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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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다인구 세대’의 쓸쓸한 레트로

1990년대 열풍 뒤 2015년의 다크서클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5-01-19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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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 최다인구 세대’의 쓸쓸한 레트로

    1992년 8월 16일 오후 서태지와 아이들의 공연이 열린 서울 잠실 올림픽체조경기장에 모인 10대 팬들.

    현재 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연령대는 35세에서 49세까지다. 5년 단위로 자른 연령별 인구 분포대에서 이 세대는 유일하게 400만 명 이상이다. 2차 베이비붐 피크였던 1970년생을 가장 두터운 지점으로 삼아, 한국의 연령별 인구 그래프는 이렇게 호리병을 그린다. 이 호리병의 옆구리는 90년대에 10대 초반에서 20대 중반이던 세대다. 바로 90년대 대중문화의 가장 큰 향유자들이다.

    시곗바늘을 좀 더 돌려 1980년대로 가보자. 조용필이 가요계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그 시절, 75년에 태어나 93년 대학에 입학한 나는 남들보다 음악을 좀 더 일찍, 많이 듣기 시작했지만 매스미디어 시대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 온 가족이 한 상에 둘러앉은 저녁시간 TV 채널 선택권은 아버지에게 있었다. 이덕화가 진행하던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나 임성훈이 진행하던 ‘가요톱10’의 끝은 늘 조용필이었다.

    누구나 그랬듯 조용필을 좋아했지만 그게 ‘우리 음악’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공’은 누가 봐도 트로트였고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장엄했다. 오히려 전영록이나 이선희가 좀 더 젊은 느낌이었다. 그러고는 중학교 입학 선물로 엄마가 사준 워크맨에서 흘러나오던 들국화와 이문세가 막 발아하기 시작한 ‘감성’을 깨웠다. 시나위와 부활은 사춘기의 욕망 분출을 달래줬으며, 88 서울올림픽을 전후해 등장한 이상은과 무한궤도는 ‘이게 우리 음악이 아닐까’를 주말이 지난 월요일마다 벌어지는 교실 내 난리법석으로 어렴풋하게나마 환기케 했다.

    1기와 2기, 서태지와 이수만

    ‘우리 음악’, 즉 우리 세대의 음악에 불꽃이 타오른 건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무대였다. 임백천이 진행하던 ‘특종! TV연예’는 저녁식사 이전 시간에 방송된 프로그램이었다. 우리에게 채널 선택권이 있는 시간대였다는 얘기다. 신인 발굴 코너에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은 기성세대 심사위원들에게는 혹평을 받았지만, 이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청소년에게는 말 그대로 벼락을 선사했다. 1988년 강변가요제, 대학가요제 후의 난리법석이 수십 배 증폭돼 전국 교실을 휩쓸었으니 말이다.



    이러한 나의 경험이 그냥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세대 전체의 것임은 그때 이미 확인됐다. 숫자로서의 1990년대가 아닌, 문화로서의 1990년대가 시작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2차 베이비붐 세대 직전의 세대가 만든 문화가 2차 베이비붐 세대를 봉기시킨 것이다.

    그 전까지 한국 음반시장에서 가요와 팝의 점유율은 2 대 8이었다. 그러다 이문세에 이르러 5 대 5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과 함께 마침내 7 대 3으로 대역전극을 썼다. 파이 나눠 먹기가 아니었다. 다른 대부분의 산업과 마찬가지로 음악산업도 가파르게 성장하던 때였다. 단지 가요시장으로의 신규 진입자가 팝의 그것보다 빠르게 많이 늘어났을 뿐이었다.

    2차 베이비붐 세대가 그 주역이었다. 그 전까지 라디오나 ‘길보드’ 혹은 레코드 가게에서 녹음해주는 테이프 정도에 만족하던 소극적인 소비자들이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급격히 음반을 구매하는 적극적인 소비계층으로 변했다. 듣는 걸 넘어 소장함으로써 세대와의 동질성을 추구하려는 욕망의 발로였다.

    ‘사상 최다인구 세대’의 쓸쓸한 레트로

    1990년대 대중음악 시장의 1기와 2기를 대표하는 서태지와 아이들과 H.O.T, MBC TV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에 출연한 S.E.S(위부터).

    이로 인해 음반시장의 주소비층은 20대에서 10대 후반으로 빠르게 넓어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2집 발매, ‘잘못된 만남’이 수록된 김건모의 3집 200만 장 판매 같은 일들이 9시 뉴스에서 다뤄지는 사건은 조용필 시대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다. 2차 베이비붐 세대가 아버지로부터 리모컨을 빼앗았음을 이 시기의 뉴스는 상징하고 있었다.

    음악 패러다임을 순식간에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바꿔버린, 즉 라디오에서 TV 시대로 전환한 댄스 혁명은 1기와 2기로 나뉜다. 서태지와 아이들, 듀스, 노이즈 등의 공통점은 팀 안에 작사와 작곡을 전담하는 멤버가 있었다는 것이다. 댄스그룹이되 밴드 형태를 띠고 있었다는 얘기다. 김건모, 박미경, 클론 등이 속해 있던 라인기획의 대표 김창환은 소속 팀들의 음악 프로듀싱을 전담했다. 이문세-이영훈, 변진섭-하광훈 콤비처럼 가수와 작곡가가 단순한 계약관계를 넘어 일종의 음악 생산 공동체 같은 모양을 취했다.

    이 흐름에 변화가 생겨난 건 1996년을 전후해서다. 그해 초 서태지와 아이들은 ‘창작의 고통’을 토로하며 해체를 선언했다. 김광석, 김성재, 서지원이 잇달아 요절했다. 거대한 공백이 생겼다. 예나 지금이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공백을 싫어한다. 빈자리는 이내 채워지기 마련이다.

    윤일상, 주영훈, 장용진, 최준영 등 여러 가수에게 곡을 주고 이를 히트시키는 신진 작곡가 집단이 부상했다. 터보, 엄정화, UP 같은 팀이 그들의 히트곡을 발판으로 차트 정상을 밟았다. 제작자로 변신한 이수만은 현진영 등의 실패를 딛고 H.O.T를 데뷔시켰다. 서태지와 아이들처럼 사회적 메시지를 심은 ‘전사의 후예’에 이어 ‘캔디’를 통해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번 신드롬은 2차 베이비붐의 아래 세대, 즉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에 태어난 세대를 관통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10대 중·후반, 즉 하이틴이 음반시장의 주역이었다면 H.O.T 이후 가요계의 새로운 고객은 로틴(Low-teen)으로 확장됐다. 아직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이었다. 초등학생도 용돈으로 테이프 정도는 살 수 있는 구매력이 있었다. 젝스키스, S.E.S, 핑클 등 기획사가 주도하는 아이돌 1세대는 당시 로틴을 포섭하며 새로운 주류를 형성할 수 있었다. 현재 케이팝(K-pop)의 원형이 되는 초기 아이돌을 1990년대 댄스음악의 2기로 볼 수 있는 이유다.

    다시 이런 ‘레트로’는 없다

    1기와 2기를 포함한 ‘범90년대 댄스뮤직’은 그래서, 그 어떤 세대의 음악보다 인구수와 연령대에서 넓게 향유된, 대한민국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시대의 음악이다. 어림짐작해도 약 15년에 걸쳐 태어난 세대를 포섭했던 때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이때가 유일할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이 보편화하기 이전이었으니 음악을 접할 수 있는 통로는 아직 제한적이었다. 말하자면 ‘머릿수’와 ‘물량’에서 압도적이었고 ‘단일한 취향’을 형성하기 좋은 조건의 문화 상품이었던 것이다.

    ‘가요무대’ ‘콘서트 7080’과 달리 ‘무한도전: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토토가’)가 순간 시청률 30% 이상을 찍고, 음원 차트를 역주행하며, 심지어 방송 차트까지 장악했던 근본적인 배경이 여기 숨어 있다. 역으로 이는 언젠가 2000년대가 추억이 되는 시점이 올지라도 이만한 반향을 일으키기는 힘들 거라 예측할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마지막 질문이 남았다. 그렇다면 이 현상은 반가운 일인가. 그렇지 않다. 베이비붐 세대가 영화 ‘국제시장’에 열광하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현재를 직시하는 것보다 과거를 추억하는 게 자연스러운 연령대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산성에서 최고조를 찍어야 마땅한 세대가 ‘토토가’로 인해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는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살아가는 추동력이 불안에 근거하는 그런 시대라면 현재는 곧 피로의 동의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현재가 없을 때 과거는 빠르게 추억으로 다가온다. 1990년대 열풍 안에 2015년 한국의 짙은 다크서클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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