나는 틈만 나면 찾아뵀으니 그만큼 속내도 잘 알게 됐다.”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 그는 차를 타고 그 도로를 혼자 달렸다. 대통령이 “기분이 어땠나”라고 묻자 그는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가 된 느낌”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아주 부자가 된 느낌, 드넓은 오대양을 빠르게 항해하는 오나시스의 느낌이 들어 그렇게 대답했더니 내 표현이 맘에 들었는지 대통령은 고속도로 얘기를 할 때마다 그 표현을 꺼내더라.(웃음)”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에도 반대가 많았는데.
“박 대통령이 훌륭한 것은 실력 있고, 돈 안 먹고, 결백하기 때문이다. 흔히 인재라면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얘기하는데, 그중에서 중요한 건 ‘판(判)’, 판단력이다. 그 양반의 판단력은 대단하다. 경부고속도로도, 포항제철 건설도 당시엔 반대가 컸지만 그는 고독한 판단을 했다. 경부고속도로 준공(1970년 7월 7일)한 그해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있었다. 그때마다 박 대통령이 한 말이 있다.”

▼무슨 말을 했나.
“‘암소를 키워 새끼를 낳게 하고, 그 소들을 키워 잡아먹어야 하는데, 뿔도 나기 전부터 잡아먹으려 한다’고. 그런 사람이다. 민주주의를 싫어한 사람도 아니다. ‘배가 불러야 민주주의가 되지. 소 잡아먹어서 민주주의 되겠나’라고 늘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은 미국의 원조를 받았지만 ‘원조국’ 미국에 대해서도 당당했다고 회고한다.

‘불도저 시장’으로 불리던 김현옥 내무부 장관이 부산시장일 때(1962~66) 하루는 박 대통령이 부산을 찾았다. 부산에 호텔도 없던 시절, 허름한 여관에서 묵었는데 이른 아침 평소 잘 아는 경호실 직원과 복도에서 장난을 쳤다. 맞은편 문이 열리더니 박 대통령이 ‘무슨 일 있나’라는 표정으로 빠끔히 쳐다보고는 곧 다시 문을 닫았다.

“깜짝 놀라 얼른 자리를 피했는데, 그 경호실 직원이 ‘각하가 찾는다’고 해 방에 들어갔다. 지방 출장 갈 때면 청와대 이발사를 대동했는데, 그날도 이발사가 머리 손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이발사가 머리에 ‘파란색 향수’를 너무 많이 뿌린 탓에 향수가 이마를 타고 흘러 내려 대통령 눈에 들어갔다. 내가 손수건을 꺼내 닦아드렸더니 씩 웃으면서 ‘임자 식사했소? 안 했음 같이 합시다’라고 하기에 안 먹었어도 ‘먹었다’ 하고는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같이 있자’고 하더라.”

▼할 얘기가 있었나.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자 박종규 경호실장이 어떤 외국인을 데려왔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미국 총기회사 ‘콜트사’ 사장이었다. (노태우 정부에서 체육부 장관을 지낸) 조상호 의전수석비서관이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통역을 했는데, 박 대통령은 ‘조준경만 사겠다’고 하더라. 보아하니 (콜트사 사장은) 총을 사라고 하는 거 같은데, ‘조준경만 사겠다’니 안 판다고 하는 거 같았다. 얼마 뒤 사장이 나가고 대통령에게 물었다.”

▼뭐라고 했나.
“(콜트사 사장이) ‘신형 총을 사라고 하는데 왜 사느냐’고 하더라. 그러면서 ‘미국이 총을 대주는데 우리가 왜 새 총을 사나. 그래서 조준경만 팔라고 했다. 우리는 앞으로 조준경 만드는 정밀기술을 개발해 첨단 소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더라. 당시는 후진국 지도자들이 대량으로 무기를 구입한 뒤 ‘뒷돈’ 챙기는 시절이었다. 콜트사 사장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그런데 이 양반은 ‘조준경만 팔라’고 하니 얼마나 당황했겠나.”


“미국, 철수하려면 하라 이거야”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기록한 책을 다수 펴냈다.[지호영 기자]

김종신 전 청와대 비서관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기록한 책을 다수 펴냈다.[지호영 기자]

그는 당시 상황이 생각나는 듯 또 한 번 웃었다. 그러더니 미국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도 들려줬다. 

“박 대통령은 ‘미국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위해 주한미군을 주둔시키는 게 아니다’ ‘원조를 받더라도 당당하게 받아야 한다’고 늘 말했다. ‘(미국이) 원조를 하려면 비누나 성냥, 양초, 양담배 같은 소모품을 줄 게 아니라 비누공장, 성냥공장을 짓게 도와줘야지’ 하는 불만도 여러 차례 들었다. 1970년대 중·후반 미국과 그다지 관계가 좋지 않을 때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다. 그때 미국 측에 새로운 (함대함)미사일을 팔라고 하니 미국이 ‘못 판다’고 나왔다. 신형 미사일은 개발된 지 2년 지나기 전까지 판매할 수 없다는 규정 탓이었는지, 자국 배치 때문에 (수출) 여유가 없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로서는 적잖이 당황했다. 북한은 미사일 고속정을 대량 보유하고 있어 성능 좋은 대함미사일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 즈음 박 대통령이 ‘프랑스 미사일을 샀다’고 하더라. 박 대통령이 부산에 와서 그 발사 장면을 함께 봤는데, 첫 발이 명중하자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가 말한 미사일은 프랑스제 MM-38 엑조세 미사일로 보인다.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도입한 함대함미사일을 운용했는데, 사거리가 짧고 오발이 잦아 새로운 미사일이 필요했던 것. 미국은 하푼 대함미사일을 1976년 개발해 이듬해 배치했다. 

“주한미군 철수까지 주장한 지미 카터 행정부에서 무기 구매가 어려워지자 박 대통령은 ‘우리는 원자탄을 사면 된다. 살 수 있다’고 했다. 구체적인 금액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말을 하면서 ‘미국 사람들 철수하려면 하라 이거야’라고 짜증을 낸 기억은 난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보자. 그는 1971년 청와대 비서관직 사표를 냈다. 당시 대통령을 독대하는 데 대해 조직 내 시기심이 많았고, 김정렴 비서실장이 들어오면서 청와대를 전반적으로 관장했기 때문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제안으로 부산문화방송 사장이 돼 방송협회 부회장을 맡았다. 그리고 1975년 그의 책 ‘영시의 횃불’을 일본 산케이신문 출판사가 ‘박정희 대통령’이란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 대통령의 구술을 바탕으로 쓴 만큼 일본 내 책 판매 수익금 1000만 엔을 박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후 박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그 돈이 “어린이를 위한 새마을운동에 기부됐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부산문화방송 사장을 그만두고 어느 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마산에서 진해로 가는 삼거리에 마산시장 등 기관장들과 시민들이 서 있기에 물어보니 대통령이 온다고 하더라. 나도 내려서 길가에 서 있는데, 대통령 일행이 100m쯤 지났을까, 차가 멈추고 경호실 차장이 내려 나보고 얼른 오라고 손짓하더라. 그래서 뛰어갔더니 박 대통령이 내려서 악수를 청했다. 아,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 

▼대화는 없었나. 
“악수하고는 ‘놀고먹으니 살이 쪘구먼’ 하면서 웃더라. 무슨 할 말이 있겠나. 안부를 묻고 가만히 서 있는데 대뜸 도로 옆 논을 보더니 ‘금년에는 풍년이 들겠지’ 하고는 씩 웃고 길을 떠났다. 그만큼 말과 행동에 기품이 있었다. 지금도 나는 지하철을 타면 박 대통령을 생각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한다.” 

▼1969년 3선 개헌과 72년 10월 ‘유신’을 왜 단행했다고 보나. 
“돈이 없으면 정치를 못 하던 시절이다. 박 대통령은 선거 때마다 ‘위에서 썩으니 아래도 썩어 들어간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정·부패의 원흉은 선거라고 했다. 그래서 유신을 단행한 거다. ‘(박 대통령) 편든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이 말을 직접 들었다. 국민이 뽑은 대의원으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나 유정회(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된 전국구 국회의원들의 원내교섭단체)도 그 맥락이다.”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한국 정치사에 암흑을 드리운 유신을 단행한 이유로는 부족해 보였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나뉜다.
“박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현 잣대로 그 시대를 재단해선 안 된다. 배 기자는 며칠 동안 배를 곯아본 적이 있나.”


호랑이 등에 올라탄 박정희

뜬금없는 질문에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그다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그에게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나는 배가 조금 나와서 안 먹었다고 해도 잘 믿지 않는다.
“우리 애들도 그 시절 얘기를 하면 ‘라면 드시지 그랬느냐’고 말한다.(웃음) 그러나 배를 곯아본 사람은 배고픔을 안다. 경부고속도로든, 과학 입국이든, 포항제철이든, 중화학공업 육성이든 다 당시로서는 생각지 못한 발상이었다. 대다수 국민이 절대빈곤에 허덕일 때, 북한의 위협이 극에 달했을 때 박 대통령은 미래를 내다보고 그런 구상을 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건 인정해야 한다. 지금 박 대통령이 살아 있었다면 그 역시 형무소, 감방에 들어갔을 거다. 법에 걸면 안 걸릴 게 있을까. 박 대통령 자신도 잘 안다. 오죽했으면 ‘내 무덤에 침을 뱉으라’고 했을까. 그에 대한 평가는 필연적으로 갈릴 수밖에 없지만, 배가 고파본 사람은 그가 한 일을 높게 평가한다. 나는 박 대통령을 볼 때마다 ‘대통령은 호랑이 등 위에 올라타고 깊은 산중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했다. 호랑이의 큰 걸음으로 빨리 갈 수는 있지만 떨어져 죽을 수도, 잡아먹힐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수많은 사람이 반대해도 자신의 판단을 밀고 나가니 항상 불안했다. 어제(박 대통령 탄생 100주년)는 참 보고싶더라.”

▼큰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영어의 몸이 됐다.
“나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죄가 있다면 소통을 안 한 거라고 본다. 당선 전후해서 내가 몇 번 얘기했다. ‘아버지처럼 기자실에 자주 가시라, 기자를 사랑하시라’고. 기자실에 가면 신경 거스르는 질문도 듣겠지만 도움 되는 얘기도 많이 듣는다. 기자실에 갔다면 최순실, 정윤회 씨 얘기도 했을 거다.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도 처음엔 기자를 부정적으로 봤지만 대통령 되고 나서는 기자들과 씨름을 하거나 고기를 직접 구워 먹는 등 자주 만났다.”
그의 2층 서재 맨 위에는 칼을 차고 말을 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흑백 사진이 놓여 있고, 그 아래에는 금화지구 전투 당시 탄띠를 두른 앳된 김종신 소위가 활짝 웃고 있었다.






주간동아 2017.11.22 1114호 (p20~25)

  • 가평=배수강 기자 bs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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