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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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의 ‘금기’에 도전장

권터 그라스, 신작 통해 ‘구스틀로프 침몰’ 다뤄 … 2차대전 말 민간인 9천명 이상 숨진 사건

  • < 강여규/ 하이델베르크 통신원 > kang@debitel.net

    입력2004-10-20 13: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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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사회의 ‘금기’에 도전장
    독일의 대표적 작가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 그라스가 새 소설 ‘게걸음 속에서’를 최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발표되자마자 독자와 비평가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는 문학적으로 뛰어난 성공작이란 평가 외에도 작품 소재가 독일 사회의 깊은 터부를 집중 조명했기 때문이다.

    ‘게걸음 속에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발트해에서 발생한 사상 최대의 선박 참사인 ‘빌헬름 구스틀로프’(Wilhelm Gustloff)호의 침몰을 다뤘다. 영화를 통해 전 세계에 알려진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보다 사망자 수가 무려 6배나 되는데도 이 참사는 역사적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라스의 입장이다.

    소설 속에서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노인’의 입을 빌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동프로이센 피난민의 참상을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세대가 해결할 과제였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의 죄과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참회가 그동안 아무리 절박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런 엄청난 고난에 대해 침묵해서는 안 되었다고, 그 피해버린 주제가 우익에 얽혀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져서는 안 되었다고 그는 말했다.”

    독일 사회의 ‘금기’에 도전장
    9000명이 넘는 독일 민간인 희생자의 대부분(4000명 이상)이 여성과 어린이였던 구스틀로프호의 침몰은 분명 존재한 사건이지만,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적 공론에서는 언급해선 안 되는 주제였다. 구스틀로프호는 대(大) 독일제국이란 오만한 꿈의 상징이었고 ‘히틀러의 타이타닉’이었다. 따라서 그 배의 침몰은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당연한 응징으로 조용히 덮어버리는 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였던 것이다.

    1937년 출항한 구스틀로프호는 당시 최대 규모의 유람선으로 길이 208m, 폭 24m, 배의 수심이 7m로 선원 426명과 승객 1463명을 여유 있게 수용할 수 있었다. 배 안에는 ‘기쁨을 통한 힘’이라는 히틀러의 모토에 손색 없게 식당 2개, 강당 3개, 극장, 뮤직살롱, 체육관과 수영장 시설 그리고 분만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호화 유람선은 계급 없는 사회를 상징하며 당시 독일 국민의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다. 전쟁중엔 용도가 변경돼 주로 발트해의 고텐항(현재 폴란드의 단치히 근처)에 정박해 있으면서 제2잠수함훈련사단의 사관 후보생을 위한 병영으로 사용됐다. 배의 이름 ‘구스틀로프’는 스위스에서 근무하던 중 유대계 청년 다비드 프랑크푸르터에게 암살된 나치의 외무선전국장 빌헬름 구스틀로프를 기념해 히틀러가 명명한 것이다.



    1945년 1월 나치의 동부전선 와해 후 소련의 붉은 군대가 독일을 향해 빠른 속도로 육박해 오면서 동프로이센의 중심지 쾨닉스베르크나 단치히의 점령도 시간 문제였다. 독일군이 소련 점령지역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한 보복으로, 소련군 역시 독일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만 독일 민간인은 서쪽을 향해 피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겨울 영하 20℃가 넘는 혹한 속에서 공중폭격과 소련군의 총칼에 의해 피난민들은 길거리에서, 얼음 구덩이에서 참혹하게 죽어갔다. 동프로이센과 포머른(현재 폴란드 영토) 전역이 소련군에 포위돼 육로가 차단되자 피난민들은 해로를 찾아 발트해의 항구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고텐항은 연합군의 폭격함대가 도달하기 어려운 독일군의 전략적 주요 거점이었고, 피난민들에게는 마지막 등불과 같은 곳이었다. 고텐항에는 전함뿐 아니라 수천명을 수송할 수 있는 선박들, 특히 구스틀로프호가 정박하고 있었다. 고텐항은 이미 배를 타기 위해 몰려든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나 다름없었다.

    1월21일 소련군의 점령이 눈앞에 다가오자 나치는 바다를 통한 사상 최대의 철수작전인 한니발 작전을 개시했다. 군수물자와 교육중인 사관생도 그리고 피난민을 서쪽의 안전한 곳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한 것이다. 구스틀로프호도 수송에 참가하라는 상부 명령에 따라 사관생도와 함께 여성과 아이들을 우선적으로 태웠다. 당시 승선자 명단을 작성한 배의 출납책임계 임용지원자 하인츠 쇤의 증언에 따르면 7956명을 기록하고 나서는 장부가 바닥났고, 그 후 기록 없이 태운 사람도 2000명 이상이나 됐다(하인츠 쇤은 전쟁이 끝난 뒤 구스틀로프호 참사의 연대기 저자로 활동한다. 그는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해 기록집 2권을 발간했고, 귄터 그라스의 소설은 이 자료를 기반으로 했다. 그는 그라스와 함께 라이프치히 도서전시회에 참가할 예정이다).

    1월31일 정오 피난민을 가득 태운 구스틀로프호는 어뢰정 뢰베호의 보호를 받으며 출항했다. 전날 밤 동부잠수함대 사령탑으로부터 소련군 잠수함 세 척이 수면으로 떠올라 소련을 향하고 있으므로 항로가 안전하다는 전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망에 잡히지 않았던 잠수함 한 대가 여전히 물 밑을 배회하며 공격 목표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구스틀로프호가 출항 5∼6시간 후 발트해 한가운데를 항해하고 있을 때 선장은 독일 소해정 한 척이 구스틀로프호의 항로로 진행중이란 무전 연락을 받았다. 그 무전의 출처는 끝내 미스터리로 남았지만, 그것을 알 리 없는 구스틀로프호는 소해정과 부딪치지 않기 위해 평화시처럼 위치를 알리는 항해등을 켜고 기다렸다. 그러나 소해정은 나타나지 않았다. 바로 그 시간 물 위로 떠오른 소련 잠수함 S13호는 이미 이전 2∼3시간의 공격준비 끝에 공격 목표인 구스틀로프호를 향해 세 발의 어뢰를 발사했다. 이후 일어난 아비규환은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겐 평생을 따라다닌 악몽이 됐다. 어둡고 차가운 겨울 바다에 떠 있는 수많은 시체들, 도와달라고 외치며 죽어가는 사람들, 구명보트를 타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

    구스틀로프호와 동반한 어뢰정 뢰베호는 구명보트 속의 사람들과 물에 떠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시작했으나 배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이어 고텐항을 몇 시간 늦게 출발한 어뢰정 T3호가 소련 잠수함과 일전을 겨루며 용감하게 구출작업을 벌였으나 이 참사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1239명에 불과했다.

    전쟁이 끝난 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은 곧 잊혔다. 그와 함께 소련과 동유럽에서 추방된 1250만 독일 민간인이 겪은 고통도 잊혔다. 특히 나치 파시즘의 청산을 사회적으로 공론화한 68세대는 독일을 희생자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해 왔다.

    현재 연방의회 부의장이자 녹색당 핵심 정치인인 안체 폴머는 자기 세대의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우리는 맨정신으론 이해할 수 없는 독일의 가공할 범죄에 대해 동유럽에서 추방된 사람들과 피난민을 생각하며 누군가가 벌을 받아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고통, 폭격의 피해와 악몽은 아우슈비츠에 대한 결산서였다.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 희생자라는 말은 수십년 동안 히틀러에게 박해받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됐고, 독일 민간인의 희생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곧 보복주의자란 혐의를 받았다.

    심리적으로, 자신의 고통에 침묵하는 것은 그것에서 해방될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어쩌면 독일은 칠순을 넘긴 노작가를 통해 이제서야 자신이 다른 민족에게 가한 고통에 대한 참회와 함께 스스로 겪은 고난에 대해서도 문학적 결산을 하게 된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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