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56

..

“하늘이시여!”…충무공의 새벽

이순신 장군, 윷점 통해 국가 위기 탈출 간절한 물음

  • 글 | 임채우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 slgi660@daum.net

    입력2012-09-24 11:2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하늘이시여!”…충무공의 새벽
    올해는 임진왜란 발발 420주년인 임진(壬辰)년이다. 조선을 전기와 후기로 명확히 이등분하는 기준선 구실을 하는 임진왜란은 아마도 병자호란, 6·25 전쟁과 함께 전국토를 황폐화시킨 민족의 3대 환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가슴 아픈 임진년에 우리는 또 독도 문제로 일본과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필자 기억으로는 한일협정 이후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일본과 외교적 마찰을 빚은 적은 없었다. 공교롭게도 필자는 최근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 나오는 척자점(擲字占)의 정체가 바로 윷점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의도적으로 시기를 맞춘 것은 아니지만, 6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임진년에 임진왜란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충무공의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역사 속에 흐르는 인과의 끈을 느낀다.

    진중에서 점을 치다

    ‘난중일기’에는 충무공이 직접 척자점을 친 점사(占辭) 기록이 14조나 남아 있다. 척자점이란 숫자(字)를 던져서(擲) 치는 점(占)이라는 뜻으로, ‘윷점’을 말한다. 윷도 숫자화할 수 있다. 도, 개, 걸, 윷, 모를 말이 가는 칸 수대로 1, 2, 3, 4, 5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승경도(陞卿圖)놀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전통 주사위 윤목(輪木)을 사용하면서 그 눈금 수를 도, 개, 걸, 윷, 모로 표기한다.



    충무공은 왜병과 싸우는 진중에서 점을 쳐 미래 길흉을 묻곤 했다. 충무공이 직접 친 척자점의 내용을 보자.

    “1594년 7월 13일, 홀로 앉아 아들 면의 병세가 어떤지 척자점을 쳐서(擲字占之) ‘군왕을 만나는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괘가 나와 매우 길하였다. 다시 치니 ‘어두운 밤에 등불을 얻은 것과 같다(如夜得燈)’는 괘가 나왔다. 두 괘가 모두 길하여 마음이 좀 놓였다. 또 유성룡 재상의 점을 쳐보니 ‘바다에서 배를 얻는 것과 같다(如海得船)’는 괘를 얻었고, 다시 점쳐서 ‘의심한 일이 기쁨을 얻는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괘를 얻었으니 아주 길하고 길하다. (중략) 비가 저녁 내내 내렸다. 비가 내릴지 개일지를 점쳤더니 ‘뱀이 독을 토하는 것과 같다(如蛇吐毒)’는 괘가 나왔다. 앞으로 큰 비가 내릴 듯하니 농사일이 매우 걱정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중략) 7월 14일 비가 계속 내리더니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삼대 같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간신히 밤을 지냈다. 과연 점친 대로 결과가 그대로 나타나니 매우 오묘하도다.”

    충무공은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전세의 길흉을 묻는 점도 자주 쳤다.

    “1594년 9월 28일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적을 치는 일에 대해 길흉을 점쳤더니 처음에는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는 괘가 나오고, 다시 점을 쳤더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는 괘가 나왔다. 바람이 불순하여 홍도 안쪽 바다로 진을 옮겨서 머물렀다.

    1596년 1월 10일 이른 아침에 왜적이 다시 나타날지를 점치자 ‘수레의 양쪽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如車無輸)’는 점괘가 나왔다. 다시 점치니 ‘군왕을 뵙는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점괘가 나왔는데 모두 기쁘고 길한 괘였다.”

    충무공이 직접 점친 내용은 기록으로 10여 건 전해지지만, 사실은 이보다 더 자주 척자점을 쳤을 것이다. 그 근거로 먼저 충무공은 척자점을 깊이 신뢰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충무공이 윷점의 효험에 대해 “과연 점친 대로 결과가 나타나니 매우 오묘하도다”라고 찬탄한 것을 보면, 당시 답답한 전황이나 시국과 관련해 적중도가 높다고 믿은 척자점을 자주 쳤을 가능성이 있다.

    누락되고 오해받은 충무공의 척자점

    다만 전황이 급할 때는 일기를 누락하거나 소홀히 기록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군중의 급무에 대해 점을 치고도 일일이 적지 못했을 수 있다. 가령 큰 전쟁이 벌어진 임진, 계사, 정유년 일기는 누락된 날짜가 많은 반면, 큰 전쟁이 없었던 갑오, 병신 일기는 비교적 일정하게 연속적으로 작성한 것을 보더라도 이런 추정이 가능하다.

    충무공은 대개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뒤 촛불을 켜놓고 조용히 앉아 점을 쳤다. 무척 정성스럽게 점을 쳤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점을 치는 기본이다. 점치는 자가 간절하지 않고 정성을 들이지 않는다면 점괘는 겉돌게 마련이다. 바꿔 말하면 물음이 간절할수록, 정성을 들일수록 점사는 더욱더 점문(占問)하는 자에게 절실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충무공이 임란 중에 점을 쳤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또 민족 성웅(聖雄)으로 추앙하는 충무공이 윷점을 참고했다는 사실을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대체 어떻게 된 연고일까.

    우리는 오래전부터 ‘난중일기’를 국보로 지정하고, 수십 차례에 걸쳐 간행 및 번역 사업을 했다. 충무공이나 ‘난중일기’에 관한 연구와 저술은 수천 종을 헤아린다. 하지만 척자점은 그동안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정조 때 어명으로 간행한 ‘이충무공전서’다. 여기에서는 충무공을 영웅화하려고 곳곳에서 본문 내용을 삭제하거나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척자점에 대한 부분을 고의로 누락했다.

    예를 들어보자. 1594년 9월 28일자 ‘난중일기’에는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적을 치는 일에 대해 길흉을 점쳤더니 처음에는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는 괘가 나오고, 다시 점을 쳤더니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는 괘가 나왔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이를 ‘이충무공전서’에서는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적을 치는 일로 길흉을 점쳤더니, 길한 것이 많았다”는 식으로 척자점사의 구체적 내용을 정확히 언급하지 않은 채 얼버무렸다. 충무공이 척자점을 쳤다는 사실 자체가 성웅 이미지에 누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이시여!”…충무공의 새벽
    척자점과 윷점

    그러나 이는 기우(杞憂)이며 오해일 뿐이다. 원래 군중(軍中)의 장수는 자주 점을 쳤다. 세종대왕은 변방에 나가 있는 절제사에게 점서를 하사하면서 “적을 상대해 군사를 쓸 때는 점괘(占卦)를 쳐보되, 이에 구애받지도 말고 이를 무시하지도 말 것이며, 때에 맞게 잘 참작해 시행하도록 하라”고 훈시를 내렸다. 이렇게 군중에서 혹은 전쟁터에서 장수가 점을 치는 것은 수많은 장병의 목숨이 달렸기 때문에 신중을 기하려는 일종의 배려였으며, 또 적군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던 당시로서는 전황을 예측하는 작전의 일환이기도 했다. 이는 개인 기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장병과 백성의 생명을 좌우하게 될 전투에서 신중한 판단을 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충무공은 아마도 밤새 잠 못 이루며 고뇌하다 새벽에 의관을 정제하고 홀로 앉아 하늘에 간절히 물었을 것이다. 수많은 백성의 생명과 국가 존망이 달린 위란에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고뇌했을까.

    그동안 우리는 충무공을 구국 성웅으로 추앙하려고만 했지, 그의 인간적 번민과 일상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충무공 연구의 권위자인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 소장은 “충무공을 현실에서 동떨어진 성웅이나 군신(軍神)으로 너무 영웅화, 신격화함으로써 오히려 탁월한 군사 전문가로서의 모습이 가려졌다”고 지적한 바 있다.

    충무공이 전쟁 중에 쓴 ‘난중일기’에 담긴 솔직한 독백에서 우리는 그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외로움과 번민에 고뇌하는 충무공에게서 우리는 인간 이순신을 발견하는 것은 물론, 말할 수 없는 외로움과 번민을 극복하고 구국 성웅이 되는 과정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에는 충무공이 본 척자점이 중국 불경이나 점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필자가 지난 10여 년간 꾸준히 자료를 수집하고 조사한 결과, 충무공이 점친 척자점은 바로 우리 전통의 윷점이며, 이는 우리 민간에서 만들고 전승해온 한국식 역학의 결정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특히 필자가 최근 발굴해 공개한 ‘육십사괘상례(六十四卦象例)’(이하 상례본)는 기존의 어떤 판본보다도 더 ‘난중일기’ 속 척자점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물론, 내용이 가장 자세하고 체제도 완성돼 있다.

    “하늘이시여!”…충무공의 새벽

    윷점놀이는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민중이 즐겼던 민속문화다.

    상례본은 현재 전하는 ‘난중일기’ 속 척자점사 12개 가운데 10개가 정확히 일치하고 2개가 유사해 일치율이 대략 92%다. 기존에 비교 대상으로 삼던 유득공의 ‘경도잡지’(5개 일치)나 ‘소강절척자점’(8개 일치)보다 훨씬 더 높은 일치율이다. 그뿐 아니라 상례본은 주역 괘와 윷점 점사를 적고 그 아래에 다시 오언절구나 칠언절구로 점사를 풀이했다. 또 임신, 혼인, 실물, 송사, 여행, 병세, 택일, 장례 등 당시 조선시대에 절실했던 생활상에 대해 길흉을 판단하면서, 중국 역사에서 실례를 들어 구체적인 답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조선시대 관청명, 거주지와 사람 이름을 자세히 적어 당대 우리나라의 점속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대부분 중국식 명리서가 유행하던 것에 비하면 상례본은 우리의 윷점 점속에 대해 대단히 자세하고도 체계적으로 수록한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상례본을 중심으로 ‘난중일기’ 속 척자점을 살펴보면, 척자점이 바로 윷점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상례본을 중심으로 기존 윷점에 관한 여러 판본을 종합적으로 비교 분석함으로써 ‘난중일기’ 속 척자점사를 복원할 수 있었다.

    윷점의 정체 - 놀이와 점(占)

    본래 윷에는 점(占)치는 기능이 있다.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호모 루덴스’라는 책에서 인류의 놀이와 주술성을 언급했는데, 윷놀이가 바로 이런 전형적인 예에 속한다. 다시 말해 서로 짝을 이뤄 윷을 놀거나 점을 치는 윷놀이 습속은 단순히 승부를 겨루는 놀이가 아니라 한 해의 풍흉을 점치는 주술성을 내재한 놀이인 것이다.

    이것이 시대가 지나면서 마을 단위 윷놀이 대회로 변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가 팽배하면서 양반층이 점잖지 못한 놀이라고 멸시해 민중과 규방 놀이로 축소됐던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민간에서 주역 64괘를 우리 실정에 맞게 해석하고, 이를 우리 고유의 점법인 윷에 적용해 개발한 것이 바로 윷점이다.

    그래서 윷점에는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우리 민중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다. 예를 들어 점사 가운데 ‘중이 환속한 격’ ‘아이가 어미를 만난 격’ ‘주린 이가 먹을 것을 얻은 격’ 같은 표현은 조선시대 민중과 여성의 애환을 그대로 담았다. 이런 점사는 중국 점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 정서를 담은 우리 고유의 민간 역학(易學)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미니인터뷰 ㅣ 임채우 한국윷문화연구소 소장

    “이순신 윷점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할 것”


    글 | 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하늘이시여!”…충무공의 새벽
    충무공 이순신이 점친 척자점의 정체를 밝힌 임채우 한국윷문화연구소장(51·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 교수)을 만났다. 임 소장은 연세대 대학원에서 주역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지난 10여 년간 윷놀이 기원과 주역철학의 의미를 밝히는 연구에 매진해왔다. 8월 29일 영남대에서 열린 국제주역학회에서 충무공이 점친 척자점을 분석한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10여 년간 윷문화 연구에 천착해온 이유는 무엇인가.

    “윷문화는 비단 우리만 즐긴 것이 아니다. 한반도를 중심으로 저 멀리는 베링 해를 거쳐 북미와 남미 대륙에서도 우리 윷놀이와 비슷한 문화가 전해졌다. 윷문화를 연구하는 동안 우리 문화의 원형이 전혀 엉뚱한 지역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고, 그 상관관계와 연원을 밝히려고 연구에 몰입했다.”

    한국 윷문화가 세계적 윷놀이 문화의 원형이라는 주장은 이미 미국 민속학자 스튜어트 쿨린(1858∼1929)이 제기한 바 있다. 그는 ‘한국의 놀이’(1895년 간행)라는 저서에서 “한국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며 인도 게임인 ‘파치시(pachisi)’와 ‘차우자(chausar)’의 도형은 십자형이 있는 윷판을 확장한 형태고, 윷놀이에서 발전한 놀이가 서양 체스와 일본 야사스카리 무사시(八道行成)라는 사실을 놀이방식이나 판 형상 등을 통해 조목조목 설명했다.

    한국윷문화연구소 설립 목적은.

    “올해 초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교수를 중심으로 우리 윷놀이와 고유문화에 관심을 가진 회원 100여 명이 모여 발족한 모임이다. 윷문화에 대한 자료조사와 정리, 윷놀이에 대한 학문적 체계화, 올바른 윷문화 보급과 홍보를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이런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궁극적으로는 우리 윷문화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현재 벌이는 사업에는 어떤 것이 있나.

    “하늘이시여!”…충무공의 새벽

    주춧돌에 새겨진 윷판.

    “윷판은 특이하게도 암각화 형태로 전국에서 발견된다. 보통은 산등성이에 있는 너럭바위에 새겨졌는데, 고인돌 덮개 바위에도 새겨져 있고, 사찰에 있는 주초석에서도 발견된다. 현재 유물로 본다면 윷판 제작 시기는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참으로 오래된 한민족 고유의 도형이지만, 중국에는 이런 도형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고속도로 같은 도로 건설과 확장, 산야 난개발 등으로 전국에 산재한 윷판 암각화가 점점 사라져간다. 이를 보존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시급한 우리 사업이다.”

    임 교수는 한반도에 살았던 선사시대 문명의 정화인 윷판 암각화는 한국 고대문명의 존재를 증명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그가 지난 10여 년간 윷문화에 매달려온 이유도 고대 천문도를 의미하는 윷판 암각화가 한반도 고대문명의 핵심 증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댓글 0
    닫기