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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리드싱어 돌로레스 오리어든을 추모하며

세기말의 어둠을 따뜻하게 감쌌던 크랜베리스

리드싱어 돌로레스 오리어든을 추모하며

지금 와서 1990년대 차트를 들여다보면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떻게 이렇게 어두운 음악들이 그렇게 인기가 많았지?’ 낙오자의 정서가 그득하고 어린 시절 상처가 지배한다. 세상에 대한 불만과 좌절이 음표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너바나, 펄잼, 앨리스 인 체인스 등으로 대표되던 얼터너티브 밴드들이 시작이었다. 라디오헤드의 ‘Creep’, 그린데이의 ‘Basket Case’ 같은 히트곡은 자학의 찬가였다. 어둡고 탐미적인 음악이 있었다. 스웨이드, 매시브 어택, 포티쉐드, 나인 인치 네일스 등의 밴드가 그랬다. 80년대까지 구석에 옹송그리고 있던 그 어둠은 세기말을 틈타 밝게 빛났다. 그 어둠을 따뜻하게 감싸던 멜랑콜리가 있다. 크랜베리스였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1992년 자체 제작한 싱글 ‘Linger’와 ‘Dreams’가 화제를 모으며 이듬해 ‘Everybody Else Is Doing It, So Why Can’t We?’로 정식 데뷔한 그들을 세계적인 인기 밴드 자리에 올려놓은 건 2집 ‘No Need to Argue’였다. ‘Zombie’ ‘Ode to My Family’ 등이 빌보드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고 국내에서도 앨범이 발매됐다. 

아일랜드 특유의 서정미에 영롱한 기타 멜로디, 그리고 보컬 돌로레스 오리어든의 독특한 목소리는 이제까지 들어본 적 없는 여성 보컬 밴드 사운드였다. 1980년대까지 여성 록 보컬이 재니스 조플린에서 시작된 ‘여자 마초’의 울부짖음이었다면, 비음과 경음을 적절히 섞어 호흡의 말단을 꺾듯이 뱉어내는 돌로레스 오리어든은 동시대 여성 보컬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아직 내전과 가난의 상흔이 가시지 않던 아일랜드의 사회상이 반영된 어두운 가사와 아련함 역시 90년대 정서와 궤를 같이했다. 아일랜드 여가수 가운데 엔야, 코어스가 켈트족의 신비를 대변했다면, 크랜베리스는 시네이드 오코너와 더불어 지역성에서 기인한 보편성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들에게 다른 아일랜드 뮤지션과 비교할 수 없는, 한국에서 인기를 안겨준 노래는 역시 ‘Ode to My Family’이다. 배용준과 전도연을 스타덤에 올려놓은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 삽입곡으로 흘러나오면서 크랜베리스는 마니아 밴드에서 ‘인기 팝그룹’ 자리로 올라섰다. 

그 시절의 일화 한 자락이 떠오른다. 1995년 봄날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 음악감상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되면 동아리마다 신입생 모집 활동을 했다. 각자의 특성에 맞는 이벤트를 했고, 우리는 캠퍼스 한복판에 카세트플레이어를 가져다 놓고 음악을 틀었다. 70년대 아트 록이나 헤비메탈을 틀 때는 냉정히 사라지던 이들이 ‘Ode to My Family’가 흐르자 발걸음을 멈추고 다가와 이 노래 제목이 뭐냐며 물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랬다. 

돌로레스 오리어든과 앨러니스 모리세트가 없었다면 주주클럽이나 초창기 자우림의 음악은 꽤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한국에서건 서구에서건 크랜베리스, 특히 오리어든의 보컬은 1990년대를 상징하는 목소리 가운데 하나다. 지난해 발표된 어쿠스틱 라이브 앨범 ‘Something Else’를 들으며 그때를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1월 15일 돌로레스 오리어든의 급서 소식이 전해졌다. 향년 47세. 그해 봄날 캠퍼스를 떠올렸고,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하던 많은 이가 생각났다. 좋은 시절이었다. 어둠과 슬픔이 멋으로 느껴지는 시절이었다. 나는 아직도 ‘Dreams’를 들으면 아련해진다. 1990년대 밤하늘 아래서 홀로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밤하늘의 별이 된 돌로레스 오리어든을 추모한다.




주간동아 2018.01.31 1124호 (p78~78)

  •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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