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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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크의 사자’ 아틀레틱 클루브, 40년 만에 스페인 국왕컵 우승

[위클리 해축] 바스크人 입단하는 ‘순수 혈통주의’ 고수해오다 최근 문호 넓혀

  • 박찬하 스포티비·KBS 축구 해설위원

    입력2024-04-20 09: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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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는 ‘순수 혈통주의’를 추구하는 흥미로운 축구팀이 있다. 사자(獅子)라는 별명을 가진 프리메라리가 아틀레틱 클루브(Athletic Club)다. 영국 노동자와 영국에서 유학한 바스크 학생이 창단했기에 영어 단어 ‘athletic’을 공식 명칭으로 쓴다. 사자 무리에 던져졌지만 설교로 짐승들을 유순하게 만들었다는 성인을 기리는 산 마메스 교회 근처에 홈 경기장이 있어 사자라는 별명이 생겼다. 이 팀은 ‘아틀레틱 빌바오’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졌는데, 이는 공식 명칭이 아니다. ‘스포르팅 리스본’으로 알려진 포르투갈의 스포르팅 CP처럼 명칭이 잘못 알려진 대표 사례다. 유럽 다른 나라 기자들이 기사에 아틀레틱 클루브 이름을 오기해 팬들이 항의하는 일이 종종 생길 정도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아틀레틱 클루브 선수들이 4월 6일(현지 시간) 국왕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GETTYIMAGES]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아틀레틱 클루브 선수들이 4월 6일(현지 시간) 국왕컵 우승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고 있다. [GETTYIMAGES]

    강등 굴욕 없는 영광의 역사

    1898년 창단된 아틀레틱 클루브는 1929년 시작한 스페인 프로축구 1부 리그인 프리메라리가에서 한 번도 하부 리그로 강등되지 않은 전통을 자랑한다. 스페인에선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아틀레틱 클루브만이 가진 자랑스러운 역사다. 아틀레틱 클루브는 프리메라리가 우승 8회, 국왕컵 우승 24회에 빛나는 업적도 갖고 있다. 물론 긴 역사 속 위기도 있었다. 2005~2006시즌 내내 하위권을 맴돌며 강등 위기를 겪다가 2월 이후 살아나며 중위권 안착에 간신히 성공했다. 바로 다음 시즌에는 한 경기만 남은 37라운드까지 강등권에서 1점차 살얼음판 승부를 이어가다가 마지막 38라운드에서 가까스로 생존했다. 이때 아틀레틱 클루브와 달리 실제 강등된 팀 중 하나가 지역 라이벌 레알 소시에다드다. 1980년 초반과 후반, 2000년대 초반 호시절을 보낸 레알 소시에다드는 당시 강등 후 몇 년을 고전하다가 2010년대 들어서야 다시 1부 리그에 복귀했다. 레알 소시에다드는 라이벌 아틀레틱 클루브와는 구단 정책부터 상이하다. 적극적인 외국인 선수 영입이 대표적이다.

    아틀레틱 클루브에는 아주 독특한 구단 정책이 있다. 바로 바스크 사람만 아틀레틱 클루브 유니폼을 입을 수 있다는 일종의 순혈주의다. 이는 스페인 국적이 아닌 외국인 선수 영입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선수도 아틀레틱 클루브에서 활약해왔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에 걸쳐 있는 피레네산맥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바스크인은 아틀레틱 클루브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뿐 아니라, 프랑스 바스크 지방도 포함된다.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98년 월드컵과 유로 2000에서 활약한 빅상트 리자라쥐가 대표 사례다. 리자라쥐는 프랑스인이지만 바스크 출신이기에 아틀레틱 클루브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혈통상 바스크인이 아니어도 바스크에 어느 정도 연고가 있으면 아틀레틱 클루브 선수로 뛰는 데 문제가 없다. 과거 아틀레틱 클루브는 바스크 지방에서 태어난 바스크인만 선수로 고집했지만 선수 영입에 어려움을 겪자 허들을 완화했다. 최근 들어선 바스크 지방 유소년팀에서 활약했다면 입단이 가능하다.

    넓어진 문호 덕에 입단한 선수들은 뛰어난 실력으로 아틀레틱 클루브를 빛내고 있다. 2021년 프리메라리가를 택해 지금까지 대표 선수로 활약 중인 에므리크 라포르트는 프랑스 태생으로 유소년 시절 자국 연령별 대표를 지냈다. 라포르트는 2010년 아틀레틱 클루브 유소년팀에 합류했는데, 당시 현지에서 그가 팀 일원이 될 자격이 있는지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유소년 시절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중심 도시 바욘의 아비롱 바요네에 몸담았고, 나중에 증조부가 바스크 혈통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페르난도 아모레비에타는 아버지가 바스크 사람이라 유소년 때부터 구단에 합류할 수 있었고, 아틀레틱 클루브 최초 흑인 선수 호나스 라말로는 앙골라인 아버지와 바스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격을 얻었다. 바스크로 이주한 아프리카 난민 가정 출신인 이냐키 윌리암스도 아틀레틱 클루브 선수로서 당당히 뛰고 있다. 동생 니코 윌리암스는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활약 중이다.



    스페인 빌바오 네르비온강에서 4월 12일(현지 시간) 아틀레틱 클루브의 국왕컵 우승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가바라’로 불리는 바지선을 타고 네르비온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우승을 축하하는 게 아틀레틱 클루브의 전통이다. [GETTYIMAGES]

    스페인 빌바오 네르비온강에서 4월 12일(현지 시간) 아틀레틱 클루브의 국왕컵 우승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가바라’로 불리는 바지선을 타고 네르비온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우승을 축하하는 게 아틀레틱 클루브의 전통이다. [GETTYIMAGES]

    유소년·미래 지도자 육성에도 적극적

    아틀레틱 클루브는 4월 6일(현지 시간) 스페인 국왕컵에서 우승하며 자랑스러운 업적을 하나 더 추가했다. 국왕컵은 스페인의 모든 축구팀이 출전해 대결하는 FA컵 격 대회다.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이강인 선수의 이전 소속팀 레알 마요르카를 꺾고 우승컵을 받아 들었다. 1984년 이후 40년 만에 이룬 쾌거다. 아틀레틱 클루브는 바르셀로나에 이어 국왕컵에서 두 번째로 많이 우승했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 트로피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번 우승은 1984년 이후 결승에서만 6번 고배를 마신 끝에 쟁취한 것이기에 더 값지다.

    시대 흐름에 따라 순혈주의는 옅어지는 추세지만 아틀레틱 클루브의 자부심은 더욱 또렷해지고 있다. 선수들은 아틀레틱 클루브 일원이 된 것을 영광으로 여기며 팀과 팬, 바스크를 위해 활약한다. 선수 영입에 거액을 쏟아부어 전력을 유지하는 오늘날 유럽 축구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지역 주민들의 끈끈한 애정 속에서 아틀레틱 클루브는 유소년 및 미래 지도자 육성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지닌 전통 강호의 미래가 더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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