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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자의 '오타쿠글라스'

‘옳지 않은’ 날, 옳은 공연으로 힐링

뮤지컬 ‘마틸다’

‘옳지 않은’ 날, 옳은 공연으로 힐링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한동안 월급을 대부분 연극과 뮤지컬 감상에 탕진하던 시기, 미국 뉴욕으로 여행을 가게 됐다. 말로만 듣던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볼 수 있다는데 돈이 대수인가. 저녁 일정을 비워 공연을 감상할 수 있는 날짜는 총 나흘이었다. 미국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의 뮤지컬을 꿰고 있는 ‘뮤덕’(뮤지컬 덕후) 친구에게 “브로드웨이에서 꼭 봐야 하는 작품을 알려달라”고 하자 그가 집어준 작품 하나가 바로 ‘마틸다’였다. 

‘마틸다’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국 작가 로알드 달의 작품이 원작이다. 뮤덕 친구는 “무대가 정말 예뻐서 눈을 뗄 수 없다. 아이들도 귀엽고 실력이 뛰어나다. 어린이가 많이 나오는 작품이라 캐스팅이 힘들 수도 있고 국내 여건상 공연이 어려울 수도 있다”며 뉴욕에서 꼭 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하긴 ‘빌리 엘리어트’도 2009년 첫 공연 이후 한동안 재공연 소식이 없어 팬들을 오매불망 기다리게 하지 않았던가(‘빌리 엘리어트’ 재공연을 위한 주연배우 오디션 이야기는 2011년부터 돌았으나 공연은 2017년 말에야 성사됐다. 공연 준비 기간에 키가 자라 빌리 역에서 하차해야 했던 배우도 있다). 


로버트 달의 걸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마틸다’가 처음으로 국내 관객을 만난다.

로버트 달의 걸작 소설을 원작으로 한 뮤지컬 ‘마틸다’가 처음으로 국내 관객을 만난다.

그런 ‘마틸다’가 한국에 상륙했다. 비영어권 첫 공연이다. 주인공 이름이 곧 작품 제목이며,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을 맡은 어린이가 극을 이끌어간다는 점은 여러모로 ‘빌리 엘리어트’와 닮았다. 이들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것이 부모가 아닌 교사의 몫인 점도. 빌리의 재능을 발견하는 사람이 윌킨슨 선생님이라면, 마틸다의 특별함을 발견하는 건 담임인 허니 선생님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똑똑한 소녀 마틸다는 자신을 학대하는 부모와 아이를 싫어하는 교장의 부당함에 맞서 자신과 주변 인물을 변화시켜간다. 이 작품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이 알파벳이 적힌 큐브를 순서대로 교문에 끼워 넣으며 부르는 ‘스쿨 송’이다. 원래 “So you think you’re A-ble/To survive this mess by B-ing/A prince or a princess, you will soon C/There’s no escaping trage-D…’ 식으로 A부터 Z까지 이어지는 곡인데 한국어로 옮기면 느낌이 제대로 살지 의문이었다.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실제로 공연을 보니 “에이(A)구/근데 지금부터 삐(B)지고 울지는 마라/반항할 시(C)/죽이는 블랙코미디(D)…”로 알파벳을 고스란히 살린 재치 있는 번역이 인상적이었다. ‘약간의 똘끼’에서는 ‘Naughty’와 어감이 비슷한 ‘똘끼’를 활용하는 등 번역에 여러모로 신경 쓴 부분이 돋보였다. 아이들이 무대에서 그네를 탄 채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을 노래하는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은 회사에서 워낙 지친 하루를 보낸 뒤라 그랬는지, 듣다 나도 모르게 ‘어른이라고 다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살 수는 없어’라고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마틸다 배역은 신장 130cm 내외의 10~12세 여자아이가 맡는다. 쉬는 장면이 거의 없고 160분간 춤과 노래,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을 휘어잡아야 하니 실력만큼이나 체력도 필수다. 한국 초연의 마틸다 역으로는 황예영, 안소명, 이지나, 설가은 양이 쿼드러플 캐스팅됐다. 황예영과 설가은 양은 이 작품이 뮤지컬 데뷔작이다. 닉 애슈턴 해외협력 연출가는 이들을 뽑은 이유로 “마틸다 역을 소화하려면 특별한 점이 있어야 한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에너지가 반짝거릴 듯한 아이들을 선발했다”고 말했다. 트런치불 교장 역은 김우형과 최재림, 미스 허니 역은 방진의와 박혜미, 미세스 웜우드 역은 최정원과 강웅곤, 미스터 웜우드 역은 현순철과 문성혁, 미세스 펠프스 역은 김기정이 맡았다.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사진 제공 · 신시컴퍼니]

올해 창단 30주년을 맞은 신시컴퍼니는 ‘빌리 엘리어트’에 이어 어린이가 주인공인 뮤지컬을 잇따라 무대에 올렸다. 박명성 신시컴퍼니 대표는 “‘빌리 엘리어트’에 이어 관객의 폭을 넓혀보고 싶었다”며 “어렵지만 미래지향적인 작품을 선보이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어린이가 주인공이면 학예회 공연 보는 느낌이 들진 않을까’ 하는 생각은 오산. 성인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한계가 없는 것처럼 에너지를 발산하는 모습을 감상하다 보면 넘버가 끝나고 양 엄지손가락이 저절로 올라간다. 

“그건 옳지 않아!” 마틸다가 공연 내내 줄기차게 외치는 말이다. 그러고는 “불공평하고 또 부당할 때 한숨 쉬며 견디는 건 답이 아냐”라고 노래한다. 공허한 외침과 불평,불만에 그치지 않고 행동하는 게 마틸다 식으로 사는 법이다. 하루하루 옳지 않은 일이 있어도 꾹 참고 한숨 쉬며 넘어갔던 나 자신을 반성하며 허리에 두 주먹을 올리고 사무실의 마틸다로 거듭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똘기, 그거면 충분하니까.




주간동아 2018.10.19 1160호 (p78~79)

  •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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