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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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마음밭에서 커가는 희망

르포 | 조계종 보현의 집 ‘노숙인 자활 카페’…일자리 알선 등 새 출발 기회 제공

  • 김지현 객원기자 koreanazalea@naver.com

    입력2014-08-18 16: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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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비의 마음밭에서 커가는 희망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자활시설 ‘수송 보현의 집’ 전경(왼쪽)과 이곳 카페에서 제빵을 담당하는 연담 스님.

    “어머, 웬 커피가 이렇게 싸?” 8월 13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 ‘내 생애 에스프레소’ 카페. 2000원대인 ‘착한’ 커피 가격에 인근 직장인이 몰려들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나온 여성 2명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연신 “맛있다”며 깔깔 웃었다. 18일 정식 오픈 예정인 이 카페는 노숙인 자활시설 ‘수송 보현의 집’에서 운영하는 곳. 수익은 노숙인 자립을 위해 쓰인다. 카페 옆 사무실에서는 카페의 기술 지원을 총괄하는 연담 스님(영등포 보현의 집 사무국장)이 옥수수 머핀, 아몬드 파이 등을 혼자 반죽해 굽고 나르느라 분주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복지재단에서 운영하는 수송 보현의 집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세워졌다. 지금까지 노숙인 992명이 거쳐갔고 현재 남성 24명이 생활하고 있다. 숙식을 무료로 제공하는 한편, 음주를 제한하고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저축을 의무화해 자립 기반을 다지게 한다. 불교 재단에서 세웠지만 종교 관련 활동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연담 스님은 “종교는 주입식 교육이 아니다. 내가 먼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면 상대방도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자립 의지 강한 남성 24명 생활

    이곳에 입소한 노숙인은 서울역, 영등포역 등지의 중간 쉼터에서 20여 일 동안 생활한 사람 가운데 자립 의지가 강해 선발된 이들이다. 기간은 2년으로 제한되고 2년이 지난 경우 원하면 추가로 1년을 더 생활할 수 있다. 원래는 기간 제한이 없었으나 최근 서울시가 방침을 바꿨다. 신용삼 수송 보현의 집 소장은 “사실 2~3년 안에 자립해 퇴소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입소자 대부분이 일용직, 공공근로자로 일하는데 한 달 100만 원도 벌기 힘든 상황에서 전세나 월셋집을 얻어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 지난해 8100만 원을 모아 퇴소한 70대 노숙인이 있는데 이곳에서 7년 동안 머물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신 소장은 “입소자들이 충분한 기간을 갖고 새 출발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사무실 옆 33㎡(10평) 남짓한 주방에서는 입소자 정경남(가명·74) 씨가 조리를 하고 있었다. 20대 때 이미 조리사 자격증을 땄다는 그는 서울 워커힐호텔과 국일관 주방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1990년대에는 서울 압구정동, 경기 안산시 등에서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다 외환위기 때 64억 원대 부도를 맞았다. 3년 동안 구치소에 수감됐다가 나오니 오갈 데가 없었다. 가족과 연락이 끊긴 지도 오래였다.



    “집사람은 한참 전 세상을 떠났고, 올해 48세인 아들 하나가 있어요. 어릴 때 야구공에 머리를 맞아 지금 정신병원에 30년 넘게 있습니다. 그 애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데, 내가 얼른 잘돼서 집 하나라도 구해 하나뿐인 아들을 데리고 살아야죠. 이제 남은 꿈이 있다면 그뿐입니다.”

    주방보조로 일하며 모은 그의 적금통장에는 192만 원이 찍혀 있었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하는 ‘민들레문학상’에도 응모했다는 그는 요즘 시를 쓰고 있다. 민들레문학상 수상자는 매입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는데 월세가 저렴하고 보증금은 서울시가 제공한다. 내 집 마련의 꿈을 꾸는 정씨는 하루하루 만족하며 긍정적으로 지낸다고 했다.

    “예전 잘나가던 시절을 생각하면 뭐 합니까. 여기선 공짜로 숙식하죠, 내 용돈도 벌 수 있죠. 소장님이랑 직원들이 마음 편하게 대해줘서 잘 지내고 있어요. 매일 최선을 다하며 삽니다.”

    정씨의 작고 주름진 얼굴에 소박한 미소가 떠올랐다.

    입소자들이 생활하는 3층으로 올라갔다. 일하러 나간 입소자들의 고무 슬리퍼가 문 앞에 흩어져 있었다. 82㎡(25평) 남짓한 공간에는 캐비닛과 수건, 각자의 짐을 싼 검정 비닐봉지가 있어 여기가 임시 거처라는 사실이 실감났다. 낮에 유일하게 남은 김학규(53) 씨가 책을 보고 있었다. 재작년 영등포 보현의 집에서 처음 입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실업급여를 받으며 재취업을 준비 중이다.

    김씨는 입소자 중에서도 학력이 높은 편이다. 유명 사립대 대학원을 나왔고 입소 전에는 모 기업 재무팀에서 일했다. 태양광발전설비, 요양보호사,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지만 외환위기 직후 자신 같은 고학력자 노숙인이 쉼터에 넘쳐났다고 한다.

    “빚 4억 거의 갚고 1750만 원 남았습니다. 학력? 그게 무슨 소용 있나요. 능력 생각하는 것 다 사치입니다. 남 탓하는 것도요. 다 내 잘못이지 뭐.”

    김씨는 자신의 아픈 과거에 대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쉼터에서 지내며 그에게는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바리스타 공부를 하면서 관련 자격증을 4개나 땄고, 커피 공정무역 계통에서 일하겠다는 꿈이 생긴 것. 그는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의 커피 생산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늘어놓으며 “아직 50대니까 몸은 쓸 만하다. 언젠가 네팔에 가서 공정무역 커피 업계에 종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한 공정무역 업체에 입사지원서를 내놓은 상태다.

    그의 꿈은 2년 전 영등포 보현의 집 카페에서 바리스타 일을 배우면서 시작됐다. 처음 만져본 로스팅 기계의 따뜻함이 좋았고, 커피 향기를 맡으며 ‘그래도 절망하란 법은 없구나’라고 느꼈다. 김씨는 “행복했느냐고요? 그럼요. 손님들이 내 커피가 ‘맛있다’고 했을 땐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어요”라며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낙오자’ 편견이 가장 큰 고통

    자비의 마음밭에서 커가는 희망

    ‘수송 보현의 집’에 머물면서 차곡차곡 돈을 모은 한 입소자가 통장을 꺼내 보이는 모습(위)과 불우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이곳에서 바리스타로 일하고 있는 또 다른 입소자.

    ‘내 생애 에스프레소’에서 막 바리스타 일을 시작한 박준철(가명·34) 씨. 20대부터 10년 넘게 유흥업소 영업부장을 했던 그는 사기를 당한 후 쉼터로 왔다. 믿었던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때문에 처음에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쉼터에 오게 된 처지가 창피하기도 했다. 그러다 영등포 보현의 집에서 김학규 씨에게 바리스타 일을 배웠다. 입소자 중 가장 젊은 박씨는 “언젠가 내 가게를 창업하고, 내가 지원받는 만큼 보현의 집에 환원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보현의 집은 불교 생활을 의무화하지 않고 자비와 사랑으로 노숙인을 대한다. 연담 스님은 “마음의 눈으로 보면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사회에서 상처 받은 분도 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라며 “1년에 한 번 템플스테이나 연꽃 만들기를 함께 하면서 입소자들의 마음 상태가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노숙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일반인과 다르다’는 편견이다. 비록 지금은 사회적 약자지만 자립 의지와 능력이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받기를 바란다. 노숙인 대부분이 과거에는 평범한 가장, 회사원이었기 에 타인의 연민이나 동정 어린 시선을 받을 때 큰 소외감과 절망감을 느낀다고 한다. 실패 자체보다 더 힘든 것은 ‘낙오자’로 인식되는 사회적 편견이라는 것이다.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배려는 종교의 구분 없이 이뤄져야 한다”며 종파를 초월한 사랑을 강조했다. 조계종이 후원하는 보현의 집도 자비의 마음으로 노숙인을 감싸 안으며 그들이 건강한 심신으로 사회에 돌아갈 수 있도록 든든한 응원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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