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5

2015.09.14

문재인의 승부수 노무현 따라 하기

재신임 카드는 선출된 권력 바꾸지 않으려는 여론 속성과 ‘시간은 내 편’이란 자신감의 발로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입력2015-09-11 1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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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의 승부수 노무현 따라 하기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9월 9일 서울 여의도 국회 당대표실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검찰 수사 결과 사실이 다 밝혀지겠지만, 그러나 그 행위에 대해 제가 모른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우선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것에 대해 국민에게 깊이 사죄하고 아울러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수사가 끝나면 그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이 문제를 포함해서 그동안 축적된, 국민의 불신에 대해 재신임을 묻겠습니다.”

    2003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대국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측근인 최도술 대통령비서실 총무비서관이 손길승 SK 회장으로부터 11억 원 상당의 양도성예금증서를 받은 것과 관련해, 검찰 수사에서 사실이 밝혀지면 국민에게 그에 대한 재신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최 전 비서관은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로 결국 사법처리됐다. 그럼 노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문제는 어떻게 됐을까.

    노무현의 재신임

    노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 이후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곳은 검찰이었다. 최 비서관의 불법정치자금 수수를 매개로 2002년 대선자금 수사로 판을 키워,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차떼기 전모를 밝혀냈다. 당시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은 문재인, 대선자금 수사를 진두지휘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은 안대희였다. 대선자금 수사로 노 대통령 측도 내상을 적잖이 입었지만,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뒤집어쓰고 사실상 궤멸 직전까지 갔다.

    측근 비리로 코너에 몰린 노 대통령이 꺼내 든 재신임 승부수가 만들어낸 반전 드라마는 이렇게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대선자금 수사로 코너에 몰린 당시 야당 한나라당은 2004년 3월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군소 정당으로 쪼그라든 민주당과 손잡고 국회에서 노 대통령 탄핵을 의결했다.



    그 결과는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로 나타났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을 대의기구인 국회가 주권자인 국민의 뜻을 거슬러 탄핵한 데 대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이 대통령과 가까운 정당의 과반 확보로 이어진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승리는 곧 대통령 재신임으로 추인됐다. 헌법재판소도 총선 직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 기각을 결정했다.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문재인 대표가 9월 9일 혁신위원회(혁신위)의 혁신안에 대한 중앙위원회(중앙위) 의결을 앞두고 재신임을 묻겠다며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은 12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신임 발언을 연상케 했다. 코너에 몰렸을 때 특유의 승부수를 던져 국면을 전환해 위기를 기회로 바꿔냈던 노 전 대통령의 승부사적 기질이 12년 만에 문 대표에게서 재현되고 있다는 점에서다.

    문 대표가 재신임 카드를 꺼내 든 것은 혁신안에 대한 중앙위 통과를 압박하는 동시에 4·29 재·보궐선거(재보선) 참패 이후 ‘문재인으로 내년 총선을 치를 수 있겠느냐’며 줄기차게 문재인 사퇴를 요구해온 비노무현(비노)계의 주장을 정면 돌파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월 9일 문 대표의 기자회견 직후 만난 새정연 인사는 “문 대표가 재신임 카드로 또다시 시간을 벌려 한다”고 촌평했다. 그는 “4·29 재보선 직후 당 안팎으로 사퇴 요구가 거셀 때는 ‘혁신위’를 방패 삼아 버텨왔고, 이제는 재신임 카드로 혁신안을 기정사실화함으로써 날개 꺾인 당대표가 아니라 총선 공천을 주도할 명실상부한 당대표로 복귀하겠다는 속셈”이라고 말했다.

    문 대표가 재신임을 받겠다고 밝힌 뒤 비노 진영에서는 “재신임 뒤에 숨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전당대회에서 재신임받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문 대표가 자신이 제시한 재신임 절차를 고수하는 한 비노가 강제로 문 대표를 끌어내릴 방법은 마땅치 않다.

    문 대표가 자신의 거취를 걸고 재신임 카드를 꺼내 듦으로써 ‘혁신위 활동에 대한 평가’는 이제 문 대표에 대한 신임과 불신임으로 대체될 전망이다.

    새정연 내부 분위기는 9월 16일로 예정된 중앙위에서 진통은 있겠지만, 결국 혁신안이 통과될 것으로 보는 이가 많다. PK(부산·경남) 출신 한 지역위원장은 “중앙위가 당대표 신임 문제까지 걸린 혁신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중앙위에서 혁신안이 부결된다는 것은 중앙위원들이 문 대표를 탄핵한 꼴이 될 텐데 중앙위원들이 과연 그런 결과를 원하겠느냐”고 덧붙였다. 새정연 한 당직자도 “중앙위원 분포는 혁신안이 부결되기 힘든 구조”라고 말했다. 그는 “중앙위원 가운데 문 대표를 끌어내리려는 비노 측 인사보다 ‘문 대표 이외 대안이 없다’고 보는 중도성향 인사와 ‘문 대표를 지켜야 한다’는 친노무현(친노)계 인사가 수적으로 우세하다”고 분석했다.

    문재인의 승부수 노무현 따라 하기

    7월 20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 제1차 중앙위원회의.

    비주류 와해는 시간문제

    문 대표가 공천 룰이 담긴 혁신안의 중앙위 통과에 자신의 거취를 연계한 것은 중앙위 통과 가능성을 그만큼 높게 보기 때문이다. 새정연 한 원외 인사는 “공천 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친노와 비노 진영이 저마다 유리한 룰을 확보하고자 세 대결을 벌이겠지만, 막상 공천 룰이 확정되면 당을 뛰쳐나갈 사람이 아니라면 정해진 룰에 맞춰 공천이란 예선 통과를 위해 매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입지자의 숙명”이라고 말했다.

    혁신위는 10차 혁신안에서 국민공천단 도입과 경선 결선투표 도입을 뼈대로 한 공천 방식을 확정했다. 경선 방법은 안심번호가 도입될 경우 선거인단 구성을 국민공천단 100%로 하고, 도입되지 않을 경우 국민공천단 70%, 권리당원 30%로 결정했다. 국민공천단은 선거구별로 300명 이상 1000명 이하로 구성된다.

    12년 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재신임 승부수를 던져 차떼기 대선자금 수사로 전선을 넓혀 야당을 제압한 것처럼, 문재인 대표는 이번 재신임 승부수로 당내 비노 진영을 제압할 수 있을까. 혁신위는 문 대표에게 우호적인 환경을 조성해줬다.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를 통해 하위 20% 평가자를 탈락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뒀고, 전략공천에 대한 막강한 권한을 당대표가 행사할 수 있는 토대까지 마련해뒀다. 문 대표가 내년 총선 공천권 행사까지 재신임이란 한 고비를 남겨두고 있다면, 비노 진영 인사들 앞에는 선출직공직자평가위원회 평가와 공직선거후보자검증위원회 검증, 그리고 국민공천단 경선 등 넘어야 할 산이 훨씬 더 많다. 새정연 인사 가운데 “총선이 다가올수록 힘의 균형추가 문 대표에게 기울 것”으로 보는 이가 많은 이유다.

    당에 남아 혁신안대로 공천 방식을 따를까, 아니면 새정연 둥지를 떠나 새 길을 모색할까. 9월 16일 중앙위 이후 비노 인사들의 선택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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